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6 61. 대서양 =========================================================================
노르웨이 베르겐은 피오르 협곡 사이에 위치한 한적한 항구도시였다. 그런데 사실 베르겐은 이 시대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현대의 오슬로, 19세기 이전 이름 크리스티아나는 대화재가 발생한 이후 현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명령에 의해 재건된 다음 국왕의 이름을 따서 바뀔 예정인 도시였다. 그러나 아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고 이름도 바뀌지 않았다.
“베르겐은 항상 봄이네.”
“위도가 높으면 춥다고 하지 않았나요?”
베르겐 시청에서 이민호에게 언덕에 위치한 궁궐 같은 대저택을 내줬다. 덕택에 정원에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봄날 고양이처럼 늘어져서 지냈다.
키가 크고 몸매가 탄탄한 민영이 비키니 수영복만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함께 누웠다. 마치 현대의 연예인 화보를 보는 듯해서 이민호는 몹시 흐뭇했다. 다른 후궁이나 호위들도 비키니를 입고 쉬거나 정원과 부엌을 오갔다.
“따뜻한 해류가 흘러서 기온이 높은가봐.”
베르겐은 북위 60도 위에 위치한 고위도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멕시코 만류 덕택에 겨울에 눈이 거의 오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즐긴다는 일광욕은 이민호가 보기에 훌륭한 풍습이었다. 공원도 아닌 길 옆 집 마당에서 젊은 여자들이 속옷만 입고, 혹은 벗고 햇빛 아래 드러누운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덕택에 시내에 풀어놓은 젊은 병사들이 가자미눈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숱하게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병사들은 금발이나 백발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었다.
언어장벽에 더해 이 문제 때문에 더더욱 고산국 병사들은 군기가 잘 잡혔다, 혹은 목석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노르웨이 여자들이 고산국 병사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으나 아직 맺어진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폐하께서는 병사들에게 휴가를 자주 주시네요.”
“오! 헤드비히 공주. 어서 오시오.”
“비키라고 불러주세요, 폐하.”
같은 저택에서 지내다 보니 헤드비히 공주 일행과 자주 마주쳤다. 담요를 두르고 나온 헤드비히가 담요를 풀밭에 깔고 드러누웠다.
속옷도 안 입고 처음부터 알몸이었다. 덴마크에서 비키는 여자 이름 헤드비히의 애칭이 맞았다.
“주인님. 공주가 주인님을 유혹하려고 하나 봐요.”
“북유럽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도 자주 벗어. 목욕도 남녀가 같이 하잖아.”
헤드비히와 이민호 중간에서 스페인어 통역을 해주는 에밀리아가 귓속말을 했다. 그러나 북유럽 사람들의 풍습을 대충 아는 이민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공주와 목욕도 함께 했다. 함께 식사하는 것처럼 생활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로마의 공중목욕탕은 남녀 혼욕이었으며, 사치와 방탕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중세 유럽에서도 혼욕을 했으나 매춘 행위와 성병 감염으로 인해 목욕문화 자체가 쇠퇴하고 말았다. 현대 독일이나 핀란드의 사우나도 혼욕하는 곳이 많았다.
정원에 젊은 여자들 20여 명이 완전히 벗거나 거의 벗은 가운데 이민호는 눈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을 보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해군이나 원정군은 오랜 시간 좁은 배 안에 갇혀 지내야 하오. 병사들에게 가끔 이렇게 놀게 해줘야 그 괴로움을 버티지 않겠소?”
“폐하는 일반 병사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시네요.”
“다 사람이니까요. 그래야 실제 전투에서 더 잘 싸우고, 청년들이 해외여행이라는 장점 때문에 해군에 지원할 것이오.”
헤드비히 공주와 대화를 하다가 만 18세 9개월의 아청아청한 싱싱한 몸매를 자주 보게 됐다. 이 지역 인종이 그렇듯 몸은 벌써 예전에 성인이었다.
덴마크 공주와 귀족 영애들인 시녀들의 피부는 무척 하얀 편이었다. 공주만 조상 중에 외국 혈통이 자주 섞여서 갈색머리였고, 시녀들은 연한 금발이 대부분이었다. 한 명은 거의 백발이었다.
“통역관 김 대위는 어디 갔소?”
“비보르 자작 영애하고 같이 시내로 나갔어요.”
“능력 있는 장교인데 잘 만난 것 같소.”
다른 덴마크 시녀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김 대위는 비보르 자작 영애와 눈이 맞아 결국 결혼하기로 했다.
김 대위는 근무 시간 외에는 자작영애와 같이 성경을 공부하고 개신교 지역에 상륙할 때마다 함께 교회에 다녔다. 프랑스 위그노들이 정착한 플로리다 새부산 외의 다른 지역에도 개신교 교회를 지어줄 때가 됐다.
