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8 62. 덴마크와 발트 해 =========================================================================
재위 10년이 넘어가는 현재 크리스티안 4세는 부왕 프레데리크 2세처럼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국왕은 부국강병을 위해 자원을 집중하고 상업과 기술을 천시하지 않았다. 덴마크에서 군사개혁과 경제개혁에 집중하는 동안 노르웨이에서는 은광과 동광을 개발하고 철광도 약간의 성공을 거뒀다.
국왕은 좋은 스승들에게 배운 외에도 스스로 공부를 많이 했고 독일어와 불어,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음악가들을 초빙해 궁전에서 음악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다만 마녀 사냥에 집착해 걸핏하면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을 고문하고 불태웠다.
문제는 크리스티안 4세가 지나치게 모험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가 직접 못 간다면 세계 곳곳에 탐험대를 보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탐사 실패로 북극 항로가 얼음으로 막혔다고 판단된 지금, 방향을 바꿔 이번에는 북극 바로 아래 북서 항로 개척에 나섰다. 그린란드 남쪽과 캐다나 북부 사이의 항로에 배를 보내 허드슨 만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티안 4세가 보낸 탐험대였다. 그리고 그린란드 내륙에 탐험대를 파견하고 조만간 섬 남쪽 끝에 식민지를 개척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고산국이 북미를 매입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처럼 캐나다 북동부 허드슨 만 주변을 개척했을 국왕이었다. 내버려두면 북미 영토를 두고 고산국과 꾸준히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이민호가 덴마크에 오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도 세운다고요? 고산국에서 귀국을 도와드릴 일이 있을 것 같군요.”
이런 사람을 적으로 두고 내내 골치를 썩이느니 같은 편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 크리스티안 남매에게 서인도회사 경영을 맡겨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라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재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네덜란드가 향신료 교역에 참가했고, 곧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참가하게 된다. 이들 나라에 비해 덴마크는 유럽에서도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남쪽 항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약점도 있었다.
“그렇습니다. 향료 제도에서는 딱히 상인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향신료를 판다고 하더군요. 유럽 국가들을 위해 고산국에서 정향과 육두구 무역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니 네덜란드 상인들처럼 덴마크 상인들에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먼 길이지만 잘해보시오. 에스파냐와 지브롤터 해협 통과 문제가 해결된다면 수에즈 운하로 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오.”
고산국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이익을 보장해주기 위해 향료 제도의 정향과 육두구 무역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책 덕택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덕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몇 년 후에 엉뚱하게 인도 남동부 지방을 식민지로 개척한다.
“고맙소. 에스파냐는 국왕부터 총신들까지 꽉 막힌 사람들이지만 돈으로 해결이 가능할 것도 같소.”
“그런데 그린란드가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소. 유럽 여러 나라 어선들이 그린란드 근해에서 대구와 고래잡이를 하고 있는데 제대로 통제를 해주지 않으면 자칫 대구와 고래의 씨를 말릴 우려가 있어요.”
“여러 사가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린란드는 북미 대륙에서 가깝더라도 확실히 노르웨이의 영토입니다. 비록 정착촌이 잠시 없어졌다지만 이번에 그린란드 탐험대를 보내 다시 세울 예정입니다.”
“끄응!”
이민호가 슬그머니 그린란드에 관해 운을 떼어봤으나 크리스티안 4세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북미 대륙에 딱 붙어 있는데도 그린란드는 확실한 섬이었고, 노르웨이인들이 개척한 기록이 많아서 북미 대륙에 속하는 섬이라고 이민호가 우기기도 어려웠다. 노르웨이인이 개척하고 거주했어도 실제 역사에서는 19세기에 덴마크 영토로 변경된다.
10세기 이후 노르웨이인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실제로 덴마크 왕실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아이슬란드는 운도 떼지 못했다. 그린란드는 현대에도 제대로 개발을 하지 못한 혹한의 땅이었다. 온천 말고는 자원이 없는 아이슬란드도 그다지 좋은 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캐나다와 시베리아를 이어 북극까지 차지해서 효율적인 영토 방어를 노리는 고산국 입장에서 중간에 그린란드는 눈엣가시였다. 가까운 아이슬란드에서 끊임없이 그린란드로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다.
“작년에 관리들을 통해서 고산국왕께서 페로 제도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수시로 쳐들어오는 해적들 때문에 골치 아픈 섬을 누가 사려나 했더니 역시 고산국왕이셨구려.”
“앞으로 강력한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잉글랜드보다는 멀리 떨어진 우리 고산국에 넘기는 게 덴마크에도 유리할 것이오.”
그 동안 잉글랜드에서 페로 제도를 사지 않은 것은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말고는 그 섬을 살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배짱을 부린 것이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만간 스코틀랜드와 합쳐서 연합왕국이 될 계획을 진행 중인 잉글랜드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페로 제도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차대전 때 덴마크가 독일에 항복하자 영국군이 즉시 페로 제도를 점령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페로 제도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어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으면서도 난류 때문에 섬 주변 바다가 얼지 않았다. 페로 제도는 어민들에게 좋은 항구와 휴식처가 될 수 있었다.
페로 제도를 약탈하러 가는 진짜 해적은 드물었고 유럽 어민들이 잠시 해적화한 것에 불과했다. 항구에 제대로 된 방어시설과 어민들을 위한 편의시설, 그리고 시장을 갖춘다면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어민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줄 수도 있었다.
“휴우~ 우리 데인인 조상들은 잉글랜드 야만인 따위에게 밀릴 줄은 생각도 못하셨을 것이오.”
