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7 62. 덴마크와 발트 해 =========================================================================
다음 날 함대가 단치히로 가는 도중에 순양함들이 선박 세 척을 나포해왔다. 세 척 모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범노선 두 척은 나포 과정에서 순양함으로부터 3인치 함포 포격을 받아 갑판 일부가 파손됐다.
순양함 1개 전단은 국왕좌승함과 수송선들을 호위하고 1개 전단은 함대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주변 해역을 수색, 측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동쪽 프로이센 방향을 수색하던 순양함 두 척이 해적 용의가 있는 선박들을 잡아온 것이다.
“범노선 두 척이 중무장한 채 다른 경무장한 범선을 공격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저 배 두 척이 먼저 공격했음을 상인들이 증언했습니다. 나포 과정에서 저항하기에 3인치 함포 한 발을 쏘아 20여 명을 살상했습니다.”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해적이 들끓지?”
해적선들을 나포한 순양함 함장에게 보고를 받은 이민호가 관측실로 올라갔다. 해적선 두 척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갑판이 엉망이 되고 돛대마저 부러진 범선에서 희생자가 꽤 나온 것 같았다.
다른 배 두 척의 선원들은 얼핏 보기에도 해적들이었다. 상갑판에는 대포 몇 문이 있고 둥그런 포탄과 화약통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해적 용의자들 일부가 해병들에게 잡혀오는 것을 보고 이민호는 상갑판으로 내려갔다. 몸이 묶인 채 끌려온 해적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리! 저 배에서 먼저 공격했습니다. 저놈들이 진짜 해적입니다!”
“작은 배에 선원이 몇 십 명 안 되고 대포도 겨우 2문밖에 없는 배에서 중무장한 두 척을 공격했단 말이지?”
“그것이 해적의 특성입니다. 속도가 빠른 작은 배를 타고 상대에게 접근합니다. 화물이 상할까봐 대포도 안 쓰고 주로 창칼로 싸웁니다.”
내용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해적 용의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용감한 해적이겠다 싶었다. 그때 마침 해적선 두 척을 수색한 해병 지휘관이 보고했다.
“선저 창고에 상품이 있긴 했습니다만, 모피와 건어물, 곡식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다른 배에서 빼앗은 약탈품으로 추정됩니다. 반대로 범선에는 곡식만 가득 적재돼 있습니다.”
금화 약간, 그리고 은화 세 상자가 선장의 선실에서 추가로 발견됐다. 해적들에 대한 처분을 두고 고민하는 동안 상선에서 몇 사람이 국왕좌승함에 올라왔다.
“고산국 국왕폐하께 단치히의 상인들이 인사 올립니다. 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발트 해와 북해에서 상선들을 약탈한 악질 해적들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저들이야 말로 해적들입니다! 저희들은 억울합니다.”
양쪽에서 시끄럽게 떠들자 이민호가 해병들을 시켜 침묵시켰다. 솔로몬이 아니더라도 이런 경우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상인들이라 추정되는 자들이 탄 배에는 노예가 아닌 여자 상인이나 상인의 부인들, 또는 여자 승객들이 여러 명 타고 있었다. 여자들이 배에 타는 것을 거부하는 터부는 이 시대 어선이나 상선에도 남아있었지만, 특히 목숨을 내놓고 노략질을 해야 하는 해적들이 가장 잘 지키는 터부였다. 여해적 자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극히 드물고 대체로 로망일 뿐이었다.
“폐하! 부디 저 해적들을 참수형에 처하도록 단치히의 재판소에 회부해주십시오.”
“내 부하들이 잡은 포로인데?”
“그렇다면 해적들의 몸값을 단치히 시의회에서 지불하도록 청원하겠습니다.”
“좋아. 마침 우리도 단치히로 가던 길이다.”
전투 과정에서 상인들도 많이 죽었다. 상인들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복수의 불길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단치히로 입항하기로 결정했다.
