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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25화 (57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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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뻐꾸기시계

고산국 본토는 그 동안 총리 혜영이 안정적으로 잘 다스리고 있었다. 국왕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행정체계와 백성들의 일상이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이민호는 뿌듯함을 느끼는 동시에 약간 섭섭함을 느꼈다. 그러나 고산국 왕도는 겉으로만 평온했을 뿐이었다.

“큰일이에요. 어서 지하 창고에 가보세요.”

“왜? 은이 너무 많아서?”

혜영을 따라 왕궁 지하 창고에 도착했다. 실내 체육관만한 크기의 창고 몇 개가 금과 은으로 가득 찼다. 특히 은은 이민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 쌓여 있었다.

최근 명나라에서 은 가격이 폭락하자 혜영의 주도로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명나라의 은을 대량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은의 가치를 같은 무게 금의 12분의 1로 억누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은이 고산국으로 대량 유입됐다. 그 은을 시중에 유통시키면 고산국 경제체제가 붕괴될까 두려운 혜영은 왕궁 지하 창고에 은을 가득 쌓아두었다.

“왕궁 확장 공사를 해야 되겠다.”

“이 상황을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녀요?”

“한참 전부터 예상했잖아? 예상보다 많아서 좀 문제긴 하지만.”

몇 년째 명나라는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로 경제기반이 점점 허물어졌다. 상업은 마비됐고 수공업은 붕괴돼 농업 외에는 간신히 비단과 도자기 산업만 살아남았다.

명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부자들은 금과 은을 지하나 벽 안쪽에 숨겨 대부분이 유통되지 않았다. 고산국의 상품 수출도 항저우와 난징 등 일부 도시에 국한되며 점점 줄어들었다.

“어떤 나라든지 생겼다가 사라지는 거지 뭐.”

“명나라가 망한다고요? 주상아 공주님께 일러바치겠어요.”

“내가 틀린 소리 했어? 토지 소유권이 지나치게 집중되니까 농민들이 못 버티고 유민이 되거나 농사를 포기하지. 일부 개혁만으로 어찌 해볼 단계는 이미 넘었어. 명나라의 운명은 사실상 끝났다는 거야.”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말기에 다 그렇듯 지나친 토지 겸병이 가장 큰 문제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편히 놀고 생산자인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해 아무리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결국 유민으로 떠돌게 된다. 유민들이나 한계에 몰린 소작농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테니 반란에 쉽게 가담했다.

“고산국은 오래 가겠죠?”

“그거야 모르지. 영원한 것은 없어. 하지만 나는 혜영을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승강기와 수레 덕택에 무거운 금과 은을 나를 수 있게 된 이후, 왕궁 지하 창고는 호위들 외에는 출입할 수 없었다. 이민호가 혜영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심각한데 장난치지 말아요!”

“뿌리치지는 않는군. 흐흐!”

“애들이 보잖아요! 이번에도 또 여자들을 데려왔죠? 나갈 때마다 여자를 들여오면 되겠어요?”

말과는 달리 혜영은 이민호가 여자를 들이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일을 나눠서 할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은근히 반겼다.

“덴마크 왕녀 포함 여섯에 아이슬란드 여섯. 합이 열둘이야. 잘 부려먹도록 해.”

“앞으로 주인님이 어느 지역을 중시할지 새로 구한 여자들의 국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어요. 너무 뻔히 드러나요.”

“반드시 그런 건 아닌데. 하여튼 모든 땅을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고산국이 명나라보다는 조금 더 오래 갈 수 있을 거야. 역대 중국 정권들처럼 오로지 땅 때문에 짧게 끝나지는 않겠지.”

모든 토지를 왕토로 규정한 고산국이라고 해서 결국 망할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 더 이상 농지를 나눠주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넓은 농지로 인해 곡물가가 폭락한다면 농민이 땅에서 유리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고산국도 똑같이 국가 멸망 과정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이 농업 기계화 이후 상공업을 육성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농민이 고산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해 다른 나라에 비해 농업 인구 비율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 가지 산업이 발전한 다음에는 현대 선진국들처럼 농민이 전 인구의 1퍼센트, 서비스업 종사 인구가 80퍼센트가 되도록 조정해야 했다. 낙농업과 양조업 등 농업관련 산업이 늘어난다면 10퍼센트까지도 가능했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모든 나라의 지도자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먹고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일자리가 없고 시민 대부분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더라도 로마 말기처럼 일단 먹고 살게만 만들어주면 국가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외적의 침입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 여부도 바로 이 일에 달려 있었다.

