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9 62. 덴마크와 발트 해 =========================================================================
이민호는 실수로 사고를 쳤다가 결혼식장에 끌려가는 신랑처럼 질질 짰고, 민영은 그런 이민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민영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제가 설득한다고 해서 혜영님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크윽!”
정부를 책임진 혜영은 어느 정도 납득하더라도 아직 첫날밤을 함께 보내지 못한 혜진은 몹시 싫어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침전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화가 치솟은 혜진이 이민호를 쫓아내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폐하!”
“왜, 왜 그러시오, 공주?”
“서인도회사를 잘 키워보겠어요. 제가 폐하의 반려로서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낼게요.”
그러나 헤드비히 공주가 아무리 사업을 잘하더라도 이민호에게 반려자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헤드비히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대는 잘 해낼 것이오. 아이슬란드의 여왕이여.”
비록 명목상의 여왕이라도 대관식 하나만큼은 화려하게 해주기로 약속했다. 아이슬란드의 모든 귀족과 주민들을 데려와서 덴마크에서 한 번, 북미에서 한 번, 아이슬란드에서 한 번 대관식을 하면 다들 없던 충성심이 생길 것으로 믿었다.
헤드비히는 이민호와 결혼하게 되면 후궁이 아니었다. 고산국 속령 아이슬란드 왕국의 여왕으로서 배우자가 이민호가 되는 것이다. 물론 총독이나 관리를 보내 아이슬란드를 통치할 예정이므로 헤드비히가 직접 아이슬란드를 다스릴 일은 없었다. 헤드비히는 덴마크나 북미 새원산 혹은 새강릉의 별궁에서 거주할 예정이었다.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피곤해진 헤드비히는 먼저 침소로 향했다. 약혼자인 이민호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만찬장에서는 밤늦게까지 영토 할양 조약 협상이 진행됐다.
말로는 단돈 3파운드에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넘긴다지만, 이 시대의 백성들과 후대의 역사가들을 납득시켜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고산국과 덴마크의 혼인 동맹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취득하기 위해 영토를 외국에 넘긴 행위로 인해 자칫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비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섬의 가격을 각각 100만 파운드로 설정하고, 대금은 앞으로 설립될 서인도회사에서 이민호가 받게 될 배당금으로 매년 나눠서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서인도회사가 망할 경우 이민호나 고산국 정부가 대금을 갚아야 할 의무가 없다고 아예 조약에 명시했다.
결국 두 섬의 가격만 2백만 파운드지, 실제로 이민호가 지출한 것은 서인도회사 자본금 10만 파운드밖에 없었다. 단위는 은 무게가 아닌 잉글랜드 파운드라서 이민호 입장에서 별로 큰돈이 아니었다.
나머지 영토 할양에 따른 후속 조치는 관리들에게 맡겼다. 행정과 공공재산의 인수인계, 희망자에 한해서 본국 송환, 외국과의 조약이나 채권, 채무 승계 문제 등등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미 결정했기에 이민호와 크리스티안 4세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지금은 관리들이 조약문 문구 수정과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매제!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겠네.”
“그, 그러십시오.”
“자네도 말을 편하게 하게나. 우리 동갑이지?”
“그러지. 나도 1577년생 맞아.”
크리스티안 4세가 졸지에 이민호의 손위 처남이 됐다. 그러나 촌수가 꼬이더라도 나이가 비슷하면 형제처럼 지내는 유럽 왕실답게 서로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신선들 밑에서 7년 세월을 보낸 것은 남에게 말할 수도 없고,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덴마크 국왕이 훌륭한 군주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30년 전쟁에 휘말려 패배하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단의 영토와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빼앗긴다. 이민호는 모르는 사실이었고, 이번 혼사 때문에 앞으로 전개될 일들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작센 선제후 크리스티안 2세가 비키에게 연서를 자꾸 보내던데 아주 꼴좋게 됐어. 작센-바이마르 공작에게 섭정을 맡긴 어린놈 주제에 감히 내 여동생을 노리다니.”
원래 역사에서 헤드비히 공주는 2살 연하의 5촌 조카, 작센 선제후 크리스티안 2세와 1602년에 결혼한다. 결혼생활 10년 만에 자식 없는 과부가 된 헤드비히는 작센을 위해 많은 일을 하다 죽는다. 독일 땅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센이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헤드비히의 공이었다.
