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21화 (570/1,000)

00621  64. 오대호  =========================================================================

“전에 놀이공원을 만들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만들어야지. 도시마다 약간씩 차이를 둬서 만드는 게 좋겠어. 놀이공원마다 특성이 있다면 도시를 여행 다닐 이유가 늘어나잖아.”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유원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민영이나 다른 호위들이 더 기대하는 것 같았다. 청룡열차나 대관람차는 물론 귀신의 집도 생각해두었다.

“전하! 도시 전체를 골고루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백화점이나 상가 건물을 거리마다 분산시키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시장!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더욱 신이 나는 법이오. 부모 손잡고 나온 저 아이들 표정을 보시오. 교통 체증이나 안전 문제가 없다면 상가가 한 지역에 집중되는 편이 괜찮소.”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릴 만한 번화가 지역이 도시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억지로 상가를 분산시킬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온데 전하! 새원산 상인 조합에서 이곳과 비슷한 백화점을 만들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허가해줘도 될는지요?”

혜진이 운영하는 백화점에서 물건의 품질은 당연히 최상품이었다. 유럽 상인들도 백화점에 와서 각종 상품을 살펴보고 나서 구매처를 문의하는 식으로 백화점을 일종의 상품 전시장 역할로 생각했다.

상인 조합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역할이었다. 상인 조합에서 운영하는 수출 상품 전시장이 따로 있었지만 유럽 상인들은 고산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지 직접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고산국에서 인기 좋은 상품이라야 유럽에서도 더 잘 팔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백화점 운영을 통해 판매와 홍보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으려 했다.

“상인들이 백화점 상품 유통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소. 이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만 수천 종류가 넘어요.”

“상인들이 혜진님의 도움으로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시장이 눈치를 보는 것이, 새로 백화점이 들어서면 후궁인 혜진의 사업체와 경쟁이 돼서 곤란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혜진이 돈 벌려고 세운 백화점이 아니었다.

왕도를 비롯해 도시마다 백화점을 세운 목적은 새로운 상품을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지방의 수공업자들에게 기술적인 자극을 가하는 것이었다. 특허권이 아직 없는 이 시대에 수공업자들에게 제작기술을 공개하는 마당에,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백화점을 차린다 해서 딱히 거부할 일도 아니었다.

왕실에서 하는 사업도 조만간 독점에서 벗어나 경쟁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이미 예견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이민호도 몰랐다. 반독점법을 금과옥조로 삼아 독과점이나 신디케이트에 철퇴를 마구 휘두르는 미국식 대응 방식은 잠시 접어두고 경쟁자를 키워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시청에서 지원을 잘해주시오.”

“상인들이 백화점을 세우는데 시청에서 허가해준 것만으로 모자라 지원까지 해준단 말입니까?”

“저들이 역적 도당은 아니지 않소?”

“아아! 제게는 상인 무리가 무도한 역적 도당으로 보입니다만,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전하.”

아무리 건국 초기라 해도 상인들을 무조건 키워주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본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국제성을 띠게 되겠지만 최소 몇 백 년 동안은 국가의 이익과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길 원했다.

국가의 지원과 백성들의 호의 속에서 성장이라는 단물만 빨아먹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었다. 어느 회사든 지분의 절반 이상이 국가나 왕실, 혹은 이민호의 개인 소유라 해도 조만간 완전한 민간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또한 성장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철저히 버릇을 들여놓기로 했다.

“앞으로 새원산에 상인이 더 많아지면 상인 조합을 업종이 아니라 지역별로 나눠서 경쟁시켜야 할 것이오. 상공업자들을 지원해줄 뿐만 아니라 항상 견제해야 하오.”

“상인들이 이미 가격 담합을 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어서 경고를 주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생기면 시장이 내게 건의해서 회사를 해체시켜버리겠다고 위협하시오. 시장은 잘하고 있소. 국왕인 나도 비록 상인에서 출발했지만, 관리가 상인에게 휘둘리는 순간 그 지역은 끝장이오. 관리는 처벌을, 상인들은 나를 경쟁상대로 삼아야 할 것이오.”

“누구든 전하와 경쟁하면 일 년도 안 돼서 바로 파산하겠습니다.”

이민호의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현대, 즉 이 시대의 미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조건 키워주기만 해서는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통제에도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은행 자본은 정말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래서 왕도로 돌아갈 때가 됐지만 이민호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은행과 조폐국 관련된 중요한 일은 아무래도 혜영과 협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무역 흑자와 광산 개발로 인해 금과 은이 부족할 일은 일단 없었다.

