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18 64. 오대호 =========================================================================
고산국 최초의 호반도시 이리는 이 시대 도시답지 않게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건설된 계획 도시였다. 중앙로 상가와 관청가, 그리고 학교와 도심 주변 연립주택들은 꽤나 깔끔하게 건설됐다.
도심 바깥의 단독주택들은 마당이 충분히 넓고 새로 지어 깨끗했다. 제철소를 도시에서 약간 떨어뜨려 놓아 매연이 벽을 새까맣게 만들 일도 없었다.
국왕 행렬이 도착한 곳은 시 외곽에 위치한 탐사대 군영이었다. 탐사대는 일정한 곳에 고정된 군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내륙으로 옮겨갔다. 이곳 이리 시에 장장 여섯 달이나 머무른 것은 오하이오 강의 수계가 워낙 복잡해서 탐사에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었다.
“충~ 성!”
현대적인 철근 콘크리트 막사와 연병장을 갖춘 탐사대 숙영지의 정문을 통과하면서 이민호는 뭔가 잘못 본 것 같아 눈을 비볐다. 정문에서 창과 화살로 무장한 원주민 경비대가 바짝 긴장한 채로 국왕 행렬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몸값이 비싼 탐사대원들을 경비 임무에 투입하는 것은 낭비라서 민간인들을 경비로 고용하라고 했더니 탐사대장이 원주민들을 고용한 모양이었다. 지역 밀착형 고용 창출이라고 칭찬해줄까 말까 망설이게 됐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대령은 전에 태평양 탐사전단 소속이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전하! 전단장께서 몸이 튼튼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뽑아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공부할 게 워낙 많아서 머리 좋은 놈들을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태평양 탐사전단장에게 북미 대륙 탐사대를 구성하라고 했더니 체력 위주로 선발한 것 같았다. 그 전에 북미 서해안 지역을 탐사한 경험이 있는 대원들도 대부분 대륙 탐사대로 전출했다.
그때 북서부 서해안에서 말을 탄 원주민들과 교전 중에 전사자가 몇 명 발생하기도 했다. 언젠가 복수를 하려고 교전지역을 특별히 표시해놓았고 특유의 무기나 장식도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쓸 만한 탐사대원이 부족한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런데 튼튼한 놈을 교육시키는 게 빠를까, 똑똑한 놈을 훈련시키는 게 빠를까?”
탐사대원들은 육체적으로 이미 완성된 군인이나 극소수 민간인이 지원하므로 체력 훈련이나 총기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체력이 부족하다면 전담 교관이 따로 훈련시켰다.
대신에 탐사대원들은 천문학이나 지리학, 광물학, 식물학, 원주민 언어 등을 교육받는 시간이 많았다. 독도법과 지도제작법, 의학과 약학은 대원들에게 필수적인 과목이었다. 그러나 기본은 체력이었다.
“예. 튼튼한 놈을 교육시키는 게 낫겠습니다.”
그 동안 불만이 쌓였던 탐사대장의 의구심을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훌륭한 탐사대원이 되려면 튼튼하면서도 똑똑한 군인이 게다가 모험심까지 가져야 했다.
현실적으로 이런 인재를 구하기 어려웠다. 부족한 것이 체력이든 지식이든 주입식으로 교육, 훈련시켜 일정한 수준으로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 지상군에서 최정예를 다투는 부대가 특전단과 북미 탐사대, 그리고 호위대였다. 물론 부대 전투력은 장갑차 대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제가 부대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전하!”
“대부분 자리를 비웠군.”
탐사대원들은 대부분이 작전 중이었다. 본부 상황판 지도에 6개 탐사대가 오하이오 강 주변의 수로를 탐색 중이라는 표시가 돼 있었다.
탐사대도 특전단처럼 1개 중대 인원이 12명에 불과하고 모두 장교와 부사관들로 구성됐다. 군영에 남은 1개 중대 12명은 훈련, 다른 1개 중대는 교육 중이었다.
“현재 수로와 지상으로 오하이오 강과 지류들에 대한 탐사를 진행 중입니다. 오하이오 강 본류를 탐사하는 중대가 원주민들이 말한 미시시피 강에 지금쯤 도착했을 것 같습니다.”
“기대가 되는군. 미시시피 강이 맞을 거야.”
“미시시피 강 본류가 맞는다면 합류점에서 하류를 향해 탐사를 집중하겠습니다. 먼저 멕시코 만의 새진주에 연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대령. 하류 쪽으로는 한두 중대만 보내고 상류로 탐사를 집중하게. 미시시피 강 상류에도 큰 지류가 많을 거야.”
탐사대에서는 북미 대륙의 내륙 부분이 미완성인 지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도 중앙부 공백을 다 채워야 비로소 북미 대륙 전체가 고산국 영토가 됐다고 할 수 있었다.