“쾨벤하운에서 베르겐, 페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뉴펀들랜드와 새원산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만들어야 하네. 물론 고산국의 거대한 수송선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덴마크 범선들도 대양 항해를 충분히 할 수 있네.”
“범선을 사용해야 한다면 일반적인 대서양 항로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
“북적도 해류를 타는 것? 비스케이 만과 아프리카 서해안에 들끓는 온갖 국적의 해적선들 때문에 피하는 게 좋아.”
해적선들이 고산국 상선에 달려왔다가 국기를 확인한 다음 식량을 거래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린다는 이야기는 이민호도 듣고 있었다. 해류를 이용하기 위해 덴마크 상선이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남하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중에 상황을 봐서 돛 안 달린 고산국 상선 몇 척을 서인도회사에 빌려주겠네. 물론 항해와 기관은 우리 쪽에서 맡겠네.”
“오! 그럼 더욱 좋지. 그런데 런던을 경도 기준점으로 잡은 이유가 뭔가? 자네는 잉글랜드를 무척 경계하는 모양이던데 말이야.”
고산국 함대가 북유럽 어부들에게 나눠준 것처럼 덴마크에도 대서양 해도를 공개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런던이 경도 0도가 되는 것에 주목했다.
“고산국 영역을 기준점으로 잡으면 영토가 동경, 서경으로 나눠져서 귀찮아지잖아? 그래서 남의 영토를 기준점으로 삼았지.”
“고산국 경도를 사용하게 된다면 잉글랜드 놈들이 가장 불편하겠군.”
“그렇겠지. 그런데 크론보르 성에서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상선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것 있잖아?”
“응. 덴마크의 돈줄이지. 왜?”
라인 강에 영주들마다 성을 세우고 지나가는 배에 대포를 쏘아 세금을 걷는 관행이 아직도 있었다. 육로로 영지를 통과할 때 영주가 통행세를 받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와 똑같은 짓을 덴마크에서 한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예멘의 이맘은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이 감당 못할 정도로 세금을 이중삼중으로 걷어서 문제였지 영토 주변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예멘 총독부가 같은 명목의 세금을 받는 것에 대해 이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에게서 통행세를 받는 것이 관행인 건 잘 알겠어. 하지만 발트 해 연안 국가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싫어하면 어쩔 건데? 전쟁이라도 일으킬까봐서?”
크리스티안 4세가 불만이 있는 나라는 언제든지 덴마크로 쳐들어오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덴마크가 스웨덴하고 싸울 때 어땠어? 다른 나라들이 혹시 스웨덴 편을 들지 않아?”
“음. 그런 면이 있어. 덴마크가 너무 강해서 질투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확히는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서 말이야.”
“외레순 해협 건너편 땅을 스웨덴이 점령하길 기대하는 거야. 그래서 통행세를 안 내고 해협을 빠져 나가려고.”
“그렇다고 해서 국가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이 통행세 수입인데, 포기하긴 너무 아깝잖아?”
덴마크의 국가안보를 위해 통행세 수입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통행세 수입을 이용해 함대를 증강하고 육군을 개혁했다. 또한 노르웨이에만 도시 4개를 건설하고 있었다.
“한자 동맹 상인들에게 물어보니까 통행세가 지나치게 무거워서 덴마크에 불만이 많더라고. 다른 사업을 통해 수입이 생기면 통행세를 줄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나라를 적이 아니라 덴마크 편에 붙게 하는 일이니까 이것도 일종의 외교야.”
“흐음. 우리 동맹국 국왕폐하의 어명이니까 명심하도록 하지. 국가 지출을 줄이고 다른 수입을 만들어서 통행세를 연차적으로 줄이도록 할게.”
“동맹국이라. 친구가 생겨서 기쁘군.”
유럽에서 최초로, 비록 혈연으로 맺어졌다지만 명실상부한 동맹국을 얻었다. 처남인 덴마크 국왕은 이민호와 동갑이면서 혈기 왕성하게 국가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증강하며 탐험대를 후원하는 점에서 비슷했다.
온갖 지역을 약탈한 바이킹의 후예들이며 염소를 강간하고 개를 매춘상대로 삼는 자들의 나라인 덴마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 시기의 덴마크는 북유럽의 강자이며 발트 해의 패자였다.
