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2 62. 덴마크와 발트 해 =========================================================================
공물을 바치는 자들에게 교역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손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야삭(Yasak)이라 불리는 공물이 물물교환이 아닌 일방적인 세금으로 정착된 것은 지역에 따라 달랐고, 동시베리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대혁명 시기까지 늦춰진다. 공물을 내는 방식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야삭 납부에서 웃기는 것은, 세금처럼 돈으로 납부하게 되면 차르의 수입이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다. 시범적으로 금전납부를 시행한 지역에서 곧 취소하고 예전의 공물 납부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이를 확실히 증명했다. 물물교환을 통한 사실상의 교역인 공물로 인한 수입이 일방적으로 세금을 걷는 것보다 차르에게 훨씬 이익이었다.
고산국이 동해국에서 모피와 가축을 받고 곡식과 농기구 등을 내주며 이익을 챙기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물론 고산국은 물물교역 식으로 공물을 받지 않고 은을 매개로 완전한 교역을 해서 여진족으로부터 반발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그럼 당신들은 공물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 하사품으로 내릴 물건 값이 부족해서 모피 일부를 빼돌린 것이었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칸이시여!”
물론 중간에 슬쩍하는 비율도 꽤 클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수입이 없다면 코사크들이 루스 차르국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할 리가 없었다.
“오비 강 유역, 옛 시비르한국의 영역에 코사크와 공물 수거인이 몇 명이나 있나?”
“작년 전투에서 대부분 죽고 새로 보충해서 420명 정도 됩니다. 차르가 내준 리투아니아와 독일인 노예들은 대부분 죽어서 이제 100여 명만 남았습니다.”
처음에 예르마크가 시비르한국을 치는 원정대를 꾸렸을 때 인원이 코사크 전사 540명, 리투아니아와 독일인 노예 일꾼이 300명이었다. 수로를 이용해 원정을 수행했기 때문에 코사크들은 말이 한 마리도 없고 화승총도 몇 정 없었다. 그리고 코사크들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보급품을 실은 뗏목에서 멀리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시비르한국이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국은 절대 아니었다. 쿠춤 칸의 요새에서 대포도 쏘고 화승총도 쏘는 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시비르한국과 그 동맹국의 전사들은 기본적으로 기병이었다.
당연히 코사크들의 인명피해도 컸다. 처음 탐험대를 이끈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도 전투에 패해 도망가다가 죽었다.
“그대들에게 황금을 주면 고향에 돌아가겠나?”
“적절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저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대칸이시여. 피지배민들의 반발도 두렵고 상대할 적이 없다는 대칸의 군대와 충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대들 대신 시비르한국에 갈 코사크들이 있겠지?”
“루스 차르국에서 새로 코사크들을 뽑아 시비르에 파견한다 해도 2~3년은 넘게 걸릴 것입니다. 만약 대칸의 군대가 시비르한국에 접근한다면 싸우지도 않고 다 도망갈 것이 확실합니다.”
그 시간이라면 현재 바이칼 호수를 넘어선 동해국 탐사대가 시비르한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면 이번 거래가 귀중한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었다.
이민호가 발트 해에 올 생각을 했을 때는 얼마 후부터 시작될 로마노프 왕조를 어렴풋이 떠올려 러시아에서 로마노프 가문과 협상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가짜 드미트리 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그리고 스웨덴과 싸울 로마노프 가문에 총기를 지원해주는 대신 시비르한국을 포기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누가 차르가 되더라도 모피가 비처럼 쏟아진다는 우랄산맥과 시비르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돈에 눈이 먼 차르와 그 하수인 코사크들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확장할 것이다. 결국 군사력을 동원해 루스 차르국의 시베리아 정복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었다.
“너희들이 고향에 돌아간다면 일인당 10만 악체에 해당하는 오스만 제국의 금화를 주겠다. 그냥 일인당 금화 100개씩 주마. 오스만 제국 시파히 기병 장교의 6년 연봉이다.”
“대칸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코사크 두 명이 이민호 앞에 부복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시베리아의 운명을 가르는 협상이 간단히 체결됐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불한 착수금은 금화 500개에 해당하는 금괴 하나였다. 나머지는 이스탄불의 주 오스만 제국 고산국 대사관에서 받으라고 편지를 하나 써줬다. 코사크들은 고향에 돌아가는 것으로 모자라 배를 타고 흑해를 건너 이스탄불에 가야 금화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
코사크들을 내보내고 시의원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눴다. 뤼벡 시의원들에게는 발트 해와 북유럽의 모피 교역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민이었지만 이민호 입장에서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영토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었다.