상선이 전투 중에 돛대를 잃었고 해적들은 모조리 포박돼 배를 운항할 수 없었다. 결국 세 척 모두 순양함들이 예인했다.
함대는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단치히 위치로 표시된 해도에는 백사장뿐이었다. 발트 해에서 항상 그렇듯 항구도시는 강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야 있었다. 얼마 전까지 강 하구에 튜턴 기사단에 의해 새로운 항구와 마을이 건설됐었으나, 단치히가 폴란드 영토로 환원되면서 깨끗하게 파괴해서 지금은 자그마한 잔해도 남지 않았다.
함대는 모틀라바 강 입구로 접근했다. 폴란드 평원의 젖줄이며 바르샤바를 지나치는 비스와 강, 옛 이름 비스툴라 강의 하구는 여기서 동쪽으로 몇 km, 또는 10여 km 떨어져 있었다. 강 하구가 이룬 삼각주에서 유역 변경이 생겨서, 옛날에는 비스와 강의 서쪽 하구에 위치했던 단치히는 지금은 비스와 강에서 떨어져 있게 됐다.
모틀라바 강 하구에 위치한 해안 요새는 고산국 함대가 아니라 해적선 두 척에 놀라 비상종을 치고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대포 주변에 배치됐으나, 함대에 적대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태극기가 한자 동맹 도시들에 이미 등록이 돼서 고산국 배들은 어디나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다.
“배가 많이 다니는구려. 뤼벡이나 베르겐보다 많은 것 같지 않소?”
“단치히에서는 곡물을 주로 수출해요. 그래서 물량에 비해 이익은 적은 편이에요. 그래도 물량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전체 이익이 커요.”
곡식을 가득 적재한 배들이 끊임없이 강 하구를 통해 빠져 나갔다. 봄에는 주로 가을밀을 수출한다고 했다.
단치히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외항 역할을 하면서 폴란드 전역에서 수확한 곡물을 발트 해나 북해 연안 국가로 수출하는 곡물 수출항이었다. 넓은 폴란드 땅에서 북동쪽 프로이센 공작령을 뺀다면 실제로 폴란드의 항구 도시는 이곳 하나뿐이었다.
“오! 강변 부두에 상품 하역용 기중기까지 있소. 건물에 고정돼 있다는 점이 특이하군요.”
“고산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중기를 사용하나요?”
헤드비히 공주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기중기는 이 시대 과학의 총아였다. 15세기에 건설된 이곳 목조 기중기 건물은 이 시대 기준으로 매우 앞서 나가는 시설이었으나 지붕 처마의 길이만큼 배에서 바로 앞 부두로 내리는 것이 한계였다.
“부두에 선로를 길게 깔아서, 그러니까 쇠막대 두 줄로 철길을 만들어서 기중기가 좌우로 이동할 수 있게 했소. 물론 화물을 앞뒤 또는 회전해서 다른 곳에 내릴 수 있소. 수레 위에 직접 내리기도 하오.”
“아! 그럼 기중기가 필요한 배로 옮겨 다니면서 화물을 싣고 내릴 수 있겠네요.”
이민호에게는 상식이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런 기술력이 없었다. 발상 자체야 할 수 있다지만 기중기 건물이나 쇠줄이 화물의 하중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사이 국왕좌승함을 비롯한 순양함 4척과 수송선 6척만 모틀라바 강 하구로 진입했다. 나머지 함대는 강 하구나 바다에 포진했다.
수로를 통해 들어가는 동안 지나치는 상선들에서 상인들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왔다. 고산국 함대가 발트 해 도시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고, 한자 동맹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도시 상인들이 함대의 방문을 요청했다. 고산국 상품이 워낙 좋은 평가를 받은 탓에 이렇게 판매자 우위의 시장을 즐기고 있었다.
“혹시 폐하의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국가재산 말고 개인 재산이요.”
“흠. 확실히는 잘 모르겠소. 변화가 커서 말이오.”
