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20 64. 오대호 =========================================================================
“왕도나 북미 도시들에서 많이 봤지? 수입은 농민들이 훨씬 많지만 젊은이들은 땅에 메이는 농사를 짓기 싫어해. 개인 시간을 많이 갖길 원해서 퇴근 시간과 휴일이 보장되는 직장에 고용되거나 직접 사업을 하려 하지.”
“맞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게으르다고 어른들에게 욕을 많이 먹어요.”
고산국에 이민 올 때부터 이미 노인이었던 조선 출신의 소수 노인들은 고산국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사실 거의 없었다. 경작지를 배분 받아 농사를 짓더라도 농업기계화에 적응하지 못해 수확량이 평균에 비해 훨씬 적었다. 문제는 밭 갈기나 수확 같은 힘든 일에 농기계를 빌리는 것마저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고추나 채소 같은 재배에 힘이 덜 드는 작물을 권해도 여전히 쌀농사가 최고라는 인식을 버리지도 못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고산국에 와서 인생이 부정당하는 참담한 기분일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조선에서 자기들이 한 것처럼 열심히 농사일을 하지 않고 쉬운 일만 찾는다고 젊은이들을 나무라기 일쑤였다. 농부들에게도 기계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몸을 써서 땅을 일궈야 진정한 농부라는 주장을 했다.
“농부야 하상 부지런해야 하는 건 맞는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젊은이들이 연애도 해야 하고, 놀러 다니고 해야 의류나 외식, 관광 산업도 발전하지.”
“농부들도 노는 시간은 많아요. 겨울에는 몇 달 동안 놀 수 있어요.”
겨울에 농민들이 술만 마시거나 농악놀이라도 한다면 차라리 건전한 여가 선용이었다. 그러나 시커먼 남자들끼리 모이다 보면 처음에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사생결단을 하고야 마는 도박에 빠지기 쉬웠다.
“그래? 겨울에 못 놀게 비닐 온실을 대대적으로 보급해야겠군. 제일 많이 버는 직종이 농민인데 겨울 내내 놀기까지 한다면 불공평하잖아. 물론 농번기에 농민이 죽도록 힘든 건 나도 알지만.”
“농민들을 일 년 내내 부려먹게요? 너무 하세요!”
민영이 까르르 웃었다. 그 소리에 살짝 잠이 깬 헤드비히 공주가 이민호의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덴마크 시녀들이 긴장했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북미는 더 심각해. 새강릉 주변에서 봤겠지만 농장 하나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이 100명분을 훨씬 넘어. 채소나 과수 농가, 포도주 양조장 같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농민과 그 가족이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을 넘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야. 유럽에 곡물을 대규모로 수출하면서도 말이야.”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큰일이겠어요. 조선에서는 백성 대부분이 농민이라서 이런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예상 못했어요.”
농업생산성이 낮아서 다른 직종을 다 합해도 소수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농업 산출량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농민 비율을 제한하고 다른 산업을 육성해서 백성들이 일해서 먹고 살게 만들어줘야 했다.
사실 현대 국가에서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장의 기계화, 자동화로 인해 공업생산성이 점차 향상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선진국에서 서비스업이 고용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정부나 서비스업에서 일자리를 더 늘리기 위해 고민했다. 별로 할 일도 없는 공무원 정원을 대폭 늘리는 것은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기 아이는 남에게 맡기고 남의 아이를 돌봐주는 것도 기가 막힌 직업 창출 방안이었다. 보육시설에 세금을 지원하기에 유지 가능한 제도였다.
“사실, 일을 안 하면 좀 어때?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반드시 일할 필요는 없잖아?”
“네에에? 일을 해야 먹고 살잖아요. 아니. 고산국에서는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네요.”
민영이 큰 혼란에 빠졌다. 항상 이민호를 따라다니는 민영이 이럴 정도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물어봐도 뻔했다.
지금은 인구가 부족해서 일자리가 넘쳐난다지만 짧은 시기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래에는 정반대 상황이 되는 것을 이민호가 직접 눈으로 봤고 모두가 불행해지는 상황을 통탄했었다.
이민호가 살던 한국에서 직장인들은 명퇴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최저 시급은 OECD 기준으로 무척 낮았다. 경제적으로 신분 상승할 방법은 부동산 투기밖에 없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가 돌아갔다가, 주택가격 하락으로 인해 하우스 푸어로 전락해 은행의 노예가 되었다. 국민 대부분이 사는 것 자체를 힘겨워 했다.
