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23화 (572/1,000)

00623  64. 오대호  =========================================================================

다음 날 오전 헤드비히 공주와 눈물의 작별을 하고 호위전대와 함께 새동래로 향했다. 고산국의 해운 능력을 초과한 발트 해 무역을 헤드비히 공주와 서인도회사에 맡기고 그들이 잘해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고산국만으로 다 할 수는 없었으니 동업자들을 믿어야 했다.

이틀 걸려서 새동래에 도착했는데, 작년에 비해 유럽 이주민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래서 새동래의 행정과 지상군 및 대서양-카리브 함대의 지휘권을 쥔 병조 참판에게 물었다.

“참판! 새동래에 이주민이 수천 명씩이나 도착했다는 보고는 없었지 않소?”

“전하! 저들은 지난 며칠 동안 총함장께서 생포한 해적들입니다. 제가 2년 동안 잡은 해적보다 훨씬 많습니다.”

참판이 혀를 내둘렀다. 어쩐지 이민자치고는 다들 암담한 표정이다 싶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해적 포로들은 철조망을 둘러친 임시 수용소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에스파냐 관리들이 해적 포로 수천 명 중에서 현상수배범을 골라내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자들이나 살인을 일삼은 악질 해적 두목들이 대상이었다.

관리들은 대상자들을 고른 다음 현상금을 새동래 관리에게 지급하고 나서 포로들을 데려갈 예정이었다. 현상수배범들은 몇 개월 동안 재판을 받은 다음 대체로 사형을 언도받을 자들이었다.

“전하! 프랑스에서 옮겨 심은 포도 여러 종류가 이곳 토양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확량이 예상보다 적어서 프랑스 출신 양조 농가들이 곤란해 하고 있습니다.”

“저런! 양조 농가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할까요?”

플로리다가 기후는 좋은데 토양에 석회질 함량이 높은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이주민들이 포도밭에 객토 작업을 해서 토질을 중화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거의 매년 이런 힘든 일을 해야 한다면 포도밭을 텍사스로 옮기는 게 나았다. 물론 텍사스가 건조한 기후이므로 포도 품종도 내건성이 있는 종으로 새로 구해야 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농업연구소에서 북미 여러 지역에 다양한 야생포도 품종이 번식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석회질 토양에 강한 야생포도를 다른 품종과 교잡을 시키거나, 내병성이 강한 품종을 대목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병조 참판은 무관 출신 맞지요?”

참판은 말하는 투로 보아 포도 농사를 30년쯤 지은 사람 같았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돼 있습니다.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이 보통 큰 것이 아니더군요. 시장 일을 맡으면서 전하의 어깨가 무거움을 실감했습니다.”

“낯 뜨겁게 무슨 소리요? 참판이 열심히 일하니 든든하오.”

때마침 강 하구를 통해 순양함들이 들어오자 병조 참판이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그 동안 바하마 제도에서 해적들과 숨바꼭질하느라 시달린 참판은 총함장 이순신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 총함장께서 돌아오십니다.”

총함장 이순신은 이번에 순양함 중에서 8척만 이끌고 갔다가 나흘 만에 돌아왔다. 며칠 전에는 9척으로 사흘 동안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전하! 해적 소탕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간단히 하십시오, 총함장님.”

국가 경제 대부분을 교역에 의존하기에 고산국 사람들은 해적을 몹시 증오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다음 이민호는 엄청난 결과에 기뻐하기보다는 해적에게 연민을 갖게 됐다.

“수용소에 갇힌 해적 포로 2천 명을 전하께서 보신 것 같습니다만, 그때 사살도 2천여 명이었습니다. 큰 범선 열다섯 척과 중형선 일곱 척을 격침시키고 작은 배 스무 척 정도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이 사흘 전 작전이었습니다.”

“눈부시군요.”

“이번에도 비슷합니다. 다만 소탕작전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지 사살보다 포로가 훨씬 많습니다. 큰 배 두 척을 격침시키고 열한 척을 나포했습니다. 나머지 중형선과 소형선은 다 침몰시켰습니다. 사살 4백 명, 포로는 3천여 명입니다. 이로써 바하마 군도 해적들을 모두 소탕했음을 보고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3일 혹은 4일짜리 단기 작전 두 번으로 바하마 제도와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섬 700개를 모두 수색하고 소탕했다고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지휘관이었다면 믿지 못하겠지만 총함장 이순신이 그랬다면 부하들이 그만큼 고생했을 거라고 이해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함대를 둘로 나눠서 한꺼번에 교대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 차이를 두고 투입했다. 그래서 작전 지역까지 왕복하는 시간을 줄이고 수색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작전에서 바하마 본섬의 산으로 도망간 해적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날이 건조하기에 해병들을 상륙시켜 산 곳곳에 불을 놓아 모조리 태워버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민호가 지휘했다면 이렇게 과감하게 섬을 불태울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적을 왜적만큼 증오하는 이순신이라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대하듯 바하마 본섬을 홀랑 태워버렸다.

