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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06화 (555/1,000)

00606  62. 덴마크와 발트 해  =========================================================================

다음 날 오전에 결국 천만 라이히스탈러가 모두 들어왔다. 새벽부터 국왕좌승함에 찾아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금괴와 은괴 수송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선제후는 이민호에게 게오르그 프리드리히를 용서해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한 다음 돌아갔다.

그 사이 어용상인들이 쉬테틴 모피시장에 모피를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수량이 적어 단기적이겠지만 질 낮은 러시아 모피 위주인 쉬테틴에서 모피 가격을 약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러시아산 검은담비는 무두질에 꽤나 문제가 있었다.

국왕좌승함의 선저 창고에 배상금과 상품 판매대금으로 받은 황금이 잔뜩 쌓여서 헤드비히 공주와 함께 들어가 구경했다. 처음에 받았을 때 빨간 벽돌처럼 보였던 큼직한 벽돌 금괴도 화학적인 방법으로 간단히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폐하께서는 금은보화를 고산국 황궁 지하 창고에 가득 보관해두셨다면서요?”

“호위들이 그런 말을 했소? 곧 쓰게 될 것이오.”

금과 은, 그리고 보석을 창고에 잔뜩 쌓아놓고 구경하면서 흐뭇한 미소만 지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금과 은은 조만간 대량으로 사용할 일이 있었다. 현재 왕궁 지하 창고에 쌓인 재고보다 앞으로 광산에서 캘 금과 은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스웨덴 광부 이민자들 덕택에 이번에 호주 칼굴리 금광 개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북미 이곳저곳에서 금광과 은광이 연속 발견됐다. 스웨덴 광부들은 탄광과 철광뿐만 아니라 금광과 은광에서도 일하게 될 것이다.

“폐하! 그 많은 황금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 동안 금과 은이 부족해 화폐를 단위별로 충분히 주조하지 못했소. 금화와 은화를 더 만들려고 하오.”

헤드비히 공주는 왕실 여자답게 선실 창고에 가득 쌓인 금괴에 넋이 빠지지 않았다. 아무리 재산에 욕심이 없는 호위들이라도 잠시 정신을 놓고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봤던 이민호에게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고산국 금화는 지금도 유럽에서 유통될 정도로 많잖아요? 상인들이 다른 금화나 은화의 가치를 계산할 때 고산국 금화를 기준으로 삼고 있어요.”

“고산국에 재산은 많은데 유통되는 화폐가 적어서 아직 시행하지 못하는 정책이 여럿 있소. 물론 유럽에서 고산국 금화를 수입해 간 탓도 있소.”

미국도 캘리코 은광을 개발하고 나서야 연방조폐국이 은화를 대량 주조할 수 있었다. 화폐금융이 경제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화폐의 수량이 적으면 상공업을 그 국가경제의 능력만큼 활성화시키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현재 고산국이 보유한 실물 은과 금이 부족한 탓에 귀금속 주화만으로 급성장하는 경제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은 광산에서 캐고 유럽에서 금과 은을 흡수하고 있지만 조만간 인플레이션이 생기더라도 종이돈으로 이동해야 했다.

현재 고산국 은행은 고객의 예금에 비해 귀금속 주화가 많이 부족했다. 지급준비율이 30퍼센트로 책정돼 고객들이 일시에 은화와 금화를 인출하는 뱅크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당장 지급불능에 빠질 수 있었다.

백성들이 남는 돈을 예금을 해준 덕택에 고산국은 화폐 규모보다 훨씬 큰 경제규모를 유지하고,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은행을 통해 화폐 유통량을 늘리는 것은 일종의 사기였지만, 앞으로는 종이돈을 발행함으로써 더 큰 사기를 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온 고산국 금화와 은화의 양 이상으로 금괴와 은괴가 고산국으로 흘러들어 갔겠죠?”

“물론이오. 궁금해서 고산국 왕궁에 가보고 싶소?”

고산국 금화와 은화는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완전한 원형에 정교한 디자인 때문에 위조하기도 어렵고 품위가 극히 일정했다. 신용이 높은 화폐가 적은 유럽에서 고산국 금화는 실제 가치보다 약간 높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고산국 상대로 무역적자가 계속됐기에 금화와 은화를 대량으로 바꿔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민호도 귀금속 주화를 쓰는 동안에는 고산국 화폐가 기축통화가 되길 원치 않았다. 기축통화가 됨으로써 얻을 이익이 지금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다른 분들 뵙기가 무서워요.”