현재 고산국의 조건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 탐사를 마치더라도 어차피 개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구가 차츰 늘어난 후에 미시시피 강 유역을 중심으로 천천히 도시나 농경지를 개발해도 늦지 않았다.
“미시시피 강에는 지류가 얼마나 많을지 걱정됩니다. 그래도 설마 본류보다 긴 지류는 없겠지요.”
탐사대장의 말에 이민호가 속으로 많이 웃었다. 본류인 미시시피 강보다 긴 지류인 미주리 강이 탐사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정확한 길이를 몰랐지만 미시시피 강은 3,767km, 지류인 미주리 강은 4,130km였다.
“인원이 부족하면 보충하게. 요즘 지원자가 많다고 들었는데, 맞나?”
“지원자가 많더라도 워낙 위험한 일이라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체력이 좋아야 하고 전투 경험도 있어야 해서 중대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원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입니다.”
이 나이대가 인생에서 절정기였다. 체력은 20대 초반이 더 좋고 경험은 나이가 들수록 쌓이겠지만 탐사대는 이 정도 나이대가 가장 적절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문제가 있더라도 20대 초반이나 19세라도 소수를 받아들이게. 그들이 나중에 탐사대의 주축이 되도록 키워야 하지 않겠나?”
“길게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세대에서 탐사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 오만일세.”
“미시시피 강 유역이 그 정도로 넓습니까? 알겠습니다. 장기적으로 탐사대를 운용하겠습니다.”
탐사대장과 협의해서 탐사대 인원을 대폭 확충하기로 했다. 소수 정예를 추구하기에는 조사할 지역이 너무 넓은 탓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와 달리 고산국의 탐사대가 좀 더 안전하기도 했다.
장갑차와 기병 중대 행렬은 이리 시에서 벗어난 다음 호숫가를 달렸다.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와 부드러운 바람결을 느끼며 한참을 질주했다. 헤드비히 공주가 이민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폐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라요.”
“공주, 보시오! 이 넓은 땅이 다 내 것이라오. 언덕 하나 없는 평평한 땅이오. 지평선을 넘으면 또 다른 지평선이 펼쳐져 있소.”
이민호는 부동산 졸부가 된 기분이었다. 배추밭이 빌딩숲으로 변해 땅값이 폭등한 졸부는 별것 아니었다. 이민호는 이 광활한 평원 전체를 옥토로 개간해 세금을 받을 꿈을 꾸었다.
기관총 사수석 밑에서 네덜란드 화가 마하레트가 소음 속에서도 간신히 통역을 해줬다.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랴 통역해주랴 화가는 바빴다.
“폐하! 저 커다랗고 둥근 식물은 뭔가요? 저렇게 큰데 설마 호박은 아니겠지요?”
“저것도 호박이오. 부드럽고 순한 맛이오.”
평원 곳곳에 드문드문 원주민들이 재배하는 호박과 콩, 옥수수 밭이 널려 있었다. 세 자매라 불리는 세 가지 작물은 원주민들이 전통적으로 재배하는 농작물이지만 조만간 쌀과 밀가루 맛에 길들여지면 재배 면적이 확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같은 호박과 콩이라도 고산국이나 유럽에서 들여온 품종을 심으면 수확량이 훨씬 많았다. 원주민들도 당연히 새 품종을 파종하게 됐다. 다만 옥수수는 북미에서 개량한 이후 아직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지 못한 단계라서 품종의 다양성이 북미에서 더 높았다.
“폐하! 저를 호박 같다고 해주세요.”
“그, 그렇게는 못하겠소.”
“어머! 유럽에서는 연인에게 호박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은 칭찬이에요.”
“공주는 호박처럼 아름답소.”
“호박이 아름다운 건 아니에요. 호박의 넉넉한 품성을 뜻하는 거죠.”
좁은 기관총 사수석에서 왼쪽에 헤드비히 공주, 오른쪽에 민영을 두고 번갈아 입을 맞췄다. 그런데 국왕 전용 장갑차 단차장이 분위기를 깼다.
“전하! 전방에 들소 떼입니다!”
이민호가 슬쩍 고개를 들어 들소 떼를 확인했다. 수많은 들소들이 달리는 바람에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들소들도 먹고 살라고 하지. 피해서 달리게.”
“들소 떼가 원주민 마을을 향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들소 떼의 접근을 발견한 포타와토미 부족의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 나왔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마을 주변에 놓았다. 들소 떼가 몰려올 때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소가 굉장히 커요. 그리고 많아요.”
“불과 연기만으로는 저 들소 떼를 못 막겠어요!”
남쪽으로 향해야 할 시기인데 길을 잘못 들어 이리 호수 쪽으로 이동한 들소 떼였다. 길 잃은 들소 떼는 사냥하기 쉬워서 이 지역 원주민들이 반기지만 이 들소 떼는 규모가 너무 커서 방향 전환도 쉽게 하지 못했다. 대충 세어도 최소 5천 마리는 넘어 보였다.