유럽과 교역 규모를 확대하면 가격 변동이 심해지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도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러나 무역자유화가 전체적으로 고산국에 이익이 크고 결국은 고산국이 가야 할 방향이기에 과감히 추진하기로 했다.

피해를 받는 백성들은 따로 구제하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고산국의 소득이 높은 편이었지만, 유럽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낮았다.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싣고 오는 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실에서 제공한 온실 속에서 고산국 상공업자들이 편하게 자라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상공업자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옥석을 가려야 할 때였다.

앞으로 정부와 지방정부들이 할 역할은 경기 규칙을 만들고 공정하게 집행시키는 일이었다. 당연히 산업계와 지방정부에 각종 부패와 협잡이 판을 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야 했다.

독립적인 감사원이 이미 출범했고 호조에서도 회계학 전문가들이 속속 영입됐다. 이제는 회사들이 가짜 회계장부로 속이기도 쉽지 않았다.

다음 날 호위함대를 이끌고 새강릉으로 출발했다. 오후에 도착한 국왕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승강기를 타고 새강릉 시청 옥상에 오르는 것이었다.

“국왕전하! 어서 오십시오.”

“대추장은 옥상에서 아예 사는군.”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포우하탄 연맹 추장이 시청 옥상에 천막을 쳐두고 생활하고 있었다. 덕택에 승강기를 탈 겸 시청 옥상에 구경 온 다른 원주민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잠시 조용히 구경한 다음 내려갔다.

“우리 포우하탄 사람들이 잘 살게 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직접 농사를 짓는 포우하탄 사람들이 많아졌지? 시장에게 잠시 보고 받았는데 농지 면적이 거의 두 배로 늘었어.”

“시청 관리들과 농부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포우하탄 원주민들이 시청 농업 관리들을 달달 볶아서 개간된 농장을 배정받아 본격적으로 고산국식 관개농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작년과 달리 고산국이나 아일랜드 농민들과 같은 면적을 받았다.

차이라면 농장에 원주민 세 가족이 입주했다는 것에 있었다. 천막이나 오두막에 한 가족씩 살던 원주민들이라 농가주택에 방이 세 개밖에 없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농업기술이 부족하면 인력으로 때우겠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요즘도 밀과 옥수수 농사만 짓나? 남아도는 곡물보다는 과수원이나 채소 농사가 나을지도 몰라.”

“맞습니다. 저희들끼리만 먹고 살던 때와 달라졌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작년부터 담배 농사를 크게 지으라고 시켰습니다. 비료를 뿌리니까 예전처럼 뿌리에 뱀장어를 심지 않아도 잘 자라더군요.”

“윽! 잘했네.”

유럽으로 밀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것이 담배였다. 그러나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 때문에 새강릉 시청 같은 지방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담배를 경작하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이번에 발트 해 연안 국가들에 갔을 때도 담배는 거의 팔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 상인들이 새강릉이나 새원산에 와서 대량으로 사가는 것이 바로 담배였다. 20개 들이 한 곽, 열 갑으로 한 갑을 포장한 것이 금방 국제적 표준이 되었다.

포우하탄 원주민들은 농지 절반에 밀을 심고 절반에는 담배를 심었다. 그 넓은 경작지에 담배만 심으면 세 가족이라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무자들을 고용해서 담뱃잎을 따는 식으로 담배 농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저희가 고산국이나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벌어도 됩니까? 그것이 조금 걱정됩니다. 사실, 좀 두렵습니다.”

“무슨 소리? 자네들이 직접 일해서 번 것인데 감히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부러우면 자기들이 직접 담배 농사를 짓든지 하면 되지 뭐하러 남을 시기해?”

이 시대에 담배라는 품목 자체가 비쌌다. 그래서 밀이나 쌀농사를 짓는 사람들보다 담배농사를 대량으로 짓는 원주민들의 수입이 훨씬 높아졌다. 그 전에 원주민들이 자그마한 텃밭에 자기들이 피울 것만 담배를 키우던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새강릉에서 담배 재배 면적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담배 농사는 일손이 많이 필요해서 나머지 농지가 빈 땅으로 남게 되는 문제가 생겼다.

농업노무자들을 고용하려 해도 담배 농사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마다 농장을 얻어 직접 담배농사를 지었다. 농업노무자 숫자가 확 줄어든 대신 농가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민호가 일부 사람들에게 걸어놓았던 2년 혹은 3년 기한이 다가오면서 농부로 전업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렇게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제야말로 저희들이 진짜로 전하의 백성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과도하게 많이 짓지는 말게. 담배는 가격 등락폭이 커서 나중에 값이 떨어질지도 몰라. 농장 하나에서 4분의 1까지만 짓게.”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인력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그 이상 짓기도 어렵습니다.”