“폐하! 노르웨이에서 북미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 받아주실 건가요?”
“영주나 시청에서 승인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소.”
현재 베르겐에서만 가족 단위로 천여 명,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쳐서 2천여 명이 이민을 신청해 수송선에 탔다. 소문이 퍼지면서 이주 희망자가 더 늘어날 것 같았다.
유럽 국가에서도 금발은 드문 편인데 노르웨이인들은 전부 다 금발에 푸른 눈이었다. 바이킹의 후손답게 남자들은 덩치가 좋았고, 여자들도 발육이 좋은 편이었다.
이민자들은 주로 연어와 청어잡이 어업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그 동안 북미 동해안에 부족했던 어민을 보충할 수 있게 돼서 좋은 일이었다. 그들의 희망에 따라 농민이나 노동자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함대가 베르겐에 정박하게 해주고 이민을 자유롭게 보내주는 대가로 베르겐에 큰 교회를 세워주기로 약속했다.
베르겐에도 오래된 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바뀐 목조 건물들은 화재에 취약해서, 건축비가 많이 들더라도 석조 건물을 짓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베르겐에는 앞으로도 자주 들를 것 같아 화끈하게 자금을 풀었다.
“물론 전혀 다르지만 백성들을 약탈해가는 사라센 해적과 폐하의 함대가 결과적으로는 비슷해요. 통치자나 귀족 입장에서 보면 말이에요.”
“그런 비난이라면 감수하겠소.”
“비난은 아니에요. 앞으로 서인도회사가 사업을 시작하면 폐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발트 해 안으로 따로 고산국 상선을 보내지 않아도 될 테니 고산국 입장에서도 이익이오.”
대화가 끊겨서 고개를 들어보니 헤드비히 공주는 어느새 눈을 감고 얌전히 자고 있었다. 공주의 시녀들도 주변에서 알몸으로 눕거나 엎드려서 편안히 잠에 빠졌다. 마치 숲의 요정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아 이민호는 기분이 묘했다.
“마음에 들면 공주나 시녀들을 취하세요. 저들도 주인님을 원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좋은 구경했으면 됐지.”
이민호는 왼쪽에 민영, 오른쪽에 에밀리아를 껴안고 일광욕을 계속했다. 건너편 산꼭대기에 만년설이 쌓여 있고 피오르에는 푸른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수송선들이 돌아올 때까지 보름 정도를 베르겐에서 쉬었다. 아기자기한 목조건물이 늘어선 베르겐은 마치 고향처럼 푸근했다.
그 사이 공병대가 시청에서 불하받은 공터에 숙영지를 세웠다. 나중에 베르겐에 들르는 함대나 고산국 상인들을 위해 거주단지를 조성할 예정으로 그 기반 공사를 시작했다.
숙영지에서 머지않은 빙하호수에서 물을 끌어들여 상수도를 만들고 벽돌로 쌓은 2층 건물이 며칠 만에 만들어졌다. 순양함에서 생활하던 지상군 병력 일부가 숙영지에 주둔하면서 놀았다.
“노르웨이에서 외국에 수출할 상품이 없을까요? 지금은 물고기와 목재밖에 없어요.”
“조만간 석탄 소비가 많아질 것이오. 노르웨이에서 석탄이 발견된 곳이 많지요?”
이층 테라스에서 헤드비히 공주와 함께 차를 마셨다. 헤드비히 공주는 왕가의 후손답게 국력을 증가시킬 방도를 고민하고 백성들의 생활수준 향상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이민호는 석탄을 채굴할 때 광부들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등 기본적인 몇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수로에 가까운 것이 탄광을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도 강조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스웨덴과 공유하는 노르웨이는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서 수상운송이 절대적이었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려면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요. 고산국에서는 석유를 쓰잖아요? 노르웨이나 덴마크 주변에서 석유가 나지 않을까요?”
“노르웨이의 육지 지형에서는 석유가 나오지 않을 것 같소. 바다에서 석유를 뽑기에는 너무 깊소.”
대서양을 건너다녀야 하는 고산국 입장에서는 덴마크나 노르웨이에서 석유가 나와 주면 좋겠지만, 대륙붕 석유 채굴은 현재 고산국 기술로도 거의 불가능했다. 알제르나 북미에서 채굴한 석유를 유조선에 싣고 와서 노르웨이 남단 항구에 저장하는 식으로 항해 거리를 연장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칫! 노르웨이에서 석유가 나면 고산국 함대에 석유를 공급해주는 대신 고산국 함선에서 사용하는 기관을 달라고 하려 했어요.”
