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4 62. 덴마크와 발트 해 =========================================================================
스웨덴이 가난하다는 말을 들은 이민호는 몹시 어색했다. 현대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스웨덴은 국토 면적은 넓으나 황무지와 숲이 대부분이었다. 농토가 있다 해도 북쪽 지역의 기온이 낮은 국토 특성상 농업 생산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지금 스웨덴에는 목재 수출 말고는 돈벌이가 될 것이 없었다. 카를 공작의 영도 아래 각종 광산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개발 초기 단계인 현재는 돈을 벌기보다 투자가 더 필요할 때였다.
카를 공작의 초청을 거부한 것은, 이민호를 납치해서 몸값을 받아내려고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처음 부두에서 마주쳤을 때 카를 공작의 눈빛은 딱 납치범의 것이었다.
“처리하기 어려운 백성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게 달라고 요청하러 왔소.”
“으음! 시기스문드 국왕이 폴란드로 도망간 지금 스웨덴의 국정 운영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백성을 외국에 내주는 것은 국정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혹시 공작은 가톨릭교도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 않소? 그것도 루터교 목사와 신도들에게 말이오.”
가톨릭교도들은 반란에 참가하거나 숨어 다니느라 공개적으로 공작을 비난할 기회도 없었다. 신분의회를 열 때마다 목사들이나 루터교 신자인 귀족, 관료들이 공작에게 아량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건 사실입니다만, 스웨덴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이민을 시켜주는 것이 나을 것 같소. 북미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오.”
“로마가톨릭은 경건함을 잃어 이미 가짜 신앙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공작의 자유요. 그러나 만에 하나 스웨덴이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된다면 공작은 어찌 하겠소? 나는 공작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북미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하겠소.”
역지사지를 해보라는 충고가 통했다. 그리고 덴마크 서인도회사를 통해 스웨덴의 목재와 지하자원을 수입해주기로 약속했다. 돈이 몹시 궁한 카를 공작 입장에서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스웨덴은 조만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루스 차르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루스 차르국의 영토인 핀란드 만 동쪽과 남쪽의 잉그리아, 그리고 그 남쪽 리보니아를 점령한 것은, 루스 차르국으로부터 바다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명확한 목적은 루스 차르국의 모피 무역을 스웨덴이 대리하거나 현대의 관세에 해당하는 통행세를 얻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스웨덴은 수입원이 절실했다.
루스 차르국은 모피를 잉그리아를 통해서 발트 해로, 육로인 제국의 길을 통해서 라이프치히로, 그리고 남쪽 오스만 제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상품 수송에는 육로보다 수로, 특히 통행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바닷길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스웨덴의 전략 목표가 루스 차르국이 바다에 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민호가 추진하는 정책과 겹쳤다. 스웨덴이 너무 가난해서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고산국이 부려먹기에 딱 좋았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민호에게 조언을 해준 뤼벡 상인들은 역시 훌륭한 전략가들이었다.
“험! 백성들이 줄어들면 경제 운영에 문제가 생기고 국가의 부가 줄어들게 됩니다, 폐하.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참, 그렇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공작. 이민은 이민이고, 나는 스웨덴에서 광산을 활발히 개발한다는 소식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좀 하려고 왔소.”
스웨덴인의 북미 이민을 허용해주는 대가로 금전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 광산 투자로 스웨덴을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몇 명이나 갈지 모르는 이민을 통해 사람값을 받느니 차라리 광업 투자가 훨씬 현실적이었으며, 규모가 클 수 있었다.
“요즘 열심히 철광과 탄광을 개발하고 있습니다만, 스웨덴은 다른 나라에 비해 철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외국 제철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있습니다만 잘 오지 않습니다. 혹시 고산국에 있다는 대형 용광로를 스웨덴에 설치할 수 있는지요?”
“대형 용광로는 국가 기밀이라 그건 좀 어렵겠소. 스웨덴에도 고로가 있을 테니 주철이나 선철 단계에서 넘겨주시오. 석탄이나 철광석도 남는 것은 모두 매입하겠소.”
“잠, 잠깐만요, 전하!”
통역관이 주철과 선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이민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고로에서 생산한 불순물 섞인 철괴를 달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철광석과 석탄을 수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카를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미시간 호 주변에서 대규모 철광을 발견한 북미에는 석탄이 부족했다. 철광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철로가 놓이지 않아 당장 개발하기 곤란할 뿐 북미에도 탄광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몹시 힘든 직업인 광부로 일하지 않으려는 것은 북미도 고산국 본토와 같았다. 탄광에서 일할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범죄자 말고는 구하기 어려웠다.