“왕실 사람들이 잘해줄 것이오.”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영을 비롯한 왕실 여자들, 특히 비올레타가 공주를 잘 대해줄 것으로 믿었다. 헤드비히 공주가 후궁들의 일 부담을 엄청나게 줄여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왕실을 위한다거나, 폐하 개인을 위해 금을 쓰지는 않으세요?”

“그럴 게 뭐 있겠소? 아! 이곳저곳 별궁이나 좀 더 지어야겠소. 여러 종교의 집회장소를 더 웅장하게 지어서 신도들이 경건한 마음을 가지면 더 좋겠소.”

“폐하는 국왕으로서 위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 일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면서 과다한 배상금을 강제로 받아내셨어요. 다른 목적이 있었죠?”

“목적 말이오? 나는 돈이 좋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폐하의 세계 전략을 저하고 공유해야 하니 실토해보세요.”

프로이센 섭정 문제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배상금을 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간 건 헤드비히 공주였다. 유럽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공주는 이민호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 행동한 것이 틀림없었다.

헤드비히 공주는 은근히 능구렁이 같은 네덜란드의 이사벨 공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유럽 공주들이 교육은 잘 받는 것 같았다. 물론 어느 왕실이나 다 그런 건 아니고, 상업을 멸시해 그 분야를 전혀 안 가르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별 건 아니고, 조만간 커져서 주변 국가를 침략할 만한 나라나 영지에 빚을 지워서 미래를 제한하려 했소. 빚에 시달리다 보면 외부로 뻗어나갈 생각 자체를 못한다오.”

“일부러 시간을 적게 줘서 유대인에게 급히 빚을 지게 만드셨지요?”

정답을 맞춘 헤드비히 공주의 뺨에 입을 맞췄다. 물론 헤드비히 공주도 그 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공주는 그 도시가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유만으로 1,500만 라이히스탈러를 단기간에 현물 지급할 수 있다고 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시 인구의 10퍼센트나 되기 때문에 이틀 만에 지급이 가능했다. 이들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가 재위 기간 내내 이교도들을 쫓아낼 때 프로이센으로 집단 이주한 유대인들이었다. 16세기 중반부터 프로이센과 네덜란드를 급성장시킨 자들은 막대한 자금과 발전된 금융기법, 그리고 각종 수공업 기술을 가지고 이주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렇소. 그래야 액면가보다 실제 변제 금액이 커지오. 이자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기간이 늘어날수록 계속 불어나는 성질이 있다오. 몇 십 년 동안 빚만 갚다 보면 변제를 다 한 다음에도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것이오.”

물론 고산국 본토에 돌아갈 시간이 다 됐기도 했다. 러시아는 들러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변경백의 처분을 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거군요.”

“맞소. 그런 작은 영지의 미래를 제한하려고 내륙 깊숙이 원정을 갈 이유가 없소. 물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손을 봐줘야겠지요.”

프로이센 섭정의 영지가 바다에서 비교적 가까운 베를린 근방이라고 착각했기에 칠 생각을 했지, 그렇게 내륙 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공격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럽에 오기 전에 사전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엉뚱한 실수가 나왔다. 큰 실수를 하기 전에 헤드비히 공주가 잘 챙겨주었다.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가 온순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가끔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도 했다. 이민호는 독일 전체를 상대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얻을 것도 없는데 귀찮았다.

“하지만 국왕의 위신은 국민의 자부심과 직결돼요. 국민을 위해서라도 폐하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고산국 백성들은 외국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신경 쓸 필요 없소. 경기가 활성화되고 말고는 무역에 의존하는 비율이 큰 데도 유럽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오. 그리고 내 자존심이나 명예는 군사 행동을 위한 수단이나 핑계일 뿐이오.”

왕실의 공주와 실리적인 이민호 사이에는 생각하는 것에 괴리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는 공주도 잘 알았다.

“앞으로도 어제처럼 폐하는 화를 내세요. 제가 돈을 받는 역할을 맡을게요.”

“공주나 내 돈이 아니오.”

“물론이에요.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고산국 백성들의 재산이지요.”

이민호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후궁들이나 몇몇 군인, 기술자들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을 사랑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저 내 의무일 뿐이오.”

“승전 수당으로 황금 6, 7온스씩 주는 군주는 폐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거여요.”