이 시대 유럽 왕실에서는 국가 재산, 왕실 재산, 개인 재산을 확실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혜영이 정확히 구분해서 관리하고 있었다. 매 분기마다 보고를 받긴 하는데 짧은 기간에도 성장 규모가 커서 제대로 기억은 못했다. 다만 왕궁 지하 보물창고에 금은보화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가끔 들러서 감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산더미처럼 쌓인 금괴나 보석은 이민호의 재산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왕실 재산과 이민호의 개인 재산은 주로 국영기업 형태로 투자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개인 재산 회계에서 자산 가치 0으로 표시된 북미와 호주를 비롯한 토지의 진정한 가치를 합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수 있었다.
“유럽 최고의 부자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이고 재산은 천만 플로린이래요. 오빠 크리스티안은 225만으로 3위예요.”
“오호! 2위는 누구요?”
“어머니예요. 450만 플로린이라고 알려졌는데 아마 훨씬 더 많을 거여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왕비이며 크리스티안 4세와 헤드비히 공주의 어머니인 메클렌부르크의 조피는 이민호의 예비 장모였다. 이 시대 신성 로마 제국 궁정의 예산이 50만 플로린에 불과했으므로 뜻밖에 엄청난 알부자였다.
“며칠 전에 결혼 선물 보내드린 것이 눈에 안 차시겠구려.”
“어머니가 평생 받으신 선물 중 가장 비싼 것일 걸요?”
장모가 부자라서 사위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상속을 하더라도 그 재산을 부인이 나눠 가지지 사위가 받지는 않는다. 유럽의 부호 2위와 3위를 오빠와 어머니로 두고 있는 헤드비히 공주도 부자일 것 같았지만 이민호와 비교하면 소시민일 것 같아 묻지 않았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고 좋소. 다른 발트 해 연안국에 비하면 햇빛이 밝은 것이 마음에 드오.”
“덴마크와 스웨덴은 우중충하지요.”
단치히, 또는 그단스크는 10세기 전부터 발트 해 남부의 교역도시로 발전했다. 1457년 폴란드 국왕 카시미르 4세에 의해 자치권과 재판권, 입법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다.
1577년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가 특권을 회수하기 위해 단치히를 포위했지만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요새화한 단치히는 신성 로마 제국과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버텨나갔다. 이후 단치히가 고용한 용병들이 야전에서 크게 패배했으나 협상과정에서 국왕에게 금화 20만 굴덴의 사죄배상금을 지불하고 단치히의 전통적인 특권을 보장받았다.
“저기, 공주. 함대에 폴란드어 통역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한자 동맹 도시에서 언어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상인들이 우리에게 맞춰줄 거여요.”
“그렇긴 하겠소.”
단치히는 폴란드 영토에 위치한 한자 동맹의 도시였고 주민의 다수는 독일 상인이었지만 상층부는 포메렐리아어를 사용했다. 소수 폴란드인과 유대인 외에도 한자 동맹 도시의 특성답게 남부 네덜란드인, 스코틀랜드인 등 외국에서 온 난민들도 시민으로 받아들여져 거주했다.
“폐하! 해적들을 구금하고 해적선은 경매에 붙여서 폐하께 지불하겠습니다.”
“오! 그래주시오. 그대가 경매 대리인이 되어주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폐하!”
배 두 척을 팔아 수수료를 챙긴다면 전투 중 죽어간 상인과 용병들에게 위로금이라도 지불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이민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인 상인들이 자기들 배로 돌아가 먼저 상선과 해적선들을 정박시켰다.
함대는 따로 비워둔 군함용 대형 선착장으로 입항했다. 단치히의 시의회 의원들이 환영 행사를 위해 부두에 나와 있었다. 의전 행사에 동원된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꽃가루가 하늘에 날렸다.
- 쿠우웅~ 쿠웅~
“뭔 소리지?”