바이킹이 잘 나갔을 때 데인인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했고, 아일랜드와 웨일스에서도 목 좋은 해안도시는 죄다 바이킹이 차지했었다. 그러나 지금 잉글랜드에서 데인인은 소수 인종으로 전락하고 아일랜드와 웨일스에서는 스완지처럼 지명으로 조금 남은 외에는 형체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기에 페로 제도와 아이슬란드에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도 이들 아일랜드와 브리튼제도에 건너갔던 바이킹들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노르웨이 본토인들이 더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페로 제도는 노르웨이 영토이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실의 직할령으로 알고 있소. 매매대금은 얼마로 책정하시겠소?”
“페로 제도 판매대금은, 비키를 구해준 것에 더해 진주와 보석으로 잔뜩 치장시킨 것으로 지불한 셈 치겠소. 페로 제도는 왕실 직영지니 내가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오.”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를 살폈다. 이제 봤더니 페로 제도를 몸에 걸치고 다니는 여자였다.
“뭐, 뭘 그렇게 보세요?”
“예뻐서요.”
“꺄앗! 나 몰라!”
헤드비히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왕비로 들일 수 없다는 말이 기억났는지 갑자기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고산국에 정식 왕비가 없다고 들었소. 우리 비키가 자격이 딸리지는 않는 것 같소만. 비키! 너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내가 언제요!”
헤드비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이민호와 눈길이 마주치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귀엽고 능력이 좋은 처녀임에는 분명했으나 이민호의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돌봤고, 함께 나라를 세운 여자가 있소. 말로는 더 좋은 여자를 정식 왕비로 들이라는데, 나는 그 여자 아니면 왕비를 둘 생각이 없소.”
“오! 남자가 모름지기 이 정도 돼야죠. 비키! 네가 그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한 여자에게만 헌신하는 남자!”
“그런데 그 여자가 내가 아니라서 문제죠. 흥!”
“음. 문제가 좀 되겠구나. 하지만 고산국에는 고산국만의 사정과 왕실 법도가 있는 법이란다. 뒤늦게 나타난 네가 정식 왕비가 된다면 고산국 왕실의 기존 질서를 뒤집게 된다. 기존 왕실 식구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크리스티안 4세가 처음으로 오빠다운 충고를 해줬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잡고 꼬물거리던 헤드비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산국 왕비는 안 될래요. 고산국 국왕폐하의 후궁으로서 고산국 본토에 갈 일도 없을 거여요.”
“그럼?”
“고산국 국왕폐하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관심이 있어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설마 고래나 대구 때문만은 아닐 거여요.”
“그렇겠지.”
크리스티안 4세가 헤드비히의 말에 동의했다. 이민호도 고래를 멸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원한다는 말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국왕 두 사람이 아직 18세에 불과한 어린 공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헤드비히 공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빠!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고산국에 팔아주세요. 다만 제가 지분 일부를 가질게요.”
“뭐? 설마 왕국을 세워 네가 여왕이 되겠다는 뜻이냐?”
“그래요. 고산국 속령 아이슬란드를 세워 군주가 되겠어요. 명목일 뿐이겠지만요.”
헤드비히 공주가 몸에 걸친 장신구는 페로 제도였으며, 몸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였다. 스케일이 큰 헤드비히 공주의 제안에 놀란 크리스티안 4세의 턱이 떡 벌어졌고, 이민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영토가 왕실의 것만은 아니요. 다른 군주들과 달리 나는 영토가 백성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백성들을 위해 고산국과 좋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맞아요.”
한참 고민하던 크리스티안 4세가 입을 열었고, 헤드비히가 맞장구쳤다. 이럴 때는 남매가 잘 통했다.
“나는 개발하기 어려운 영토 때문에 고산국왕과 혈연으로 맺어질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소. 자! 한정 판매를 하겠소. 그린란드가 단돈 2파운드, 아이슬란드가 2파운드요.”
“제가 아이슬란드의 지분 절반을 1파운드에 사겠어요.”
헤드비히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섰다. 신교도 기사로서 성묘 기사로 서임 받은 배짱이 있는 공주를 너무 우습게 봤었다. 이민호는 꼼짝없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결정은 고산국왕께서 하시오.”
“아이슬란드의 귀족과 주민들이 이 결정을 받아들일지 모르겠소.”
“아이슬란드가 고산국 영토가 된다면 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오. 페로 제도에 대한 소문을 들은 아이슬란드 귀족들 사이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다음 고산국에 귀부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소.”
“으윽!”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그린란드만 2파운드에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지닌 헤드비히가 갑자기 절세의 미녀로 보였다. 거의 공짜로 광대한 영토와 공주를 얻을 기회였다. 이럴 때 국왕은 몸을 아끼지 말고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
고산국이 발트 해에서 상업 활동을 벌일 필요는 별로 없었다. 이민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러시아였고, 러시아가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를 차지해 고산국과 국경을 맞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발트 해 무역을 덴마크에 맡기고 그 시간과 자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3파운드에 그린란드 전부와 아이슬란드 절반을 사겠소.”
“만세!”
크리스티안 4세와 헤드비히 공주가 벌떡 일어나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단돈 3파운드에 팔아치운 국왕과 공주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들과 반대로 광대한 영토를 3파운드에 사들인 이민호는 식탁에 머리를 처박았다. 누가 봐도 이민호가 명백한 패배자였다.
“민영아.”
“네, 주인님! 울지 마세요. 주인님은 고산국의 미래를 위해 영토를 매입한 거여요. 절대로 공주님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혜영님을 설득할게요.”
“역시 너는 날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 작품 후기 ============================
왕이 몸 팔아서 영토 획득. 당연히 해야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