역사에서 가끔 등장하는 귀족정이 단기간에 무너지고 외척이나 환관 등 세도가가 생긴 왕정제 국가가 오래 못 가서 망하는 것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백성에 대한 책임감과 권력의 정당성 없이 권력을 쥔 자들이 국가의 부를 특정 개인 또는 몇몇 가문에 집중시키기 때문이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견제수단이 사라진 뒤에는 부정부패와 아귀다툼만 남을 뿐이었다. 공화정이 얼마 못 가서 쉽게 왕정으로 돌아서는 것도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는 약간 다르게 생각했지만 왕도에서 벌인 국내외 사상가들의 장기적인 토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처럼 작은 나라가 아니라면 군주정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명나라나 오스만 제국, 그리고 에스파냐의 군주들을 보면 영 아니었다.

“평생 애써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궜는데 자식들에게 상속을 못해준다고 조선 출신 양반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아요. 역사상 어느 악독한 임금도 재산권을 침탈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요.”

“내 땅인데 왜 자기네들끼리 상속하고 말고 지랄이야? 왜 내 재산권을 지들이 마음대로 침탈하냐고!”

농민들은 이미 개간된 땅을 배정받았기에 낯짝이 두꺼운 일부 농민 외에는 함부로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재배할 작물을 바꿀 때는 아예 땅을 반납하고 쉽게 다른 농장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조선에서처럼 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편하게 살면서 큰소리 치고 싶어 하는 양반들이 농민의 이름을 빌려 흔히 하는 소리였다.

“쿡쿡! 화내는 모습이 장난감 빼앗긴 애 같아요.”

“고산국 국경선 안에 든 모든 땅은 다 내꺼야!”

고산국 본토에서 유일하게 산악지대에 사는 고산족만 그리 넓지 않은 산간 지역 경작지와 집을 자식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북미 원주민들은 원래 소유권 개념이 없지만 경작권은 가지고 있기에 관개시설이 완비된 농장을 내주는 대신 쉽게 고산국 토지 제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맞는 말씀이에요.”

“나머지 재산은 상속할 수 있는데 왜 그리 남의 재산에 욕심이 많은지 모르겠어. 어쨌든 땅은 절대 안 돼.”

이 시기에는 아직도 토지가 가장 유효한 생산수단이었다. 공장이나 어선 같은 다른 모든 생산수단도 국유화하려다가 자칫 공산주의가 될까봐 관뒀다. 현대 선진국들이나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한 것처럼 자본주의 중에서도 수정 자본주의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제도인 것은 역사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소유권에 적절한 제한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적 모순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시대 유럽의 다양한 중상주의는 야경국가를 이상형으로 삼고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 상식이었다. 그린벨트를 설정하거나 공공 목적으로 정부에서 토지를 수용하는 것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국방을 용병부대나 민간군사회사에 맡기고 장애인과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자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를 소멸시키고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치자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래서 요즘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땅 소유를 포기하고 여러 가지 사업체를 차리는 게 유행이에요. 회사 등록이 대폭 늘었어요.”

“사업체라. 좋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나쁠 건 없어. 고산국에서야 사업이 망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까 마음껏 사업을 하라고 해.”

기본소득이라는 탄탄한 제도가 있으니 농업이나 봉급을 타는 일 외에 그 이상의 부를 모으는 것은 사업체를 차린 자들의 몫이었다. 성공하든 망하든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제 고산국 백성들도 온실에서 벗어나 황야에서 홀로 설 때가 됐다. 일부는 대박을 치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실패할 것이다. 현대에도 창업회사 대비 9할은 몇 년 내에 실패하고 사업을 접는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패배한 자들도 안전한 집에 돌아가서 몸을 추스른 다음, 다시 돈의 전쟁터에 나설 시스템이 고산국에는 갖춰져 있었다. 큰 성공은 못하더라도 살아남은 기업들이 생기고 이것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어찌 잘 굴러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재화가 남아돌면 주인님이 외국에 다 팔아줄 자신이 있으세요?”

“응? 왜 내가 팔아줘야 하는데? 사업을 차렸으면 알아서 팔아먹어야지. 만약 못 팔면 잘못 만들었거나 시장예측을 잘못한 거지.”

