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87화 (536/1,000)

00587  62. 덴마크와 발트 해  =========================================================================

62. 덴마크와 발트 해

북미 새원산에 갔던 수송선 전단이 보름 만에 베르겐에서 함대에 합류했다. 베르겐과 암스테르담, 플랑드르 상인들에게 적당히 상품을 배정하고 3분의 2 이상을 남겨두었다. 덴마크와 나머지 발트 해에서 교역할 상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시아로 가는 동방 항로가 개척되고 대서양이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동안 북유럽과 발트 해 연안 중심의 한자 동맹은 계속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을, 정확히는 상인들과 상선들을 대서양 무역에 끌어들이는 것이 이민호의 장기적인 계획에 포함돼 있었다. 고산국 인구가 부족해 충분한 숫자의 상선을 바다에 띄울 수 없기 때문에 외국 배라도 많을수록 좋았다.

“네덜란드의 공동 지배자이신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여대공께서 폐하께 감사인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전해드리기도 전에 이렇게 다시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폐하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다시 표합니다.”

플랑드르 상인들이 이민호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이민호는 지난달에 에이모이덴에서 상품 일부와 보석 등 장신구를 결혼 축하 선물로 플랑드르 상인들을 통해 이사벨 공주에게 전달시킨 적이 있었다. 이사벨이 선물을 받고 급히 상인들을 보내 이렇게 감사 편지를 전달했다.

안트웨르펜을 포함한 네덜란드 남부는 현재 에스파냐 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북부와 달리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이었지만 에스파냐에 대한 감정의 골이 패여 있었고, 에스파냐와의 종교적 동질감보다는 북부와의 동질감이 더 컸다. 그러나 네덜란드 전체에서 인기가 높은 이사벨이 알브레히트 대공과 함께 공동 군주가 되자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신랑은 건강한 것 같소?”

“물론입니다. 얼마 전까지 대주교 직책에 계셔서 거시기를 제대로 쓸 줄 아는지 약간 의심스럽지만, 남자는 다 똑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사벨이 정치를 너무 잘해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분리시킨 원인이 됐다. 이사벨이 남부 네덜란드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면서 사람들이 에스파냐에 대한 원한을 다 잊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다음에 앨버트, 아니 알브레히트 대공 부처를 한 번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시오.”

“여대공 전하와 대공 전하께서 기쁘게 폐하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공주는 프랑스 국왕과의 면담을 주선해준 적이 있었다. 단 며칠 만에 몇 마디 말로 10만 리브르, 1만 냥 약간 넘는 황금을 중재 알선료로 챙긴 여자였다.

그 정도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뭘 해도 잘할 것 같았다. 이민호도 웬만해서는 이사벨 공주와 충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잘하면 남부 네덜란드에서 안트웨르펜이나 다른 항구를 빌린다든지, 여러 가지로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대는 베르겐 주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항구를 떠났다. 베르겐 중심가에 새로 짓고 있는 교회가 기초를 다지고 어느덧 뼈대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보통 몇 십 년, 심지어 몇 백 년 걸리는 일이 교회 건축이었지만, 풍부한 자금과 베르겐 주민들의 신앙심으로 단기간에 건설될 것 같았다.

함대에 탑승한 노르웨이 이주민은 3천 명이 약간 넘었다. 이들에게 뉴펀들랜드 섬과 새원산 동쪽 긴 섬에 각각 어업도시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대부분 어선 선주가 아닌 가난한 선원들이라 배를 소유한 자는 드물었고, 대서양을 건널 만한 큰배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북미에 도착하면 국가 소유의 어선을 장기간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어업에 종사시키기로 약속했다. 어째서 고산국의 5인승 어선이 노르웨이나 네덜란드의 15인승 어선보다 훨씬 큰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직접 배를 몰아보면 알 것이었다.

루터교 목사 두 사람과 그 가족들이 길 잃은 양떼를 위해 과감하게 이주에 나섰다. 로마가톨릭을 제외한 사제와 목사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월봉을 받는 대신, 교회 재정과 선교, 구호사업은 평신도협의회에 맡긴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받았다. 교회를 국가에서 지어주는 만큼,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뒤늦게 베르겐에 도착할 이주 희망자들은 고산국 상선이나 이민 전용 여객선이 실어 나르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북부와 아일랜드 서부에 암초지대가 워낙 많아서 항로에서 제외해야 했으므로 항해 기간이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후 늦게 외레순 해협에 도착했다. <햄릿> 때문에 영어권에서 엘시노어라 불리는 헬싱괴르의 크론보르 성은 바다 건너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헬싱보리와 4k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해협 양쪽 모두 덴마크 땅이었다.

