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84화 (533/1,000)

00584  61. 대서양  =========================================================================

견시와 함장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함대 기함에서는 어떠한 명령도 내려오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대규모로 몰려온다고 해서 반드시 적 기병의 공격이라는 보장이 없었고, 함대 기함에서는 흙먼지 바람을 일으킨 자들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말을 타거나 마차를 몰아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천주교회였을 에이모이덴의 교회 종탑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릴레이로 종을 울려 고산국 함대가 도착했음을 상인조합에 알린 직후부터 상인들이 출발했다.

상인들이 에이모이덴으로 향하는 길을 가득 메우며 갓 파종이 끝난 밭을 짓밟으면서 돌격했다. 마차바퀴가 빠져서 말과 사람이 수레와 함께 나뒹구는 위험한 장면도 속출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에이모이덴까지 10km 거리를 급히 달려왔다.

“상인들이 저렇게 적극적이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곧 발트 해로 들어갈 계획이므로 상품의 판로는 네덜란드와 독일 내륙지역으로 제한했다. 그럼에도 암스테르담에서 달려온 상인들이 속속 경매에 참가하면서 낙찰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 기준으로 비싼 것이지, 이 지역에서 통용되는 상품 가격과 비교해 상인들이 손해 보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급품으로 인정받는 고산국 상품의 품질로 봤을 때는 절대 높은 가격이 아니었다. 고산국 왕도에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과 편안히 거래하면서 익숙해진 가격이 혼란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주인님. 상품 절반을 남겨둔 것은 원래 덴마크와 발트 해에서 팔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맞아. 작년에 여기서 대량으로 판매했으니까 그리 많이 판매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여기서 다 털릴 것 같아.”

안 좋은 예상은 거의 항상 들어맞았다. 이민호와 고산국 어용상인들은 발트 해에서 판매할 상품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적극 공략하자 그런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상인들이 매입 가격을 대폭 올려서, 혹은 눈물로 호소해서 물량을 조금씩 풀었다. 그러다 보니 수송선 화물적재칸에 쌓여 있던 상품 재고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당신은 치료부터 받아야 되겠습니다.”

“닥치고 내 돈을 받아! 그리고 상품을 내줘!”

마차가 넘어질 때 다쳤는지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상인이 군의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경매장으로 돌진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몰려오는 동안 사고가 많이 발생했지만 죽은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어떡하지? 빈 배로 발트 해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 이번에는 꼭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주인님. 이미 다 털렸어요. 향신료와 설탕, 비단과 옥 도자기, 차와 모피까지 하나도 안 남았어요. 면직물과 유리 제품까지 깨끗해요. 정향과 육두구, 모직물만 조금 남았어요.”

매년 네덜란드 배 20척이 향신료 무역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더 비싼 정향이나 육두구는 이곳에서 판매하지 않고 후추와 계피에 한정해서 판매했다. 그리고 자칫 네덜란드의 모직물공업을 붕괴시킬 우려가 있어서 모직물도 네덜란드에서는 판매하지 않았다.

“수송선 열 몇 척에 실린 상품이 한나절에 다 팔리다니. 무서운 곳이다.”

오랜 기간 발트 해 연안국들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담당하던 곳이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상선들이 리스본에 입항하지 못하도록 에스파냐가 막은 이후로 향신료 등 상품 구입처가 사라진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고산국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당연히 목숨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경매는 처음부터 에이모이덴 시장이 주관했다. 그러나 판매량의 1할이 세금과 중개수수료로 차곡차곡 쌓이자 이번에도 기절하고 말았다. 세금으로 받은 은이 한나절에 7톤이 넘게 쌓이면 작은 도시의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홀란트의 법률 고문 올덴바르네벨트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매장에서 상인들을 통제하던 제법 높아 보이는 상인을 불렀다.

“이보시오, 상인!”

“예! 폐하!”

암스테르담 상인조합에서도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람이 달려왔다. 상인조합의 고위 임원이라면 공화정에 가까운 네덜란드 특성상 암스테르담 시청의 정치가나 법관일 수도 있었다. 상인이 이민호에게 굽실거렸다.

“먼 나라 회사들이 요즘 몇 개나 생겼소?”

“원국(遠國) 회사가 암스테르담에만 열 개쯤 있습니다. 안트웨르펜이나 북쪽 테설에도 몇 십 개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코넬리스 하우트만과 프레데릭 하우트만 형제가 이끄는 범선 네 척이 향신료 교역에 성공한 이후 네덜란드 전역에 무역회사 설립 붐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역회사가 많이 생겼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자본은 일정한데 회사가 무수히 난립하자 배와 선원을 구하지 못해 향료제도로 가는 선단을 꾸리기 어렵게 됐다.

“왜 그리 많소? 합병해서 규모를 키우는 게 좋지 않겠소?”

“규모를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누구나 인정합니다. 하지만 상인들이 제 잇속 먼저 차리고자 합병을 거부합니다.”

동양과 무역을 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가 네덜란드에서 더 일찍, 더 많이 생겼다. 하지만 정작 향신료무역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회사가 잉글랜드보다 2년 늦게 성립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강력한 왕권이나 중앙정부가 없는 네덜란드에서는 상인들의 조합과 인적 구성이 비슷한 시청이나 주 정부가 구심점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시청과 주 정부가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대표하면서도,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상인들끼리 경쟁하는 문제에 한해서는 철저히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동인도회사가 출범하고 나서 그 자극을 받아 인수합병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한다.