“헉! 미안하지만 기관은 국가기밀이오. 외국에 기관을 줄 수는 없소.”
현재 유럽 기술로는 기관을 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기관을 완제품 상태로 준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지금도 충분히 강한 덴마크를 북유럽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고산국은 발트 해 여러 나라와 친선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강국인 덴마크와 너무 가까워지면 오히려 고산국에 손해였다.
물론 이민호는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대서양 무역의 파트너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때문에, 덴마크는 다른 발트 해 연안국가들 때문에 협력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고산국과 네덜란드가 국혼을 추진하면 어떨까요? 부끄럽지만 저도 폐하의 반려로서 자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주는 훌륭한 신부가 될 것이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여자들이 많소. 그리고 만에 하나 공주가 내 신부가 되더라도 기관을 덴마크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오.”
“기관은 상관없어요. 하지만 덴마크는 고산국의 좋은 동맹이 될 수도 있어요. 제 몸은 어때요?”
헤드비히 공주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드러냈다. 통역관 김 대위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크고 아름답소. 하지만 공주 스스로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소.”
“저 너무 부끄러운데도 이러고 있는 거여요.”
“고산국에서 필요한 동안에는 덴마크와 친선을 유지할 것을 약속하겠소. 옷을 바로 입으시오.”
“으앙~”
헤드비히 공주가 울면서 테라스를 나갔다. 지켜보고 있던 민영이 이민호에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공주를 따라 나갔다.
이민호는 괜히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속이 불편했다. 지수와 지영이 이민호에게 핀잔을 주었다.
“처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인님을 유혹하려 했어요. 단박에 거절당했으니 분할 거여요.”
“뭐? 정원이나 목욕탕에서 자주 본 가슴인데.”
그러나 일광욕하려고 벗은 몸과 유혹하려고 드러낸 가슴은 의미가 달랐다.
“그래도 좋게 대해주지 그러셨어요? 덴마크 공주라면 주인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많이 도와줄 수 있잖아요.”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여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 이상 못하겠다. 플랑드르의 여대공 이사벨 클라라처럼 혼인관계 없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어.”
“주인님의 지난 행적과 저희들의 인생을 부정하는 발언이에요.”
지수와 지영을 비롯한 왕립여학교 출신 호위들은 기존 호위들과 달리 여진족 여러 부족장들의 딸이었다. 이민호가 필요에 의해 받아들였다기보다는 부족장들이 억지로 떠맡긴 것에 가까웠다.
“너희들은 다르지. 나하고 이미 운명으로 엮였으니까.”
“어머나!”
실내 호위 임무라서 둘은 얇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둘을 잡아당겨서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데 민영이 테라스로 들어왔다.
“아마도 공주님이 주인님을 짝사랑하신 모양이에요.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첫 고백치고는 아주 화끈하더군.”
“주인님이 가서 위로해주세요.”
“어떻게? 말로만?”
“몰라요. 그런 건 남자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이민호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며칠 후에 함대가 덴마크에 갈 텐데, 공주가 덴마크 국왕인 오빠에게 일러서 전쟁이 나게 할 수는 없었다.
공주의 침소에 남자 통역관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어서 에밀리아와 함께 공주의 방을 방문했다. 헤드비히 공주가 이불 속에 숨어서 흐느끼고 있었고, 덴마크 시녀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불편한 게 많아.”
이민호가 우는 여자를 제대로 달랠 능력은 없었다. 지난 삶에서도 남중과 남고, 공대와 군대를 나온 이민호는 연애경력도 3개월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 와서는 이민호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여자들이 줄줄이 입궁했고, 다들 알아서 이민호 앞에서 벅벅 기었다. 여자와 갈등이 일어났던 것은 해서여진의 동가공주 뿐이었다.
“헤드비히 공주.”
“왜욧!”
이불을 들추자 공주가 이민호를 노려봤다. 그러나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공주의 나이가......”
“이 나이에 아직도 시집 못 갔다고 무시하는 거여요?”
“아니오. 공주가 스무 살 넘어서도 나를 원한다면 그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정말요? 아! 일 년 삼 개월을 어떻게 기다리나요.”
헤드비히 공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공주의 두 눈에 하트가 뿅뿅 생겨났다. 그러나 이민호는 참으로 잔인한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이라도 좋다면 오시오.”
“뭐라고요? 당장 나가세욧!”
어째서 말을 할 때마다 공주가 화를 내고 에밀리아가 한숨을 내쉬는지 이민호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비 자리를 내주기에는 혜영과 혜진에게 너무 미안했다. 헤드비히 공주는 사흘이 넘도록 이민호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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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어색...
대서양 편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