원주민들이 담뱃잎을 말려 담배공장에 납품하면 그 즉시 대금을 지급받았다. 담배공장 자체가 고산국 국영이라 대금을 떼먹거나 지급을 늦추는 일도 없었다. 담뱃잎을 썰어서 종이로 감고 한쪽 끝에 솜으로 필터를 끼운 궐련이 주력 생산품이었다.

요즘 유럽에서 흡연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담뱃잎 가격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빈민으로 추락할까봐 이민호가 걱정하던 포우하탄 원주민들의 미래가 담배농사 하나로 완전히 해결됐다.

“제 노예, 노예라니까 이상한데 사실 제가 입양한 가족입니다만.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벌어서 고민입니다. 다들 고산국 금화와 은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습니다.”

“은행에 맡기면 돼. 내 소유의 돈 보관소일세.”

“아! 은행이 전하 소유였군요. 그럼 안심입니다.”

원주민들이 지난 2년 동안 은 천 냥 이상씩 벌었다. 담배 재배야 원주민들이 예전부터 해오던 것이었지만, 시청에서 지원해준 덕택에 생산량이 수백 배로 뛰어오른 덕이었다. 시청에서는 밭을 개간하고 관개시설을 설치해줬고, 그리고 밭을 가는 등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농기계를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싸게 공급된 인산염 비료가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고산국이나 아일랜드 농민보다 원주민들의 수입이 훨씬 높아지자 갑작스럽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떤 작물을 재배하든 농민이 결정할 일이라 시청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시청에서는 가격 정보만 제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담배의 원산지는 다른 곳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수천 년 동안 담배 농사를 지은 원주민들보다 이주민들이 더 잘 짓기는 어려웠다. 밀농사와 반대로 이번에는 원주민들이 시청 관리들과 고산국,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위치가 역전됐다.

이곳은 실제 역사에서 1607년 버지니아에 건설된 제임스타운 정착지와 가까운 곳이었다. 굶주리던 정착민들은 이곳 원주민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배워 유럽에 수출해서 드디어 먹고 살게 됐을 뿐만 아니라 큰돈을 벌었다.

제임스타운의 노총각들은 1619년에 여성 90명이 건너오자 담뱃잎 60kg을 지급하고 장가갈 수 있었다. 사람들을 모집하고 범선에 태워 대서양을 건너온 비용이 엄청나서 나중에는 신대륙 이주민들이 2, 3년 단기 노예로 일해서 갚아야 할 정도였다. 그 비용을 담뱃잎 60kg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그 당시 담배의 높은 가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혹시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포우하탄 원주민들은 고산국에 정복된 노예들이 아니야. 고산국 사람들과 함께 새강릉을 세우는 일에 협력한 나의 백성들이야. 포우하탄 원주민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해.”

“고맙습니다. 전하는 진정으로 나의 왕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워.”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는 민영이 안고 온 아기 고양이와 함께 잘 놀았다. 고양이는 아이를 알아보고, 이민호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과 달리 아이가 조금 귀찮게 해도 꾹 참았다.

“새강릉 시장이 싱글벙글한 이유가 있었군.”

“농업만으로도 부유해지기 쉬운데 담배라면 아예 차원이 다르겠어요. 저 멀리까지 다 담배 밭이라니, 여기까지 담배 연기 냄새가 전해지는 것 같아요.”

민영이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밭이 옥수수 밭이 아니라 담배 밭인 것을 확인했다. 작년까지 온통 밀밭과 논이었는데 올해에는 지평선 너머까지 담배 밭으로 바뀌어서 어이가 없었다.

왕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지만 유럽에서 팔리는 담배 가격을 알고 있었다. 담배는 차나 설탕만큼 큰 시장이었고, 거의 고산국 독점 상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밀농사만으로도 충분히 부자가 되는데 그보다 훨씬 많이 버는 담배 농사라니. 다른 직종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겠다.”

“직공들이 가난한 사람들은 절대 아닌데 부유함의 개념은 상대적이니까요.”

농촌에서 여유 인력을 짜내서 도시로 보내 싼 임금 노동자로 일하게 하는 일반적인 산업발전 과정과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이민호는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끈지끈 골치가 아팠다.

현대 미국과 고산국은 거의 비슷했다. 강력한 순양함으로 대표되는 군사력과 공업의 상징 제철소는 단지 겉모습일 뿐, 고산국의 진정한 정체도 광활한 농경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국가였다. 물론 공업 생산력에서 고산국을 앞설 나라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북미 원주민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섰습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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