실제 역사처럼 루스 차르국이 빠른 시일 내에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오호츠크 해와 알래스카에 도달한다면 고산국 입장에서는 지독한 악몽이었다. 루스 차르국을 견제하는 것이 다만 지구본에 칠해지는 나라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토 북쪽에 러시아가 도사리게 된다면 수천 km에 이르는 국경선 방어 부담이 급속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반드시 고산국이 시베리아를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러시아에 적대적인 나라가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이민호는 기뻐할 수 있었다.
“골치 아픈 곳이오. 시비르한국이 멸망한 지역에 고정적인 군사기지가 필요하지만, 끔찍하게 추운 곳이라는데 도대체 누가 가고 싶겠소?”
“그런 용감한 자들에게 특혜를 줘야죠.”
헤드비히 공주는 참모로서 유능한 인재였다. 그 능력만으로도 곁에 두고 싶었는데 결혼하는 것이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그건 그렇소. 하지만 특혜라는 것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아주는 것이오.”
“타타르인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도 공물을 물물교환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시비르한국을 지킬 자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세요.”
“루스 차르국에 대한 방어를 맡기는 대신 공물 수거인 역할을 시킨다? 알겠소. 고민해보겠소.”
여진족 전사 2천 명 정도에 가족을 딸려 보내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더 가까운 러시아나 오스만 제국에 붙어버리면 말짱 꽝이었다.
“철도를 놓으면 어때요?”
“헉!”
곁에서 듣고 있던 민영이 한 마디 한 것이 이민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수천 km에 달하는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관리하는 것에 더 많은 비용과 인력이 들었다.
철을 구하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에게는 고급 철이 길바닥에 놓여 있는 꼴이었다. 이들이 선로 몇 개만 빼가도 기차는 탈선사고를 겪게 된다.
사흘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만 달릴 기차를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는 것은, 그러나 낭비가 아니었다. 이번 시비르한국처럼 거리가 결정적인 문제라면 철도를 놓음으로써 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철도 주변 지역의 급속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철도 주변 지역이 발전해봤자 시베리아 인구는 여전히 희박할 것이다. 원주민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륙 횡단 철도라. 이미 하나 만들었지.”
“예? 북미에서 철도는 큰 호수까지만 놓고 있잖아요.”
“파나마 운하에 이미 있잖아.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철도가 연결돼 있어. 비록 77km밖에 안 되지만 그야말로 진정한 대륙 횡단 철도야.”
허탈해서 해본 농담에 불과했다. 7,400km 또는 9,289km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관리할 생각을 하니 속에서 욕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의원들은 들으시오. 기존 라이프치히 모피 시장과 비교해 뤼벡에서는 판로가 문제될 수 있소. 판매망을 잘 갖춰보시오.”
“예. 폐하. 엘베 강 지류인 잘레 강 연안에 위치한 라이프치히처럼 뤼벡도 수로를 통한 교통망에 연결돼 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어디라도 갈 수는 있지만 다만 통행세가 문제입니다.”
“상인들이 통행세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데, 통행세가 영지 수입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많소.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들이 같은 정부로 통합되기 전까지는 통행세를 내는 수밖에 없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시의원들은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예멘 이맘이 한 것처럼 과도한 통행세를 물려 상업을 마비시키는 정도가 아니라면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 세기에 발트 해에서 한자 동맹이 너무 잘 나가는 바람에 위협을 느낀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가 한 나라로 합쳐버린 것이 칼마르 동맹이었다. 상인들이 군사력까지 동원해 시골 영지를 압박한다면 영주들이 위기감을 느껴 공동으로 저항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 시기 북유럽에서는 여전히 용병들에게 군사력을 의존했다. 상인들이 더 많은 용병을 고용할 수 있어서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 그러나 조만간 스웨덴부터 국민개병제가 실시된다면 한자 동맹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든다.
“새 차르는 어떤 인간이오?”
“이반 4세의 아들 표도르 1세의 부인이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입니다. 혈통이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다가 차르가 죽고 나서 차르에 올랐습니다.”
발트 해 연안국, 특히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덴마크에서도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상인들의 정보가 확실히 빠르고 정확했다.
“끊임없이 정당성에 대한 도전을 받겠군요. 인기는 어떻소?”
“섭정이었을 때 잉그리아의 일부 지역을 스웨덴으로부터 탈환해서 루스 차르국을 다시 발트 해와 연결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내정을 잘하면 황제 직위를 유지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은 것 같습니다. 아직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부 지역에서부터 식량부족 사태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잉그리아는 핀란드 만부터 라도가 호수 사이, 그리고 핀란드 만 남쪽 연안지역이었다. 역사적으로 동로마제국과 통하는 무역 루트인 이곳은 바이킹인 바랑기안이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루시들을 지배하다가 전쟁, 신부 지참금 등의 이유로 숱하게 주인이 바뀐 지역이었다. 노브고로드와 스웨덴, 덴마크, 튜튼기사단 등이 이 지역 패권을 두고 싸웠다.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은 1590년부터 1595년까지 잉그리아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결국 1595년 테우시아 조약으로 잉그리아 일부를 루스 차르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잉그리아라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에서 관심을 가진 지역이지요?”