“냉정해요. 역시 주인님은 최소한의 것만 갖춰주겠다는 의도군요.”

“최소한이라고 하지만, 국가에서 해주는 게 워낙 많잖아. 그 이상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새로 생기는 회사에 땅과 건물을 지원하고 회사 지분을 받아내. 나도 회사들 덕 좀 보자.”

“회사 차릴 때 땅과 건물을 지원해주는 나라가 고산국 말고 세상에 어디 있어요? 고산국에서 창업한 회사는 시작부터 유리한 입장이에요.”

모든 백성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무료 교육에 무료 의료까지 국가에서 책임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걸핏하면 마누라와 애들을 두들겨 패는 술주정뱅이나, 사업하면서 고용인 임금이나 하청업체 물품대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사기꾼들도 다 고산국의 백성이었다.

물론 이혼하기 쉽고 개인별 통장에 기본소득이 입금되기에 아내와 자식들은 도망치면 된다. 경찰 조사나 이혼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주정뱅이 폭력남편으로부터 일단 도망치라고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교육시키고 있었다. 사기꾼에 대한 형량도 높은 편이라서, 탄광에 끌려가기 싫으면 외국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선량한 채무자에 대해서는 재기할 기회를 줬다.

“회사가 많아져서 세무 관리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어요.”

“일이 많은 게 아니라 상인과 결탁한 부패가 걱정되는 거지?”

“그래요. 하지만 세무 관리들의 봉급만 올려줄 수는 없잖아요?”

“봉급 올려준다고 부패를 안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확률이 달라져요.”

어차피 유럽과 물가 수준을 맞추기로 했으니 조만간 임금과 가격 인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공무원의 봉급과 최저시급, 기본소득, 전기와 수도 서비스의 공급가격, 공공건물의 월세 등 모든 것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화폐는 그 다음에 손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고산국이 수출을 통해 큰 이익을 본 것은 다른 지역에서 구하기 어려운 사치품이라는 것도 이유였지만 물가수준 차이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단적으로 땅이 넓은 북미도 아닌 고산국에서 생산한 밀이 유럽에 가면 최소 열 배로 가격이 뛰었다.

“금과 은 가격의 전반적인 인하와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다 올려주더라도 곡물 가격만이라도 동결하면 어때요? 쌀 가격이 열 배로 오르면 명나라 쌀이 대거 수입되면서 명나라 사람들은 굶어죽을 거여요. 감당 못해요.”

“으으! 그럼 안 돼. 차라리 본토와 북미의 경제를 분리시킬까?”

“어차피 며칠이면 태평양 건너편으로 이전돼요. 쌀값이든, 금값이든.”

“끙! 이런 식이면 되는 게 없어.”

유럽과의 경제 동조화 문제는 바로 옆에 명나라 때문에 몹시 힘들 것 같았다. 혜영도 머리를 싸매고 해결방안을 찾는데 몰두했다.

둘이서 한참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최 선생이 집무실에 들어와서 보고했다. 오랜만에 본 최 선생의 미모가 빛을 발했다.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고 안경을 쓴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전하! 리마두라는 선교사가 전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선교사요? 바빠 죽겠는데 별의별 사람이 다 보자고 하네. 교황 성지 순례 지원 문제는 며칠 후에 협의하기로 했지 않소?”

“마카오와 본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분들과 달리 명나라에 계신 분이세요. 저번에 천주실의라는 책을 꼭 출간하라고 하셨잖아요?”

“가만! 천주실의 저자 리마두? 당장 보자고 해요. 정중히 모시도록 하세요.”

리마두(利瑪竇)는 마테오 리치의 명나라 이름이었다. 예수회 선교사이며 기독교 선교를 위해 명나라에 왔지만 명나라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민호는 주상아 공주를 급히 불러 함께 알현실로 향했다. 곧 명나라에서 존경받는 학자들의 복장인 흑건청포를 입고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서양인이 알현실에서 인사를 올렸다.

“고산국의 국왕전하께 예수회 선교사 리마두가 인사 올립니다.”

“태서유사, 어서 오시오. 몇 번 만나 뵈려고 했다가 이제야 보게 됐군요. 선생처럼 훌륭하신 신의 종을 만나 뵙게 돼서 반갑소.”

“신의 종이라뇨! 감당하기 어려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죄송..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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