“반드시 그런 건 아니오. 역사를 잘 아시는 왕비님께 여쭤보시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상대로 총알 한 방 안 쐈지만 이번에도 원정군 전원에게 승전 수당을 지급했다. 병사들은 유럽의 금화와 은화를 합쳐서 금 두 냥 정도를 받았다. 이틀 연속 승전 수당을 받게 된 병사들은 다들 어리벙벙했으나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틀 동안 금 다섯 냥을 받은 구르카 여단 병사들이 몹시 흔들렸다. 구르카 병사의 30개월치 급료를 한꺼번에 받는 바람에,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집단 탈영이나 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함대가 쉬테틴에서 출발하려는데 작은 범선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호위전대 순양함 4척이 그 범선을 에워싸고 해병들이 검색을 마친 다음 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250톤 정도의 네덜란드 플류트 선입니다, 전하. 보기보다 가볍습니다.”

“자주 봤는데도 가까이서 보니까 배가 참......”

배의 건조비는 기존 비슷한 규모 선박의 절반, 용적은 최대화, 속도는 빠른 배가 16세기부터 건조된 플류트 선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선원 20명만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어서 선원들 인건비가 적게 든다는 점이었다.

화물 운송비가 3분의 1로 줄어들어 바로 이것이 네덜란드가 유럽의 해운을 장악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상선 숫자 다수가 네덜란드 소속이 되었다.

“이상하게 생겼네. 아래에 비해 위가 너무 좁아.”

“왜 저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소. 선형을 저렇게 만들면 속도야 높아지겠지만 항행 성능에 여러 가지 악영향을 끼칠 것 같소. 갑판이 좁으면 해적들과 해전을 벌일 때도 불리할 것이오.”

“외레순 해협을 지날 때 통과세를 적게 내기 위해서여요. 주갑판 넓이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거든요. 오빠가 플류트 선 때문에 통과세 부과 규정을 바꾸려다 말았어요.”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지만 합리적이군요.”

공주가 볼을 부풀리며 알려줬다. 덴마크 국세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이 해협 통과세이므로 덴마크 왕실에서 플류트 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때 플류트 선에서 젊은 사람들이 외쳤다. 이민호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통역이 바로 대답해줬다.

혹시라도 저 배에 저격수가 있더라도 복장이 거의 비슷한 수병과 해병들 사이에 있는 고산국 국왕을 가려낼 방법은 없었다. 물론 고산국 병사들은 여자 호위들 사이에 이민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유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 거리면 머스킷의 유효 사거리 밖이었고, 방탄복이 아닌 맨몸에 맞더라도 관통하기 어려웠다. 물론 소수 유럽에 넘어갔다는 단발총이 신경 쓰이긴 했다.

“저희들은 고산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습니다아~ 신교도들이 섞여 있는데 칼뱅교나 루터교 아무 신자나 다 받아줍니까?”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없다.”

“인종은요? 유대인도 가능합니까? 유대인은 안 된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개인적인 이민에서 인종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

집시는 이민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개석상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벌써 유대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불분명해졌다. 원래 아랍인과 유사한 셈 족이라고 들었는데 이제는 셈 족도 아니고 유럽인에 더 가까웠다.

“이민 올 거야, 말 거야?”

“갑니다! 가고말고요.”

유대인이 섞인 독일인들이 단체로 이민하겠다고 해서 아예 배를 순양함 뒤에 매달았다. 이주 희망자들이 빠른 속도와 풍랑에 겁을 내면 수송선으로 옮겨줄 계획이었다.

“아인슈타인 조상이나 오면 좋겠다.”

“아인슈타인이 누구에요? 이름으로 봐서 귀족은 아니겠네요.”

“헉! 그저 독일의 철학자요.”

혼잣말을 했다가 헤드비히 공주가 묻자 깜짝 놀랐다. 옆에 항상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혹시 유명한 경구를 남겼나요?”

“에...... 진실과 지식의 심판자라고 가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신의 웃음소리에 파멸했다. 이 문장만 기억나오.”

“멋지군요.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해요.”

이민호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같은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공식은 공책에 기록해두었지만 살아생전에 활용할 가능성은 적었다. 적당한 시기에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고산국에 나타나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전 편에 대한 해답이 다 나왔습니다. 연속해서 읽으면 문제가 별로 없을 텐데 인터넷 연재하는 소설에서 괜히 궁금증과 짜증만 증폭시켰나보군요.

실제적인 발트 해 주변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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