“그렇습니다. 하오나 시기스문드 3세 바사가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잉그리아에 신경 쓸 여력이 별로 없습니다.”
스웨덴어로 시기스문드 3세 바사, 폴란드어로 지그문트 3세 바사는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웨덴 국민 대부분이 루터교 신자임에 반해 시기스문드는 가톨릭으로 남았다.
시기스문드는 1587년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의 군주로 선출됐다. 그리고 1592년 스웨덴의 왕좌를 상속받아 신분의회에서 제시한 조건, 즉 스웨덴을 루터교 국가로 남긴다는 웁살라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해 1594년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시기스문드 3세 바사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신의 은총에 의해 폴란드의 왕,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프러시아, 마소비아, 사모기티아, 리보니아의 대공, 스웨덴과 고트족, 반달족의 세습 국왕 시기스문드 3세.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자리도 상속받는다.
그러나 시기스문드 3세가 가톨릭을 유지하고 폴란드에만 있다 보니 스웨덴에 대한 국정장악력이 떨어져 삼촌 카를 공작에게 왕위를 축출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국왕은 스웨덴 왕실군과 귀족군, 폴란드군과 용병들을 이끌고 스웨덴에 상륙했으나, 1598년 9월 스통게브로에서 패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동군연합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결국 1599년 7월 스웨덴 국왕에서 폐위 당한다. 삼촌 카를은 스웨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다가 정식 국왕 카를 9세로 즉위한 것은 1604년이었다. 시기스문드는 스웨덴 왕좌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후 70년 동안 폴란드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인 원인이 됐다.
“잉그리아 지역을 빼앗아서 스웨덴이나 폴란드 아무 쪽에라도 줬으면 좋겠소. 루스 차르국이 바다를 이용하지 못하게 말이오.”
“루스 차르국뿐만 아니라 잉그리아 영토를 받는 반대편에서 극심하게 반발할 것입니다.”
“스웨덴 인간들은 핀란드나 게워놓지 말이오.”
아쉽게도 이 시대에 스웨덴에 속한 핀란드가 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북방십자군에게 이교도라고 학살당하고 스웨덴의 일부로서 스칸디나비아 3국의 칼마르 동맹에 참가하기도 했다. 지금은 핀란드 전체가 스웨덴 영토였다.
“폐하께서는 혹시 칼마르 전투에 개입하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현재 스웨덴의 카를 공작이 시기스문드 3세 국왕에게 충성하는 칼마르를 공략하고 있습니다.”
“고산국이 외국의 내정에 개입할 이유가 없소. 뤼벡과 한자 동맹 도시들은 앞으로 군사적 색채를 덜어내는 편이 좋겠소. 무역 이익을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것은 결코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오.”
스통게브로 전투를 끝으로 시기스문드 3세의 군대와 함대는 폴란드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국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지역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바사 왕조와의 인연이 있는 귀족이나 스웨덴에 아직도 소수 남아있던 가톨릭교도들은 카를 공작에게 끝까지 저항했다.
그 중심이 욀란드 섬 건너편의 칼마르였고, 카를 공작이 5월 초부터 공격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5월 중순인 현재 전투는 이미 끝났을 것으로 예상했다.
칼마르를 마지막으로 카를 공작이 스웨덴 전역을 장악했으나 이것이 스웨덴의 내정 안정을 확보해주지는 못했다. 왕위찬탈자라는 악명이 카를 공작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카를 9세는 물론 그의 후계자들은 국내 정치의 불안정, 끊임없는 시기스문드 3세의 복위 운동, 폴란드의 침공 위협, 신교도 국가에 대한 가톨릭 국가들의 간섭에 계속해서 시달려야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시의원들이 이민호 앞에서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반드시 동조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한자 동맹의 군사적 영향력이 쇠해지고 국가의 힘이 커진 지금 자유 도시 몇 개만의 힘으로 나라를 굴복시킬 단계는 지났다.
대영제국이나 네덜란드를 봐도 알겠지만 제국주의는 그다지 이익이 되지 못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던 동인도회사들은 막대한 부채를 지다가 결국 국가 기관에 흡수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그 국가에 대한 식민지 주민들의 원한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ㅜ.ㅠ
한 회 쓰는데 최소 여섯 시간씩 걸립니다. 자료가 많이 필요한 부분을 넘어가면 좀 더 이른 시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