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12화 (561/1,000)

00612  63. 페로 제도와 아이슬란드  =========================================================================

“전하! 해안에서 1인승 카약 세 척이 나타났습니다. 원주민입니다!”

“그래? 이누이트 구경 좀 하게 국왕좌승함으로 유도하게!”

카약은 배에 뚜껑을 덮고 사람이 탄 자리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옷자락이나 모피로 틈을 가린 배였다. 가까이 보니 북미 원주민들보다 더 조선인을 닮아서 친근감마저 들었다.

이민호는 그린란드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민들이 그린란드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한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이누이트와 말이 통하나?”

“전혀 안 통합니다.”

통역 여러 명이 나서서 원주민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서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북미 원주민들 중에서 가끔 스페인어나 영어를 배운 자들이 있었으나 그린란드 이누이트들은 처음 듣는 소리로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뭐, 상관없지. 원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여줘.”

대화가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역을 할 수 있었고, 고산국 함대는 그런 경험이 풍부했다. 어용상인들이 원주민들에게 필요한 곡물, 소금, 철제 칼 여러 종류, 바늘과 실 등을 보여줬다. 그러나 원주민 대표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뭐야? 필요 없으니 가라고?”

“전하. 우리는 그린란드 독립군의 함대와 교전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농담이야, 함장.”

이누이트는 영토가 침략 당했다고 판단할 경우 유럽인 침략자들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함선을 상대로 용감하게 나선 원주민들에게 이민호도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고산국이 당분간 그린란드를 개척하지 못하는 동안 이들이 계속 지켜주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이민호가 지시를 내렸다.

“그 동안 유럽 어민들과 무역을 하면서 피해를 많이 봤을 거야. 밀가루와 소금, 칼 종류를 넘겨주고 우리는 바로 물러서자. 고래잡이용 작살은, 음. 줘버려.”

그린란드에서 이누이트들은 고래나 바다표범 등 해양포유류를 주로 사냥하고 살았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카약을 타고 고래를 잡아봤자 몇 마리 안 되고, 또한 고래는 원주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사냥감이었다. 그래서 고래잡이용 작살도 공짜로 넘겨주라고 했다.

이누이트들이 배가 전복되기 직전까지 선물을 가득 받고 얼떨떨한 채 가만히 있었다. 함대가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사관! 고산국 원정 함대가 그린란드 독립군 함대에게 패해서 물러난 것으로 기록하면 어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쓰든지 사관이 판단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지 말아주십시오.”

“방금 내 말은 어떻게 평가하나?”

“말이 안 됩니다. 전하께서 호전적인 야만인들을 교화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원래는 사관이 어떻게 쓰는지 전하께 알려드리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국왕에게 기사 초록의 내용을 알려주는 사관이 있을 리는 없지만, 사관 개인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었다. 사관도 사람이라서 편견에 휘둘릴 수 있었고, 그래서 평상시에는 여러 부서에서 파견된 사관 서너 명이 각기 달리 기록하는 것은 조선과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이미 고산국 백성들이다. 야만인이 아니지.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준 거야.”

“어지가 그렇다고 기록하겠습니다, 전하.”

이민호는 아직 젊었다. 그러나 사관들 때문에 인간에게 수명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새로이 인식하게 됐다. 이민호 사후에 대한 대비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수단은 교육이었고, 그 다음은 언론이었다.

고산국 본토에서 신문과 잡지 수십 종류가 자유롭게 발행되고 있었다. 유럽의 철학을 받아들인 신 지식층이 계몽주의의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조선 양반의 이익을 대변해 국왕을 비판하는 등 성향에 따라 논조는 각양각색이었다. 북미에서는 상대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고 경제 위주로 신문이 발간됐다.

이민호는 어느 종합일간지의 객원필진이기도 했다. 당연히 필명을 사용했고, 원정함대에 속한 해군 장교인 척했다. 기고를 할 때마다 며칠 후에 같은 신문에 반박문이 마구 실렸다. 국왕전하에 대한 불충이라느니 무식하다느니 하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있지도 않은 국왕모독죄로 걸어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신문이나 잡지의 논조에 대해 억압을 가할 생각은 없었다. 대학교마다 외국인 교수 혹은 유학생들이 저마다 떠들어대고 유럽에서 온갖 서책이 번역돼 대량 인쇄되는 마당에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릴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고산국이 백화제방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명실 공히 왕국이기 때문에 공화국으로 체제를 바꾸자는 목소리는 극도로 미약했다.