“이번 두 번째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해적선들이 유럽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이 포착됐습니다. 그래서 즉시 추격해서 한꺼번에 열한 척을 나포할 수 있었습니다.”

“화끈하군요.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이민호 옆에서 같이 보고를 들은 병조 참판의 턱이 내려앉았다. 2년 동안 바하마 제도의 해적들과 숨바꼭질하느라 노심초사하던 참판은 총함장이 보고한 전과를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증거인 해적선 열한 척에서 밧줄에 묶인 해적들이 줄줄이 부두로 내려왔다.

“전하! 마치 제가 그 동안 해적들을 숨겨준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무능력한 소신을 벌하여 주옵소서!”

“참판! 참판은 나처럼 보통 사람이오. 총함장님과 비교하면 안 돼요.”

대서양-카리브 함대도 그 사이 꾸준한 증원이 있었다. 기존의 전선 전대는 주변 해역 수색 임무로 전환되고 순양함 2개 전대 8척이 1개 전대씩 교대로 해적 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조만간 전함 몇 척이 증원 배치되면 명실상부한 대서양 함대로 승격될 예정이었다. 좁은 카리브 해 지역에서 해적 소탕을 하던 임무에서 벗어나 대서양 전체를 관할하고 유럽도 작전 권역 내에 포함시킬 것이다.

“문제는 바하마 제도 몇 군데 섬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입니다. 이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해적인지 양민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해병들이 상륙했는데도 조직적으로 저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일단 양민으로 추정하고 내버려뒀습니다만,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착생활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에스파냐 보물선을 습격하겠지요.”

“그럼 당장 다시 가서 마을을 불사르겠습니다.”

“아닙니다. 해적질한 증거가 없으니 일단 내버려두세요.”

프랑스 출신 해적인 버캐니어가 활발히 해적질할 시기는 아직 아니었다. 고산국 탓에 이들은 어쩌면 영원히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게 될 수도 있었다.

“폐하! 제가 날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운 좋게 폐하도 알현하고 총함장님이 해적 포로들을 이렇게 많이 잡아오셨으니 말입니다.”

느끼하게 생긴 젊은 에스파냐 귀족 관리가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바하마 제도와 함께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까지 떠맡아 심통이 난 이민호가 불퉁거렸다.

“공짜로 해적 소굴을 소탕하게 됐으니 에스파냐는 좋겠소.”

“좋습니다, 좋고말고요. 고산국 덕택에 은을 실은 수송선을 본국으로 보낼 때 호위 함선을 많이 동원할 필요가 없어져서 더욱 좋습니다.”

관리가 이민호를 약 올렸다. 그러나 해적은 공동의 적이기에 고산국이 손해 본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현상수배범은 다 골랐소?”

“예. 오늘 잡힌 놈들 중에 현상금이 높은 악질적인 해적 두목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잡힐 줄 몰랐습니다.”

“나머지 해적들은 어찌 할 거요?”

“고산국에서 잡았으니 고산국에 처분권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알아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민호가 싱긋 웃었다. 부족한 광부들을 싼 값에 얻었기 때문이다.

“해적질을 한다고 쉽게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해적이 많은 것이오? 아무리 잉글랜드 놈들이 남의 것을 빼앗기를 좋아한다지만 조금 심한 것 같소.”

“아마도 드라코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워낙에 대박을 쳤으니까요.”

에스파냐 관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캡틴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형식적으로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사략선 선장이었으나 에스파냐와의 해전보다 약탈로 훨씬 유명해진 자였다. 1596년에 이미 죽은 그는 잉글랜드에서 해적의 전설로 남았다.

문제는 제2의 드레이크를 꿈꾸는 자들이 이렇게 무턱대고 바다로 몰려나온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포로가 된 해적들 말고도 앞으로 해적이 되고 싶어 하는 꿈나무들이 지금도 잉글랜드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폐하! 현상수배범은 아니지만 여자 해적들을 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보상금을 지불하겠습니다.”