덴마크는 1429년부터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외국 배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이 해협을 통해 발트 해와 북해를 왕복하는 한자 동맹 소속 자유도시나 발트 해 연안 국가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해협 양쪽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 통행세 수입이 덴마크 국가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 총함장이다. 관례대로 예포 15발을 쏘겠다. 국왕 좌승함과 호위전대를 제외한 전 함선은 요새의 예포 발사 순간에 맞춰 순차적으로 예포를 발사한다.

총함장 이순신이 무선통신을 통해 전 함대에 지령을 내렸다. 바로 몇 년 전까지 조선 수군에 있었을 때는 좌선과 중군선에서 깃발을 휘둘렀으나 최근에 신호통신체계가 급격히 발전했다.

외국 함대와 해안요새에서 교대로 예포를 쏘는 것은 인사를 겸해 비무장임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장전이 빠른 고산국 함선들에게 이 시대의 예포는 무의미했다.

- 퍼어엉~

- 쾅!

멀리 크론보르 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몇 초 후에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 즉시 함대 기함에서 예포 한 발을 발사했다. 고산국 함대의 함포는 탄두 없이 장약만 터뜨려도 포성이 화끈했다.

함대는 예포를 발사하면서 해협을 통과한 다음, 크론보르 성 뒤쪽 부두로 들어갔다. 고산국 함대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항구는 텅 비어 있었다.

“함장! 크론보르 성은 어떻게 보여?”

“사각형의 구식 수직 석성입니다. 바다 쪽은 양마장처럼 본성 외곽을 둘러 방어력을 보충하고 대포를 다수 배치했으나 빨간 벽돌로 쌓아서 포격 몇 방에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국왕좌승함의 젊은 함장은 항상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가끔 판단 실수도 했으나, 딱 함장에 걸맞은 책임만 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위로 줄줄이 있는 동안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내륙 쪽은?”

“내륙 방향에 해자를 팠으나 우리 함대 상대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해병을 상륙시키지 않고도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크론보르 성은 1420년에 중세 성곽으로 건설됐다. 1574년부터 10년 동안 대포 공격에도 강한 방어력을 갖는 르네상스 성곽으로 개축됐지만 고산국 함선의 강력한 화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배경이 크론보르 성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그다지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보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것뿐이었다.

“성문 위에 덴마크 국왕의 깃발입니다. 크론보르 성에 덴마크 국왕이 있는 모양입니다.”

“뭐, 우리가 베르겐에 있으면서 덴마크에 간다고 했으니까. 잘 됐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신하들과 호위병들을 이끌고 직접 항구로 마중 나왔다. 부두에 내린 이민호가 국왕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양쪽 호위병들의 기세 싸움이 장난 아니게 일어났다.

11세에 왕위를 물려받은 현재 22세의 국왕은 재위기간이 59년이 넘도록 왕을 해먹는다. 대관식은 19세가 된 1596년에 했다.

“우리 막둥이, 내 여동생 비키는 어디에 있습니까?”

“헤드비히 공주는 곧 나올 겁니다. 화장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지요.”

“했소?”

“뭘 말이오?”

크리스티안 4세가 느닷없이 의미 모를 소리를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기도 했다.

“몇 달씩 같은 배에서 침식을 함께 했다면서요? 했네, 했어. 이런 나쁜 남자가 있나! 우리 가녀린 비키를 후궁이 100명이 넘는다는 고산국왕이! 오! 신이여!”

“안 했소. 걱정 마시오.”

“뭐요? 그렇다면 내 여동생이 그렇게 매력이 없단 말이오?”

“매력은 충분히 있소만.”

“역시 내 여동생에게 흑심을 품었군요!”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대화가 오갔다. 딸바보나 동생바보나 상대하기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침 헤드비히 공주가 배에서 내렸다. 크리스티안 4세가 후다닥 달려가더니 헤드비히 공주를 껴안고 눈물을 쏟았다.