“마하레트.”

“예, 폐하.”

마하레트는 키가 큰 네덜란드 여류 화가 이름이었다. 흔한 마가렛의 네덜란드 발음이었다. 여자답게 화가들 중에서 조선말을 가장 잘 구사했고, 독일어 통역장교와 함께 덴마크 공주와 시녀들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조선말로는 전하라고 부르는 게 좋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에라스무스의 저작은 잘 번역되고 있나?”

“예, 전하. 조선말-스페인어 사전을 참고하고 다른 분들께 물어가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하레트는 16세기 전반 에라스무스가 지은 <우신예찬>과 <기독교 기사의 안내서>를 번역하고 있었다. 라틴어로 저술된 <우신예찬>은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조선말로 번역한 책이 이미 고산국에서 출간됐지만, 이번에는 라틴어에서 바로 조선말로 번역한 버전이라 기대가 컸다.

“라틴어까지 구사하다니, 네덜란드 화가는 정말 대단한 지식층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화가들이 공부하지 않나요? 프랑스나 이탈리아 화가들은 공부를 많이 해요.”

“고산국 화가들은 술 마실 시간이 줄어든다고 공부 시간을 아까워 해.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떠나 자연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라는 말 있잖아?”

“예. 에라스무스가 한 말이잖아요?”

“그래서 학문은 필요 없다는 거야.”

“핑계죠. 많이 알수록 진실에 다가갈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림은 문학과 같아서, 화가가 그림을 통해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면 더 많이 알아야 해요.”

고북의 왕립대학교 미술대학 교과과정 중에 철학과 문학, 역사, 수학과 기하학 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런 과목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생은 없었고, 예술가는 인생을 알아야 한다면서 술만 들입다 퍼부었다. 반면에 네덜란드 화가들은 종종 정치가나 외교관으로 나설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다.

에라스무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폈지만 루터와 서로 비판하는 사이였다.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운명론에 가까운 루터의 해석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뉴펀들랜드 섬에 도착한 함대는 아발론 반도의 플라센티아에 입항했다. 항구 입구 언덕에 새로 지은 등대 겸 요새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를 향해 막 출항하던 탐사선 두 척이 허둥지둥 함대를 쫓아 항구로 돌아왔다.

항구에 들어가 보니 지난해에 비해 에스파냐 포경선들과 어민들의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 포경선이 군함으로 징발되고 어부들이 해군으로 입대한 탓이었다. 대신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선들 비율이 늘어났다.

그 외에도 일 년 사이에 플라센티아 항구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두 선착장이 정비되고 세관과 어업지도국 분국을 비롯해 시멘트 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들이 여러 채 들어섰다. 그리고 고산국 새원산에서 파견한 관리와 병사들이 항구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어부들 숙소와 목욕탕, 술집도 새로 지었다. 작년까지 해변에 있던 모피 건조장은 양지 바른 언덕 쪽으로 옮겼다.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고산국에서 독점하는 대신 다른 상품과 더불어 외국 어민들에게 비교적 싸게 판매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자넨 새원산 시청에서 근무하던 관리 아닌가? 혹시 부정이라도 저질러 이곳으로 좌천됐나?”

“부정을 저질렀다면 탄광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하. 시청 관리들이 일 년씩 교대로 오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고산국 병사들이 이열로 늘어선 뒤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민들이 국왕 행렬을 구경했다. 새원산이나 새강릉까지 가서 어업허가증을 받은 외국 어부들은 올해 봄부터 이곳에서 허가증을 갱신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새원산 시의 뉴펀들랜드 동사무소로군.”

아담한 2층 건물은 추위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총안구 비슷한 작은 창문들이 줄줄이 나 있었다. 유사시에 1층을 폐쇄하고 2층과 옥상에서 방어를 하는 방식의 개척지에 흔한 건물이었다.