진짜 해적질을 한 여자들인지, 아니면 해적인 남편이나 애인을 따라다니며 밥이나 해주는 여자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관리의 표정이 야릇한 것도 아니고 표독스럽게 변해서, 도저히 데려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 해적 여자들이 에스파냐에 넘어가면 아주 잔인하게 죽일 것 같았다.

“노예로 쓰려고 하시오? 그렇다면 거절하겠소.”

“예. 그럼 고산국에서 노예로 쓰시기 바랍니다. 부디 오래 살려두지 마십시오.”

“처분은 고산국 고유의 권한이오.”

에스파냐 관리들을 보내고 나서 여자 해적들을 불러 모았다. 잉글랜드 여자들은 남편이 근무하는 부대를 전쟁터까지 따라다닐 정도로 억척스런 면이 있었다. 남편을 위해 식사준비나 세탁 등 허드렛일뿐만 아니라 적군 확인사살과 전리품 수집까지 그 여자들이 맡았다.

여자들은 다 합해서 200여 명이었는데 방금 멕시코로 끌려간 해적 두목들의 여자가 네 명이었다. 한 명은 늙어서 본부인이 틀림없었고 나머지 세 명은 젊고 미인이라서 애인으로 추정됐다. 나머지 여자들은 젊거나 늙었고, 간혹 아주 어린 애는 늙은 여자와 모녀 관계로 파악됐다.

여자아이들을 보고 생각나서 수용소에 갇힌 해적들 중에서 15세 이하 남자아이를 모두 데려왔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아.”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부디 자비를!”

“무슨 소리야?”

고산국 군대를 뭘로 보느냐고 화를 내려다가, 이 시대에는 생각하는 게 다 이래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은 300명에 가까웠다. 몇몇 남자아이들은 과도하게 해적이라고 웅변하는 복장을 입고 있었으나, 체구가 작아서 잘해야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너희들을 보내주겠다. 잉글랜드는 아니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풀어줄 테니까 거기 잉글랜드 주둔군에게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저희들을 군대에 맡기면 군대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부디 잉글랜드에 내리게 해주십시오.”

“자국 군대를 못 믿는다는 거야?”

“시대가 하수상해서 믿기 어렵습니다.”

신분이 불안정한 자들을 군대에 맡기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적인 군대의 어두운 면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파견된 쇄환사가 조선인 포로들을 부산포에 데려와 집에 보내주라고 경상좌수영에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쇄환 포로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경상좌수영에서 노비로 붙잡혀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다.”

“수용소에 갇힌 제 남편은 어떻게 됩니까?”

“너희들의 남편이나 애인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이상 탄광에서 일하게 될 테니까 죽었다고 봐도 좋아.”

여자들이 울부짖었으나 이미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처분이었다.

병조 참판에게 해적 여자들과 아이들을 새원산으로 보내라고 했다. 이들이 포로는 아니지만 적대적 주민으로 분류해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다.

포로를 광부로 써먹으려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몇 가지 예방접종을 했다. 해적들은 주사기가 사형 집행 도구인 줄 알고 겁에 질렸으나 큰 저항은 없었다.

“너희들을 봐서 기쁘다.”

이민호가 씩 웃자 해적 포로들이 마치 악마를 본 듯 고개를 급히 숙였다. 몇몇은 땅에 엎드려 애원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폐하!”

“내가 너희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일 좀 해줘야 할 것이다.”

애팔래치아 탄광에서 평균 10년 이상 무료로 일해 줄 훌륭한 광부가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해적 포로들 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잉글랜드인들은 석탄 캐는 일에 익숙해서 더욱 좋았다.

포로가 된 해적들에게 평생 광부 일을 시키면 자살하거나 탈출을 시도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5년 이상 일한 해적 포로들 중에서 성실한 자들부터 석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하면 다들 미친 듯이 일할 것으로 기대했다.

“저희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폐하? 살려만 주신다면 중노동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탄광에서 10년 정도 일해주면 풀어주겠다. 5년차부터 몇 명씩 석방될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열심히 일하도록.”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것은 젊고 건강한 남자라도 극히 힘들고, 특히 제대로 먹이지 않고 강제노동을 시키면 생존율이 뚝 떨어졌다.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다면 사형과 다름없다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적 포로들은 잉글랜드인들이었다.

“정말이십니까? 거짓말 같습니다. 처벌이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뭐?”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해적 포로들이 괜히 센 척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내용이 이어집니다.

해적 소탕도 하고 탄광 광부도 구하고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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