멀리서 은은하게 포성이 울렸다. 배에서 내리기 직전이던 이민호는 함장이 급히 불러서 함교로 다시 돌아갔다. 그 사이 함대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강 하구 바깥에서 전투 중이라고 합니다. 총함장께서 전하께 긴급 보고합니다.”
“수화기를 주게.”
이민호는 단치히 항 바깥에 포진한 함대가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총함장 이순신은 대포 여러 문을 갖춘 폴란드 함선 20여 척이 접근하더니 선제공격을 가해서 자위를 위해 즉각 반격, 모두 격침시켰다고 보고했다.
- 아무래도 전하께서 함정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즉시 바다로 나오십시오. 폴란드 함선들은 전하께서 단치히에 입항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북쪽에서 몰려나왔습니다.
“단치히의 해안 요새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까?”
- 예, 전하. 해안 요새에서는 일부러 포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함대에서는 언제든 해안 요새의 포격에 대응할 준비를 갖춰 놓았습니다.
단치히와 상관없는 폴란드의 단독 공격이란 뜻이었다. 단치히가 한자 동맹의 도시이긴 하지만 역시나 폴란드의 영토인데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이 특이했다.
“폴란드 해군 함선에서 포로를 잡아서 심문하시오.”
- 바다에 빠진 포로들을 수집하는 중입니다. 안전을 위해 어서 빠져 나오십시오, 전하. 만약 수로가 막힐 경우 지상군을 상륙시키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민호는 잠시 고민했다. 폴란드가 고산국을 적대해서 얻는 이익이 뭘까 궁금했다.
“헤드비히 공주를 흠모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군주가 공주를 납치하기 위해 저런 짓을 한 것 같소.”
“농담하지 마세요, 폐하!”
헤드비히 공주도 폴란드가 고산국 함대를 공격하는 이유를 몰랐다. 이번에 고산국이 덴마크 국왕과 스웨덴의 실력자 카를 9세를 만난 것이 폴란드에게 위협을 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를 이용해 루스 차르국을 공략하려는 이민호의 전략에 큰 차질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단치히에 오지 말았으면 좋았겠지만, 폴란드와 외교 교섭을 해둘 필요성 때문에 단치히를 방문 예정지에서 제외할 수 없었다.
“함장! 일단 바다로 물러난다. 단치히는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니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바로 빠져 나가겠습니다.”
부두에서 벗어난 함대는 수로의 폭이 좁아서 그 자리에서 선회하지 못하고, 시가지 반대쪽 운하로 우회해 바다 쪽으로 나가려 했다. 그래서 잠시 상류로 진행했는데, 빨간 벽돌로 쌓은 원통형의 요새에서 적대적인 움직임을 포착해냈다.
“전하! 정면의 요새에서 포구를 우리 함선 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공격해!”
명령을 내리자마자 선두에 나선 호위전대 소속 순양함이 주포를 발사했다. 5인치 함포가 요새 내부에서 폭발하면서 높다란 요새가 잠시 기우뚱했다. 그리고 한꺼번에 주저앉아 버렸다.
“속도를 올려!”
- 타탕! 탕!
사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빨간색 건물 창문 안쪽이나 지붕에 숨은 머스킷 병이 함선을 향해 총을 쏴댔다. 갑판 좌우에 늘어선 해병들이 총격을 퍼부어 제압했으나, 수로를 따라 이어진 건물의 옥상이나 창문마다 머스킷 병이 총구를 내밀었다.
단치히에 폴란드군 다수가 들어와 있었다. 단치히 시의회 의원들이 전혀 모르는 척 고산국 국왕 환영 의전행사를 연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격으로 제압하기 어려우면 건물에 3인치 함포를 쏴!”
단치히의 중세식 건물들이 나중에 세계 문화유산이 되든 말든 일단 살고 볼 일이었다. 어차피 이차대전 때 절반 이상이 사라질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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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조금 꼬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