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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02화 (551/1,000)

00602  62. 덴마크와 발트 해  =========================================================================

“주인님!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뭔가 사라지면 뭔가 새로 생기겠지?”

집무실에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이민호가 뜬금없이 물었다. 갑자기 민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변했다.

민영이 호위대장 직을 내려놓으면 다른 호위가 그 역할을 맡을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생태계나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프로이센이나 잉글랜드가 사라지더라도 그런 역할을 맡는 나라가 다시 생길 거라고.”

“물론 그렇겠지요. 그런 고민 때문에 프로이센을 치는 것을 망설이지 마세요. 지금 내버려두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거여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그 역할을 맡을 것으로 믿었다. 독일인은 민족국가를 세우기에 충분한 인구와 영토,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어서 통일되는 편이 나았다.

지금은 너무 잘게 나뉘어 있고 조만간 일어날 30년 전쟁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민족의식이 차차 각성할 시기였다. 독일 통일 후에 프랑스나 영국 정치가들이 독일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더라도 상관없었다.

독일이 통일되면 그 힘을 주체 못해 주변 약소국들을 침탈하고 큰 나라들에 전쟁을 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확장 전쟁이나 인종차별 정책에 동의한 독일 국민들이 그로 인한 책임을 지게 돼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의 합리성과 실용주의는 역사 발전 과정을 통해 차차 생길 것으로 기대했다. 이 시기에 프로이센이 없어진다 해서 독일 민족의 특성이 싹이 밟혀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식 사회민주주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 원칙에 의해 생긴 면이 있었다. 독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노동력 공급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 되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을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이룬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본가와 정치가가 주도한 면이 강했다. 그래서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 없었고, 의회 내에서 사회제도의 개선이 가능했다.

군국주의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생겼다가 나중에는 해악만 끼치고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사라질 것으로 믿었다. 사민주의든 군국주의든 이민호가 독일의 수백 년 후 미래까지 책임 질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 나한테는 민영이 아니면 호위대장이 필요 없어. 민영이 평생 호위대장 해라.”

“어머나! 나중에는 젊고 팔팔한 애들한테 시키세요. 꺄악!”

이민호가 민영의 몸을 안고 간지럼을 태웠다. 분위기가 요상해졌으나 민영이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가임기 아닌데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른 후궁들 못 듣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민영이 감동해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때 다른 후궁들에게 같은 말을 전달하라고 시키면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게 돼 있었다. 이민호가 민영의 얼굴을 잡아 당겨 입을 맞췄다.

“험! 험!”

오랜만에 민영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관이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망쳤다. 민영이 사관을 노려보는 중에 이민호가 한 마디 했다.

“사관! 밤이 늦었으니 근무를 끝내고 쉬어도 좋네.”

“전하께서 침전 밖으로 나오신 동안에는 항상 사관이 따라다니면서 국왕전하의 언행을 기록해야 합니다. 원정에 따라온 사관 세 명이 교대로 일하니까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알았다. 내가 들어가마.”

저런 꼬장꼬장한 사관들과는 다투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민영의 손을 잡고 침전으로 향했다. 민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역사 기록이란 막중한 책임을 지고 당장 승진 문제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심지어 목숨 걸고 의무를 다하는 자들을 핍박할 생각은 없었다. 경제적 이익에 따라 논조가 왔다 갔다 하거나 제목을 과장해서 기레기라 불리는 현대의 기자들을 사관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사관에게 수치였다.

앞으로 유럽에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사유화, 국가의 역할 등을 놓고 수백 년 동안 토론을 벌일 것이다. 때로는 폭동이나 내란,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학파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겠지만 고산국은 별로 상관없었다.

고산국은 독일에서 시작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량만 하는 민주사회주의에 가까웠다. 민주사회주의는 지향점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 큰 차이였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는 동안 정치체제의 분류는 무의미했다. 고산국에서 국가의 주권은 백성이 아니라 이민호라는 개인이 갖고 있었다. 나중에 후계자가 왕이 되더라도 이민호와 비슷한 힘을 갖게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다만 사후의 국가체제에 대한 준비를 이민호가 살아있는 동안 미리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한 기반은 충분히 갖춰 주겠지만 나중에 고산국이 어떻게 될지는 그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사상가들을 고산국 대학으로 초빙하고 저서도 다양하게 수입해서 번역했다. 세계 최초로 외국에서 출간한 책의 저자들에게 저작권료를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었다.

현재 고산국은 토지와 사회기반 시설, 치안과 국방, 의료와 복지 제도는 국가가 맡고 나머지는 국민도 아닌 백성들의 자유였다. 비록 이민호 개인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라도 고산국에서는 대부분 백성들이 충분히 만족한 생활을 영위해가는 상황에서 다른 의견이 나올 것이 별로 없었다.