고산국에서는 그럴 일이 아예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 부동산 투기도 없고 집 하나 구하려다 평생 대출금을 갚느라 허리가 휘는 일도 없어야 했다. 그래서 고산국의 모든 땅은 왕토였다. 건설경기를 활성화시키면 경제지표가 아주 좋아진다는 사실을 이민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비용이 커서 과감하게 포기했다.
“걱정 마. 지금은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 필요한 직공도 제대로 못 구하고 있으니까. 일자리는 남아돌아. 농민 수입에 비해 임금이 지나치게 낮고 이익은 많이 남으니까 앞으로 임금을 팍팍 올려줄 수 있어.”
“다행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인구가 늘어날 테니 일자리를 유지하려면 상공업이 계속 발전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하고 싶은 사람만 일해도 되는 세상은 이민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가능하다면, 20세기 후반 이후의 산유국이었다.
“맞는 말인데, 그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지. 직공들이 생산하는 상품 절반 이상은 외국으로 비싸게 수출되고 있어. 원가의 열 배는 넘을 거야. 우리 고산국은 유럽과 명나라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해. 우리의 호, 아니 고객이지.”
“고객들이 망하지 않게 해야겠네요.”
“물론이지. 다만 조선이나 명나라와 달리 유럽에는 금과 은이 너무 많으니까 좀 더 뽑아 먹어도 돼.”
“헤드비히 공주님의 역할이 크겠군요.”
헤드비히 공주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이민호 품에 안겨 헤실헤실 웃으며 자고 있었다. 민영이 헤드비히의 얼굴을 덮은 금발을 살짝 옆으로 치웠다.
공주가 운영하는 덴마크 서인도회사는 발트 해 상권을 장악하고 이민호에게 꾸준히 이익 배당을 해줄 화수분 같은 회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도박꾼이 아니라 하우스 장이 돈을 다 따듯이 자본 유출의 문제점을 깨닫는 순간 한자 동맹 도시들은 이미 개털이 되고 난 다음일 것이다.
며칠 새 부쩍 자란 아기 고양이는 침대 구석에서 몸을 말고 잤다. 경계심이 강한 야생 동물이었지만 이민호가 주는 들소 고기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도 이민호를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느낌이었다.
“고양이가 독립성이 강해요. 이해해주세요.”
“귀여운데 뭐.”
개보다는 고양이가 훨씬 치명적으로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야생성이 살아있는 고양이는 주변의 새와 작은 포유류를 마구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알면서도 북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말려도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크게 이익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잘못된 상식으로 인해 고양이를 때려잡았고, 쥐가 불어나 흑사병이 더 쉽게 전염됐다는 설이 있었다.
“나중에 크면 새끼를 낳게 하고 싶어요.”
“예루살렘에서 구했지? 그럼 그 근처에서 수놈도 구할 수 있을 거야.”
이민호는 원래 야생 고양이에게 불임수술을 시키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아직 자식이 없는 민영 때문에 차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이 야생 고양이가 집고양이와 교미를 할 수 있는지, 후손을 본다 해도 수정 능력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종이 다른데도 가끔은 유전자가 뒤섞이기도 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새원산이다. 이틀 동안 열차 여행을 해서 그런지 몸이 뻐근해.”
“이 도시는 올 때마다 언제나 활기가 넘쳐흘러요.”
이리에서 출발해서 이틀 만에 새원산에 도착했다. 현대의 뉴욕 위치인 새원산은 북미 최대의 국제도시이며 인종의 종합 전시장이었다. 다만 노예매매가 금지돼 흑인이 거의 없을 뿐이었다. 흑인은 북미보다 오히려 고산국 왕도에 더 흔했다.
“시장! 젖소가 잘 배분됐는지 모르겠소.”
“홀스타인 젖소는 전하의 하명대로 새원산에 열 마리, 새강릉에 열 마리씩 나눴습니다. 이번 겨울을 넘겨보고 적응이 가능한 것으로 판정이 되면 덴마크나 네덜란드에 대량 주문하면 좋겠습니다.”
시장이 젖소 추가 도입 계획을 보고했다. 물론 이민호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효율보다는 절차가 중요할 때도 있었다.
축산업을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일단은 젖소들을 키워서 교배시키고 숫자를 늘려야 했다. 또한 우유를 생산하고 분배하며 만약 남을 경우 치즈와 버터 등을 생산하는 일도 일단은 관리들이 할 일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사육방법과 부산물 처리 방법이 정해진 다음 민간에 젖소를 분양할 예정이었다.
“암놈은 젖을 짜고 수놈은 거세시켜서 비육우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오.”