“비록 지독한 냄새와 연기가 나지만 석탄은 장작보다 효율이 좋은 난방 연료입니다.”
“동의하는 바요. 그러나 그 연기와 냄새 때문에 지천으로 깔린 석탄을 난방 연료로 사용하기 곤란한 점이 있소.”
고산국에서 독점 수입하되 가격을 올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스웨덴에서는 어차피 다른 곳에 석탄을 팔지도 못했다.
석탄이 타면서 내는 연기와 냄새를 연통을 통해 밖으로 빼내는 석탄 난로가 아직 유럽에서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장작을 때는 화덕보다 간단한 구조였으나 석탄을 난방 연료로 사용할 생각을 못했기에 석탄 난로를 개발할 생각도 못했다.
북미의 노천탄광 생산량만으로는 부족한 석탄을 스웨덴에서 수입하게 돼서 조만간 고산국 제철소에 숨통이 트일 전망이었다. 북미 백성들을 억지로 탄광에 보내 석탄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싶지도 않았는데 잘 됐다.
카를 공작과 협상을 진행한 결과 운송료를 빼고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을 정도로 석탄 가격이 낮았다. 북미의 노천탄광과 굴을 파고 들어가서 캐내야 하는 스웨덴의 석탄이 비슷한 가격이 된다는 것은, 스웨덴 광부들과 수송마차 마부들의 임금이 극히 낮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폐하! 스웨덴에 석탄이 매장된 곳은 많은데 개발할 여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광부로 지원할 사람들은 많소?”
“물론입니다. 스웨덴에서는 일거리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다만 탄광에서 항구까지 도로를 닦고 수송용 마차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해서 쉽게 개발하기 어렵습니다.”
카를 공작의 말은 선금을 달라는 뜻이었다. 탄광 초기 개발 자금이야 선뜻 내줄 수도 있었으나 이를 핑계로 스웨덴에서 뭔가 양보를 받아낼 것이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이 없었다.
헤드비히 공주에게 물어봐도 스웨덴에서 내놓을 것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 스웨덴은 그만큼 가난했다. 백성들이 굶어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어서 루스 차르국이나 공격하는 게 나았다.
“루스 차르국을 공격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주변국들과 평화롭게 지내시오. 그리고 사미 족이나 핀란드인들에게 좀 더 관대하게 대해주시오.”
“죄송하지만 그건 내정간섭입니다만.”
카를 공작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스웨덴인들이 오랫동안 북부 순록 유목민인 사미 족과 핀란드인들에게 차별대우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최근 핀란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핀란드에서는 1596년부터 1597년까지 집중적으로, 그리고 1599년에도 간헐적으로 클럽 전쟁(the Club War)이 일어났다. 1590년부터 1595년까지 이어진 루스 차르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지친 핀란드 소작농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세금과 부역에 반발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핀란드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몽둥이와 곤봉 등 각종 타격무기로 무장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중무장한 스웨덴군에게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무기였으나, 반란군의 방어구가 빈약해서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반란군과 진압군은 노키아에서 벌어진 야전에서 결정적인 승부를 벌였다. 반란진압군 지휘관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총독인 클라스 에릭손 플레밍 남작이었다. 노키아나 에릭손, 그리고 플레밍은 이민호가 현대에서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반란에 참가한 일부 자작농들의 대열을 진압군이 돌파할 수 없게 되자 총독은 무장이 빈약한 소작농과 중무장한 자작농들을 분리시켜 전장의 주도권을 잡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먼저 핀란드 자작농들에게 반란군 지도자를 잡아오면 전장을 떠나도 좋다고 약속한 다음, 항복한 자작농들을 모두 쳐 죽였다. 동족을 배신한 자작농들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총독이나 비열하긴 마찬가지였다.
“내정간섭일 수도 있겠군요. 스웨덴이라는 국가에 은 10만 파운드, 금 1만 파운드를 빌려주려고 했는데 싫다면 관둬야겠소.”
“르네상스 기간에 학자들이 연구한 인문학이 최근에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인도주의로 나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인은 평등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의견에 저도 마음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출신 민족을 불문하고 스웨덴의 영토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을 보호해주겠습니다.”
공작은 많이 배운 사람답게 즉석에서 차별 금지 정책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했다. 이민호는 좋은 의견이라고 맞장구치면서 즉시 금과 은, 대충 은 120만 냥과 금 12만 냥을 공작의 진영에 보내라고 함장에게 지시했다.