고산국의 유럽 동맹국으로서 덴마크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나라도 드물었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배가 많아 협력을 유지하기로 약속했으나, 에스파냐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걸려 동맹관계를 맺기는 어려웠다.
이민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과 러시아를 덴마크를 통해 견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덴마크 국왕이 스웨덴 국왕을 겸하던 칼마르 동맹이 붕괴된 뒤부터 덴마크와 스웨덴이 지속적인 대립 관계에 놓이는 바람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러시아를 주제로 크리스티안 4세의 의견을 물었다. 덴마크 국왕은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루스 차르국 때문에 발트 해에 들어간다고? 루스 놈들이 고산국 국왕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나?”
“루스 차르국의 코사크 용병들이 우랄 산맥을 넘은 것은 알지?”
“작년에 시비르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들었네.”
“거기서 동쪽으로 쭉 가다 보면 고산국 영토에 도달하게 돼. 고산국 북쪽 영토는 땅이 넓은 대신 인구가 적거든.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 국경선을 지킬 방법이 없어.”
이민호가 고민을 털어놓자 크리스티안 4세가 참으로 간단명료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러기 전에 루스 차르국 따위 멸망시키면 안 되나?”
“어떻게?”
1만에 가까운 지상군 병력이 함대에 타고 있었으나, 지상전은 시간을 많이 끌 수도 있었다. 물론 고산국이 패배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러시아 농노들까지 일어나 지구전 양상으로 내몰릴 경우 겨울이 와서 나폴레옹 꼴을 당하기 전에 배 타고 튀는 것이 나았다.
“독일과 폴란드 놈들을 용병으로 5만이나 10만쯤 고용해서 루스 땅을 쓸어버리는 거야. 전리품과 포로를 개인 소유로 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걸면 고용 비용이 훨씬 적게 들 거야. 보통은 점령한 다음 그 땅을 지키려고 돈이 드는 거지, 주민들을 다 죽여 없앤 다음 퇴각할 거라면 그리 큰돈은 안 들어.”
눈밭에 널린 시체들과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용병들에게 겁탈당하는 러시아 여자들의 영상이 이민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정뱅이 러시아 남자들이 죽는 것은 별로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나 러시아 여자들이 겁탈당하는 것은 몹시도 안타까웠다.
“차마 그럴 수는 없지. 루스 차르국의 지배층에 압력을 가해서 영토 동쪽 경계선을 획정하려고 계획하고 있어.”
“우리는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토를 겨우 3파운드에 팔았는데 루스 차르국은 지금은 없는 미래의 영토를 비싸게 팔아먹겠군.”
“모르지. 어쨌든 그 일환으로 여기서 교역을 해야겠어. 모피를 좀 사겠나?”
“모피? 모피라면 언제든 환영하네. 아! 루스 차르국보다 모피를 싸게 팔아서 루스 놈들의 동방 진출을 방해하려는 목적이 맞나?”
크리스티안 4세가 워낙 똑똑해서 이민호의 의도를 금방 간파해냈다. 이민호는 조금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반드시 싸게 팔 필요는 없지. 물량이 많아지면 가격이 점차 내리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나?”
“좋아. 품질과 가격이 비슷하다면 매제의 것을 사주지.”
“혹시나 모피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덴마크의 이익을 보장하겠네.”
수송선 여섯 척에 실린 모피 여러 종류 수만 장 가운데 절반을 덴마크에 풀어놓았다. 나머지 절반은 발트 해 안쪽에서 판매하되, 팔지 못한 물량은 다시 덴마크에서 사주기로 했다. 상행이 실패했을 경우에도 매입해줄 거래처가 생겨서 든든해졌다.
“그럼 고맙지. 모피 말고도 상품이 여러 가지가 있지? 유럽 전체에 고산국 상품에 관련된 소문이 자자해. 좀 내놔 봐.”
“알았어. 덴마크 왕실용으로는 따로 진상하겠네.”
“자네 장사할 줄 아는군. 큭큭!”
아직 생기지도 않은 덴마크 서인도회사와 거래를 하기로 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완전히 내부자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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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끝났고, 다음 회에는 발트 해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자료수집은 하나도 못해서 걱정입니다만, 어떻게 되겠죠. ㅜ.ㅡ
자러 가느라 리플은 다음에 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