“들소 고기 맛이 별로였습니까, 전하? 들소라면 미시간 호 서쪽에 있다는 대평원에서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들소를 길들여서 고정적으로 고기를 얻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이 먹을 양식을 빼앗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야생동물이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로 남은 까닭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고기도 중요하지만 아기들이 먹을 우유와 분유를 먼저 해결해야 하오.”
“항상 미래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이민호도 아직 20대밖에 안 됐지만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가 컸다. 기대한 만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이민호의 자식들도 어느덧 20명이 넘어갔다.
다들 평복으로 갈아입고 시장의 안내를 받아 이번에 개관했다는 백화점을 구경하기로 했다. 마침 일을 쉬는 토요일이라서 교외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백화점이나 상가 거리에서 북적거렸다.
“시장! 길거리에 웬 귀부인들이 저리 많소? 유럽 귀족들이 단체로 이민 온 적이 있소?”
“저들은 이민 온 아일랜드와 모리스코인들입니다, 전하.”
“그래요?”
정말로 옷이 날개였다. 고향에서 너무 고생하는 바람에 나이보다 늙어 보였던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북미로 이주한 뒤부터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면서 미모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여기에 좋은 옷을 입고 비싸지는 않지만 장신구를 달고 다니니 유럽 하급 귀족들에 못지않았다. 물론 수입은 북미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고국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경험 때문에 저축 성향이 굉장히 높았다. 저축률이 높은 것이 소비를 진작해야 하는 국가 입장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옳은 경제적 선택이었다.
“중앙로에 마차가 너무 많이 다니는 것 같소. 거의 왕도와 다름이 없소.”
“전하께서 왕복 8차선으로 만들라는 어명을 내리셔서 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선견지명인 것 같습니다.”
“만약 모자라다면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오.”
“아닙니다. 토요일 오전 시간이 마차가 가장 많이 다닐 때입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양 옆에 우회로가 있으며 충분히 넓습니다.”
왕복 8차로 중간에 텅 비어 있는 차로가 하나 있었다. 중앙 차로는 소방마차와 의료마차 등 긴급 마차만 다니기로 돼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마차가 자동차로 대체될 때에 대비해서 차로는 충분히 넓었다.
“가로수가 아직 덜 자랐구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참! 우유 배달을 할 때 시간이 걸리면 신선도가 떨어지오. 나중에 젖소가 충분히 많아지면 우유배달 마차도 중앙 차로로 다니게 하시오.”
“상업용인 우유 마차가 중앙 차로로 달린다는 말씀이십니까?”
“우유는 아기들과 아이들이 먹을 것이오. 최대한 신선하게 유지해야지요.”
“예, 전하. 백성들의 상업행위라도 아이들의 건강과 관련되면 특별한 대우를 해주겠습니다.”
인구 부족에 시달리는 고산국에서는 정책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에 항상 적극적이었다. 필수적인 예방주사는 대부분 개발해서 접종했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여기에 우유배달 마차에 특혜를 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5층 건물인 백화점에 도착해 점장의 안내를 받아 층마다 구경했다. 고산국 영역의 모든 대규모 유통업체는 혜진이 운영하고 다른 업체들이 배우며 따라오는 형국이었다. 이민호도 백화점 설계와 매장 배치 문제에서 혜진에게 도움을 주었다.
예전에 비해 상품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졌다. 여성 의류와 남성 의류가 각기 한 층을 차지했고, 견직물과 모직물, 면직물 등 매장별로 특색이 따로 있었다. 보석과 장신구, 고산국에서만 사용 가능한 전기 제품, 각종 식품도 진열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손님들이 백화점과 주변 상가에서 쇼핑을 즐겼다.
“점장! 저 승강기는 뭐요? 아이들이 위험할 것 같소.”
“승강기를 처음 타보는 아이들이 신기해하기에 아예 승강기 하나를 애들에게 놀이용으로 내줬습니다. 직원을 배치하고 탑승 인원을 제한해서 안전 문제는 없습니다.”
“아주 잘했소.”
빨간 정복을 입은 승강기 관리원이 아이들을 잘 챙겨주고 있었다. 만원이 되자 타지 못한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철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위로 쭉 올라가자 승강기를 탄 애들은 물론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까지 환호성을 질렀다.
새강릉에서도 12층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가는 승강기들 중 하나를 원주민 전용으로 내어줬다. 건물이 높고 승강기 바깥 면이 유리로 되어 승강기가 오르내릴 때 탑승자가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설계됐다.
거기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원주민 어른들이 승강기를 타면서 짜릿한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새강릉 시청이 원주민 어른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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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새강릉 들렀다가 왕도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