옮겨야 할 금과 은의 양이 50톤이 넘어서 한참 동안 부산을 떨었다. 잠시 후 공작의 부하가 만찬장에 들어와 금과 은이 스웨덴군 숙영지로 옮겨졌다고 보고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스웨덴이 언제 파산하나 걱정했는데 폐하 덕택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광부들이 착용할 마스크는 따로 보내드리겠소. 반드시 착용하고 작업하라고 하시오.”
카를 공작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덴마크와 연합한 고산국이 스웨덴을 침공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털어 놓았다. 덴마크와 전쟁하다가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못 갚아서 영토를 담보로 제공하면서 빚을 갚아나가던 스웨덴의 역대 국왕들과 달리 카를 공작은 운이 좋았다.
이민호에게 빌린 자금은 스웨덴의 석탄 수출 대금에서 바로 까지 않고 여유가 생길 때 천천히 갚아 나가기로 했다. 신용대출로서는 역대적인 금액이었다.
“제게 딸이 있다면 폐하께......”
“됐소!”
카를 공작의 제안을 제대로 통역하기도 전에 이민호가 단박에 거절했다. 옆에서 헤드비히 공주가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저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을 구금해두었습니다. 반역죄로 기소돼서 재판이 진행 중인데 가만 놔두면 사형당할 게 뻔해서 곤란해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반대자에게 아량을 베풀 생각이 있으셨구려. 하지만 북미로 추방하면 귀족들이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 다시 스웨덴으로 쳐들어올까 걱정하고 계시오?”
스통게브로 전투 이후 시기스문드 국왕 편에 가담했던 고위 귀족들에 대한 처분이 문제가 됐다. 실제 역사에서는 1600년 3월 ‘링쾨핀 살육’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날 카를 공작의 반대자들인 고위 귀족 5명이 시장 바닥에서 공개적인 참수형을 당했다.
정당하게 즉위한 국왕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던 클라스 에릭손 플레밍 총독은 1597년에 이미 사망했다. 그의 아들 둘은 1599년 11월 핀란드 오부, 즉 투르쿠에서 벌어진 ‘오부 살육’ 때 모두 공개적으로 처형당한다. 이때 다른 반역자 12명도 함께 시청 광장에서 참수 당한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
“흐음. 귀족이라면 공부도 많이 했을 것이오. 고산국 본토 남쪽 멀리 호주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대학의 교수로 채용하겠소. 물론 가족도 같이 가야 하오. 호주에서 외국으로 가는 배가 드문 편이니 사실상 가택 연금이나 마찬가지요.”
“감사합니다. 폐하께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만, 핀란드에도 반역자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들도 호주라는 곳에 보내주면 안 되겠습니까?”
플레밍 총독의 아들들을 참수한 후 카를 공작이 플레밍 공작의 시체에 모욕을 가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관에 누운 플레밍 총독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당신의 목 역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카를 공작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전설이었다.
“공작의 반대자들을 얼마든지 고산국에 보내시오. 스웨덴 인구가 얼마 안 될 테니 보내봤자 몇 명이나 되겠소?”
“역시 폐하께서는 배포가 크십니다.”
호주를 원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형지로 쓰게 됐다. 물론 호주 개척 과정에서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가혹한 육체적 노동만 강요하던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이민호는 지식인들을 제대로 활용했다.
카를 공작은 칼마르가 점령된 뒤에도 며칠 머물렀던 덕택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민호도 석탄과 철광석의 안정적인 공급원을 얻게 돼 한시름 놓았다.
“폐하께서 피에 굶주린 카를 공작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하셨어요.”
“뤼벡에서 그렇다는 말만 들었지 스웨덴이 이렇게 엉망인 줄 몰랐소. 칼마르뿐만 아니라 핀란드 쪽에서도 핀란드인의 반란에 더해 반란진압군의 반란이라니, 어이가 없소.”
무릎 위에 앉은 헤드비히 공주가 이민호의 눈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핑크빛 분위기가 침전에 이미 조성된 것 같아 공주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통역으로 네덜란드 여류 화가가 침전에 들어와 있었지만 이제 신경 쓸 단계는 넘었다.
“하아! 이런 기분이라니!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해요.”
이민호는 헤드비히 공주와 다시 입을 맞추면서 몸을 만졌다. 가슴 쪽의 발육이 참으로 훌륭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공주가 눈을 감고 신음을 흘릴 때 공주의 시녀들이 가로막았다.
“결혼하기로 했는데, 왜?”
“아직 약혼 관계일 뿐입니다. 결혼식 전에는 동침하시면 안 됩니다, 폐하.”
하나 같이 미녀들인 덴마크 시녀들이 이렇게 밉상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헤드비히 공주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시녀들에게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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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에 8시간이 넘게 걸리는군요...
이제 자료 찾기 어려운 부분은 다 넘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