“우리 어민들은 언덕 너머 마을에서 삽니다. 외국인들과 아예 분리시켰습니다.”

“그게 좋겠지.”

관리가 말로는 우리 어민이라 했지만 대부분 유럽 이민자 출신 어민들이었다. 어선으로 사용하는 범선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대포 12문쯤 달린 것은 외국 어선들과 비슷했다.

다만 배를 티크 목으로 건조하고 총기가 화승총이 아닌 단발총인 것이 달랐다. 이 시대 어부들은 항상 해적에 대비해야 했고, 기회가 생기면 해적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중위.”

“중위 노! 성! 필!”

“어이쿠!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실내에서는 조용히 말하도록.”

“예!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뉴펀들랜드 플라센티아에 배치된 전력은 어업지도선 한 척과 항구 경비 병력으로 파병된 해병 1개 소대에 불과했다. 대서양 탐사전단 소속 탐사선들이 하는 일 없이 가끔 플라센티아에 입항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탐사선들은 외국 어선들보다 확실히 크고 무장을 제대로 갖춰서 외국 어부들이 감히 해적질을 할 엄두를 못 냈다.

“동장! 사고는 없나?”

“예. 주변 해역에서 어획고가 높고 항구의 편의시설을 이용하게 돼서 외국 어민들도 만족하는 편입니다. 다만 술집에서 자주 싸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술 먹고 싸우는 거야 일상사지.”

그러나 술 취해서 흔히 일어나는 싸움과는 차원이 달라서 일 년에 새로운 무덤 40개 정도가 플라센티아 공동묘지에 들어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이유는 항구에 내리는 어부들의 다양한 국적, 특히 전쟁 중인 나라가 많기 때문이었다.

매년 300척에 달하던 에스파냐 포경선은 그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그 대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선들이 어업허가서를 받으려고 허가증 발급 기한 막판까지 몰려와 항구가 붐비고 있었다.

“현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어선 400여 척이 등록했습니다. 선수에 배 이름과 등록번호를 크게 쓰도록 지시했고, 어민들이 잘 따르는 편입니다.”

“앞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어선은 따로 등록시킬 필요 없네. 이번에 영토 할양 조약을 체결할 때 조업권 문제를 확실히 했으니까. 덴마크 왕실에서 매년 200척으로 제한해서 어선을 보낸다더군. 덴마크 왕실의 면허장을 확인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아일랜드 어선들이 대구와 청어 조업에 새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작은 배로 용케도 여기까지 왔더군요. 현재 20척에 허가를 내줬습니다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지를 내려 주십시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뉴펀들랜드나 그린란드가 예전 영토라는 이유로 조업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어부들은 기근이 닥치면서 바다로 내몰린 전직 농민일 경우가 많았다. 작은 배로 대서양의 풍랑을 헤치고 온 아일랜드인들을 매몰차게 몰아낼 수는 없었다.

“아일랜드는 기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라는 조건을 달아서 추가로 조업 허가증을 내주게. 다들 찢어지게 가난하니까 그물 같은 어구도 싸게 팔도록 해.”

“어명을 받드옵니다. 하온데 미 허가 어선이 나포될 때 가끔 반란을 일으키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병력이 적어서 문제입니다.”

다른 나라 어부들은 어업 제한 조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유독 잉글랜드 어부들에게서 저항이 거셌다. 뉴펀들랜드와 그린란드 등의 대서양 북부 연안에 조업이 제한되기 전에 급히 조업에 새로 참가한 어선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자들은 현장에서 즉시 사살해. 그리고 덴마크와 군사동맹까지 체결했으니 이곳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덴마크와 노르웨이 어민들을 동원해서 진압하도록 하게.”

“유럽에 드디어 교두보를 마련하셨군요. 앞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어부들에게 더 잘 대해주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어업지도선 한 척만으로도 외국 어선들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수적 열세가 심각했다. 이럴 때 동맹국 어부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당연히 활용해야 했다. 에스파냐 어민들도 포경업이 끝날 때까지 고산국 관리와 병사들을 돕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새원산에서 제철소 확인하고 새강릉에 들렀다가 왕도로 귀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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