“비키! 나는 네가 해적들에게 잡혀 죽은 줄 알았다. 그 동안 너를 그리며 눈물로 지새운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란다.”

“오빠! 숨 막혀요!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에요!”

“넌 영원히 나의 꼬마 여동생이란다. 고산국 국왕에게 구조됐다는 소식을 듣고 더 걱정했다. 정말 아무 일 없었니?”

“아무 일 없었어요! 흥!”

헤드비히 공주가 냉기를 폴폴 날리며 크리스티안 4세를 밀치고, 이민호에게 도끼눈으로 한 번 째려본 다음 성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황급히 쫓아갔다.

“아무 일 없었군요.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소.”

“이래서야 여동생을 시집이라도 보내겠소? 다른 언니들은 대체로 14세에 시집갔다면서요?”

“나도 그게 걱정이오. 자! 덴마크의 돈줄 크론보르 성으로 초대하겠소. 함께 들어갑시다. 식사와 술을 하면서 우리 여동생이 얼마나 귀여운 신의 피조물인지 논의를 해봅시다.”

덴마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 설립과 운영, 발트 해 무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과 루스 차르국에 대한 공동 대응,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영토 귀속 문제, 북서방 항로 탐험 등 덴마크 국왕과 협의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국왕은 대화 시간 대부분을 헤드비히 공주에 대한 찬양으로 보낼 기세였다.

“전하. 또 제가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왜?”

이민호와 함께 크론보르 성에 들어온 국왕좌승함 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겉에서 봤을 때는 성이 꽤 컸습니다. 그러나 성 내부는 몹시 좁습니다. 성곽의 폭이 대단히 두껍다는 뜻이 됩니다.”

“성곽의 벽이 두껍다고 안 무너지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안쪽 출입문을 통해 성벽과 이어진 건물에 들어간 다음에는 이민호도 고개를 저었다. 성벽이 무지막지하게 두꺼웠다. 비록 수직 성벽이었으나 중세의 성이 아닌 르네상스 시대의 성이라고 부를만했다.

“흐음. 동인도회사는 설립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인도회사는 전혀 뜻밖이군.”

크리스티안 4세는 만찬장에서 의외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국왕과 공주의 대화를 헤드비히 공주의 시녀가 스페인어로 통역해주면 에밀리아가 다시 이민호에게 통역해줬다.

“제가 10만 1파운드,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10만 파운드를 투자하기로 했어요. 나머지 10만 파운드는 모험 항해처럼 주식 공개를 통해 자본을 모집할 거여요. 전문경영인을 들일 때까지 제가 운영을 맡을 계획이에요.”

“그 나머지 10만 파운드는 내가 내면 안 되겠니?”

크리스티안 4세가 느끼한 목소리로 공주에게 제안했다. 형제든 남매든 원수 사이가 되기 쉬운데, 참 특이한 오빠 동생 사이였다.

“오빠가 웬 일이세요? 제가 사업하는 것을 싫어하셨잖아요.”

“더러운 남정네들이 서인도회사 주주라는 이유만으로 너와 한 테이블에 앉으려는 흑심을 품을 것 아냐? 나는 그 꼴을 보기 싫다는 거지.”

“휴우~ 오빠는 동인도회사나 운영하세요.”

“잘못했어! 그냥 투자하게 해줘! 자본금을 40만 파운드로 늘리면 되잖아!”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였다. 초기 자본이 많을수록 사업을 빠른 시간 내에 정상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배는 내가 설계하마! 이건 반드시 내게 맡겨줘!”

“군함이 아니라 상선인 것을 명심하세요. 짐을 가득 싣고 대서양을 건너야 해요.”

“상선 설계 역시 내 특기지. 마스트 세 개가 아니라 두 개만 세우고 스퀘어 세일은 5단으로, 라틴 세일은 야드에 줄줄이 달아야지. 대포는 24문 정도가 표준이야.”

“상선이라고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대포는 양현 합해서 12문만 달자.”

“에휴~”

크리스티안 4세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수업을 받았고 평생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살았다. 덴마크 해군을 1596년 22척에서 1610년 60척까지 대폭 증강시키면서 배 몇 척은 크리스티안 4세가 직접 설계했다.

============================ 작품 후기 ============================

늦게나마 간신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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