농경지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조선 출신 농민이나 양반들의 토지 소유 욕구가 강했지만, 고산국 영역 내에서 토지는 무조건 국왕 소유였다. 왕토 사상이라는, <시경>에 등장하는 전통적이며 강력한 사상이 있어서 토지를 사유화하고 싶어 하는 세력들이 도전 자체를 못했다. 토지를 소유한 것만으로 직접 일하지 않으면서 향토사회를 지배할 기회가 자동적으로 생기는 양반이나 지주 계급이 생길 일이 없었다.

조선에서 토지를 독점한 양반들이 고산국에 이민 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고산국 농민보다 조선 양반 가문의 수입이 훨씬 적더라도, 그 밑에 더 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 아래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의 개인적 소유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토지소유자인 양반을 지배계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고산국에서 나라를 지배하는 일에 한몫 끼고 싶으면 관료로 진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토지 소유와 경제적 부를 기본적으로 누리면서 관료가 되어 정치적 특권마저 얻고 싶어 하는 양반들은 그 두 가지 특권을 금하는 고산국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호도 이 시기에는 지식인 계층인 양반들 중에서도 몰락 양반이나 특히 서얼들이 이민 오길 원했다.

다음 날 아침 함대가 단치히를 출발했다. 폴란드 후사르는 상품을 판매하고 텅텅 빈 수송선 열 척에 나눠 태웠다. 야전 헤트만이 수송선에 욕심을 내는 것 같았지만 강력한 순양함들이 옆에서 호위하는 한 선상반란을 통해 수송선을 빼앗을 기회도 없었다.

프로이센을 징벌하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고산국의 힘을 폴란드에 보여줄 기회였다. 폴란드 귀족, 농민, 2년 기한으로 고용한 타타르 등으로 구성된 후사르들이 폴란드 지배 영역 전체에 고산국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퍼뜨려주길 기대했다. 앞으로 폴란드 귀족들이 웬만하면 고산국의 정책에 반발 없이 따르게 될 것이다.

“나는 야전 헤트만이 단독으로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어제 이미 바르샤바에 이번 일을 설명하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 타고 달리는 것보다 배가 훨씬 빠르군요. 폴란드는 내륙국가라서 이런 경험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헤트만도 아시겠지만 옛날 로마처럼 도로를 잘 닦아놓으면 후사르의 기동이나 보급품 운반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오.”

“폴란드가 평원이라도 길이 좋지 않습니다. 도로에 방어적 성격을 부여해서 말입니다.”

야전 헤트만과 총함장 이순신, 그리고 육군 사령관 계복이 새벽부터 참모들과 함께 모여 작전계획을 세워 놓았다. 고산국과 합동작전에 참가한 다른 나라들이 항상 그랬듯이 폴란드 기병대에게도 적응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이동에 사흘, 도시 점령에 한 달을 제시한 후사르 참모들과 달리 고산국에서는 이동에 세 시간, 도시 파괴에 30분을 제안해 폴란드 측을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산국 참모진이 제안한 시간이 더 현실적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단치히에서 100km 가량 떨어져 있는, 발트 해에서도 같은 단치히 만에 접한 큰 항구도시였다. 이 시대에 일 년에 상선 100척 이상이 입항하는 항구 도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제외하면 단치히, 그리고 라트비아의 리가뿐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비스툴라 석호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함대의 첫 번째 목표는 석호 출입구에 위치한 필라우 요새였다. 현대의 발티스크인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아직 보방의 축성술이 유행하기는커녕 보방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1537년 벽돌 보루로 시작해 창고 건물과 성벽을 비롯한 요새화가 완료된 시점이 1550년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중세시대 공성무기에 대비하고 이 시대 대포의 위력을 감안해 정성 들여 건설된 작은 요새와 성벽은, 고산국 함대의 포격을 견디기에는 너무 높고 얇았다.

- 총함장이다. 순양함 5전대, 적 요새에 대해 함포 사격 개시.

순양함 4척이 필라우 요새가 무너질 때까지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전대 소속 함선에 탑재된 함포에서 채 두 발도 안 쏜 시점에, 5인치와 3인치 포탄 몇 발을 맞은 작은 요새는 이미 완전히 평탄화되었다.

필라우 항구와 마을을 무시하고 수로를 통해 함대가 비스툴라 석호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동쪽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빠르게 직진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첨탑에서 다급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바다를 타고 멀리 국왕좌승함 함교까지 이르렀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알베르티나 대학교는 독일의 지적 상징이에요. 그리고 이 도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인쇄산업 중심지에요. 1551년에 폴란드어로 번역된 신약성서가 처음으로 인쇄됐어요.”