이곳에서 서쪽의 평원 원주민들은 일 년에 한 번, 일명 버팔로 점프라는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들소를 사냥했다. 발 빠른 원주민 청년들이 며칠에 걸쳐 들소들을 추격해 깔때기 모양의 지형으로 몰아넣은 다음 창과 화살로 하나씩 죽이거나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사냥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들소의 주요 서식지에서 떨어져서 그런 방법은 알지 못했고, 들소에 대한 대비 자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버려두면 마을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 음머~
들소 떼는 원주민들이 경작하는 파릇파릇한 밀밭으로 뛰어들었다. 몇몇 흥분한 들소들이 도망가는 여자들을 뒤쫓아 마을로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마을로 전진!”
“폐하! 들소가 너무 많아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국왕의 의무요.”
이민호의 말에 헤드비히 공주가 감동한 듯했다. 그러나 사실은 장갑차의 맷집을 믿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고산국 장갑차의 무게는 현대 장갑차들에 비해 훨씬 가볍다 해도 8톤이나 나갔다. 위압적으로 커 보이는 들소 몸무게의 최소 열 배 이상이었다.
“마을 앞에 쐐기 진을 형성하라!”
흔히 알려진 쐐기 진은 삼각형 모서리를 적에게 앞세운 진형이었다. 보통 적의 대형으로 돌격할 때 사용하지만 이민호는 마을을 들소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어에 활용했다.
선두에 장갑차 두 대가 10미터 간격으로 서고, 나머지 차량들이 폭을 점차 넓히며 여섯 대가 쐐기 진형을 갖췄다. 그리고 기병들이 장갑차 뒤에 서서 간격을 메웠다.
“진동이 장난 아니군.”
달려오는 들소들 때문에 땅이 울리면서 장갑차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밤에 시커먼 파도가 바닷가에 밀려오는 것처럼 들소 떼가 끝없이 몰려왔다.
이민호가 통신기 수화기를 잡고 있는 사이 민영이 기관총 발사 준비를 마쳤다. 그 사이 헤드비히 공주가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왕가의 여인답게 전투 중에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이민호가 명령을 내렸다.
“사격준비, 쏴!”
- 뚜다다다닷! 따다다다닷!
민영이 가장 먼저 기관총을 발사했다. 사수석 밖으로 몸을 내밀고 기관총을 쏘는 민영과 몸을 밀착한 채 이민호가 보병총을 연사했다. 다른 장갑차 사수석에서도 기관총을 쏘았고, 보병탑승 공간에서 기계화 보병들이, 그리고 장갑차 사이에서 말에 탄 기병들이 신형 보병총을 연속 발사했다.
- 음머어~
들소들이 쐐기 진 앞에서 짚단처럼 쓰러졌다. 아무리 몸이 크더라도 기관총의 관통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민호는 보병총으로 심장이 있을 만한 들소의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들소가 고개를 완전히 숙이고 돌진해오자 털로 가려진 머리를 향해 발사했다.
머리를 총탄에 맞은 들소는 움찔했을 뿐 계속해서 돌격해왔다. 어쩔 수 없이 등에 불룩 솟은 혹 밑 부분을 향해 다시 발사했다. 혹이 지방으로 이루어졌다면 타격이 거의 없을 것이고, 뼈라면 총알이 튕겨 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들소가 픽 고꾸라졌다.
“보병들은 혹 밑을 노리고 쏘도록!”
기관총 연사음 사이로 이민호가 수화기에 대고 악을 썼다. 장갑차에 탄 기계화 보병과 기병들에게 전달되는 시간 동안 지체가 있었지만, 잠시 후 들소들이 한꺼번에 줄줄이 쓰러졌다.
장갑차 대열 앞 일정한 거리에 설정된 선에서 들소들이 계속해서 쓰러져 어느덧 산더미처럼 쌓였다. 대부분이 기관총에 맞고 쓰러진 들소들이었다.
나머지 들소들은 시체가 쌓인 곳을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마을로 들어간 들소는 세 마리밖에 없었고, 용감한 원주민들이 그 들소들을 화살과 창에 이어 칼로 난도질했다.
- 쾅!
“어이쿠!”
국왕 전용 장갑차에 전력으로 들이받은 들소가 한 마리 있었다. 밀집한 대열에서 이탈한 다음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 들소는 그 일을 성공시켰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이민호가 들소의 등골을 향해 서너 발 연속 발사해 그 들소를 쓰러뜨렸다.
들소 떼는 빠른 속도로 왔던 것처럼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원주민 마을 앞에 2천여 마리가 죽거나 자빠진 채 다리를 바동거리고 있었다. 송아지가 총에 맞아 죽은 어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불쌍해요. 맑은 눈망울을 보니 가슴이 아파요.”
“송아지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데?”
우두머리 들소가 무리를 잘못 인도해 오는 바람에 들소들이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들소 떼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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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방문 기념으로 들소를 사냥하더라도 방어전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