“문화적 중심지라니 조금 아깝소.”

헤드비히 공주가 한 말이 아니더라도 이민호는 이 도시의 가치가 아쉬웠다. 도시가 재건되지 않는다면 이마누엘 칸트가 산책을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것이다.

- 총함장이다. 병력이 탑승한 수송선은 사전에 지정된 해안으로 향한다. 지상군 상륙 개시!

수로를 지난 지 40분쯤 됐을 때 총함장 이순신이 상륙전을 지휘했다. 이때까지는 총함장이 지상군까지 지휘하고, 상륙 이후에는 지상군 사령관이 순양함의 함포 사격까지 지휘하는 것이 고산국의 상륙전 교리였다. 물론 함대와 지상군 참모진들이 통합지휘부를 구성해 협력하고 있었다.

총함장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수송선들이 프레겔 강 하구의 북쪽 해안으로 접근했다. 현재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가 프레겔 강의 북쪽으로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하 작전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요새의 대포 사거리 밖에서 수송선들이 해안에 지상군을 쏟아냈다.

평소처럼 기병연대와 구르카여단, 장갑차 대대에 이어서 이번 상륙작전에는 폴란드 후사르 3천기까지 포함돼 있었다. 모든 병력이 상륙하자마자 전투태세를 갖췄고, 그 즉시 출발했다. 폴란드 후사르는 미리 약속된 작전 계획에 따라 북쪽으로 멀리 우회했다.

“프로이센 공국의 주 병력은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소?”

“음모를 꾸민 자가 다음 계획을 어떻게 세웠을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도시 안에 있지 않을까요?”

헤드비히 공주의 판단이 옳을 것 같았다. 해로를 통해 단치히에서의 일이 실패한 것을 파악했더라도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병력을 움직일 시간이 없었다.

적 주력이 도시에 있다고 간주하고 함대에서 함포 사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프레겔 강 하구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탐사선에서 연락이 왔다.

- 전하! 프레겔 강 안쪽 5km에서 작은 보루를 포격으로 붕괴시켰습니다. 그리고 수로 중앙에 함선의 출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설치돼 있습니다. 물이끼가 붙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설치한 것 같습니다.

“알았다. 주변에 대포가 매복해있을지 모르니 유의하라.”

탐사선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 전하! 쾨니히스베르크 방향에서 노를 젓는 작은 배가 한 척 떴습니다. 프로이센 공작령에서 보낸 사절단이 국왕전하를 알현하길 원합니다. 사절단을 보낸 자가 섭정인지 공작인지 확실치 않고 얼버무립니다.

“국왕좌승함으로 유도하라.”

함포 사격 직전에 사절이 오는 바람에 긴장된 분위기에 초를 치고 말았다. 함포 사격이 미뤄지고 잠시 후 배가 국왕좌승함에 도착했다. 해병들이 사절로 온 독일인 귀족들을 알현실로 안내했다.

이민호는 옥좌에 거만하게 앉아서 사절들의 인사를 받았다. 사절들의 얼굴에는 고산국 함대가 이곳에 왜 왔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들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고 사절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 나는 단치히에서 프로이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 보복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지도에서 지우려고 왔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장 돌아가라! 너희들을 설득해서 죄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폐하!”

사절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민호에게는 진짜로 시간이 없었다. 계복이 직접 기병연대를 지휘하는 동안 구르카 여단과 장갑차 대대와의 연계는 이민호가 맡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도록.”

“고산국 국왕폐하! 소신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배후는 누구냐?”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을 맡았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옵니다. 그는 일이 잘못됐다면서 오늘 새벽에 브란덴부르크로 도망갔습니다.”

거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평생 대학과 교회를 세우던 지적인 계몽군주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게오르그 프리드리히였다. 그러나 사절들이 거짓말할 수도 있었고, 평소 이미지와 다른 짓을 몰래 하는 자들이 정치가들이었다. 이민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럼 누가 책임을 질 테냐?”

사절들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변경백은 도망쳤고, 공작은 정신에 문제가 생겨서 유폐 생활을 한 지 오래됐습니다.”

“없어? 책임 질 자가 없으면 그냥 간단히 쾨니히스베르크를 없애고 말겠다.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 그렇게 알고 너희들은 도시로 돌아가든지 도망가든지 해라. 당장 나가!”

해병들이 보병총으로 사절들을 밀어붙이며 알현실에서 쫓아냈다. 사절들이 울면서 국왕좌승함에서 내렸다. 독일인들이 작은 배를 저어 도시로 향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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