“주식회사라는 게 혹시 네덜란드에 있소?”

“상인 학자들이 그 제도를 연구 중이고 지금도 일부 회사들은 소유권이 여러 명에게 분산돼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 모집이 교역 1회에 한하고 즉시 청산되는 단발성 주식회사가 아직은 더욱 일반적입니다. 재산 소유권이나 지분, 배당금 지불 문제가 옛날 로마시대의 푸블리카니(publicani)보다 명확하지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차차 개선되겠지요.”

“암스테르담 상인조합에서는 난립한 원국회사들을 합병하고 자본을 공개 모집해서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회사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다만 원국회사 소유주들의 반발이 거세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대 주식회사의 기원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회사 자본금의 지분을 증권으로 표시해 자본을 공개적으로 모집한 첫 번째 사례였다. 곧 증권거래소가 개설돼 주식이 자유롭게 매매됐으나, 아직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자본이 부족한 먼 나라 회사의 범선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소. 아시아로 가는 항로 주변에서 해적질을 해서 식량을 구하고 선원들 급여를 지급한다고 들었소.”

“황송합니다, 폐하.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혹시나 배 이름을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네덜란드에서 처벌하겠습니다.”

“해적질을 하는 상선은 해적선이오. 이미 고산국의 법에 따라 처리됐으니 네덜란드에서 수고할 것도 없소.”

“황송합니다. 만약 그 해적선이 암스테르담 선적이라면 암스테르담 상인조합에서 피해액을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도시 선적이면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그쪽으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향료제도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해적과 조난사고 등 갖가지 바다의 위험 때문에 선단도 대규모로 조직해야 했다. 그러나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항한 선단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중간에 돌아가거나 해적질에 나섰다. 한두 척 단위로 향신료 교역에 나섰다가 조난당한 경우도 흔했다.

그래서 자유경쟁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이민호는 동인도회사 같은 한 회사에 의한 향료교역의 독점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가 상선들이 자꾸 해적선으로 변하는 문제 때문에 의견을 바꿨다.

“상인들은 물론 시 정부와 주 정부, 그리고 총독까지 협의해야겠지만, 어서 무역회사 규모를 키우시오. 지금 이대로라면 향료제도로 보낸 배가 절반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그게 문제입니다만, 통합의 구심점이 될 만한 큰 회사가 없습니다. 상인들이 서로 욕심만 부리면서 합병되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또 있습니다.”

“뭐요?”

“지브롤터를 지나 지중해로 들어가려는 상선을 에스파냐 함선들이 임검을 해서 과중한 세금을 물리거나 못 내면 나포를 합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상선이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한 상선들은 난파당하는 사고가 매우 잦습니다.”

에스파냐의 지브롤터 함대가 항상 노는 것만은 아니었고, 이렇게 가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함대가 네덜란드 상선들의 지중해 통행을 막으며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사실 해적질과 비슷한 행위였다. 명목상으로는 적대국의 해적들로부터 에스파냐의 해안선을 지킨다지만, 예멘 이맘의 부하들이 한 짓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문제들이 있구려. 합병에 구심점이 될 만한 회사가 없다는 것과 지브롤터 함대.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헉!”

금괴와 은괴가 가득 실린 상자들이 상인조합 대표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상품 판매대금이 아니라 이번 일을 위해 준비한 이민호의 개인 자금이었다.

“이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내가 개인적으로 출자하는 자본금이오. 회사가 설립될 때까지 당신이 내 대리인을 맡아주시오.”

“저를 믿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회사 소속 상선이 깃대에 태극기를 달고 다니면 에스파냐 함대가 감히 임검하겠다고 붙잡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상인의 인적 명세는 다른 과정을 통해 확인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 상인의 재산과 신용을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상인이며 시청 고위 관료였다. 그 상인을 고산국왕의 대리인으로 지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내 지분이 정확히 5할이 될 때까지 먼 나라 회사들을 합병하시오. 주식회사의 이름과 성격을 암스테르담 동인도회사나 홀란트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하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오나 멀리 계시는 폐하께 매년 어떻게 사업 보고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의 배로 가려면 고산국 왕도까지 1년 가까이 걸릴 겁니다.”

“회사가 설립된 이후부터 이사회와 주주총회가 열릴 때마다 대리인을 보내겠소. 내 대리인을 통해 매년 재무제표와 배당금을 새원산으로 보내시오. 앞으로 무역 사업이 활발해지면 대리인을 암스테르담에 상주시킬 수도 있소.”

실제 역사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체 무력을 가진 주식회사였다. 포르투갈이나 영국과 전쟁을 해서 향료제도에서 몰아내고, 인도네시아를 정복하여 식민지 주민들에게 강제적인 상품 작물 경작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회사였다.

이민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기 전부터 아예 직접적인 통제를 해버렸다. 처음부터 외국 자본 절반이 들어왔으나 이민호의 대리인으로 지목된 상인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렇게 큰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면 무역을 안전하고 대규모로 행할 수 있습니다. 폐하뿐만 아니라 자본금을 투자하는 네덜란드 상인과 주민들에게도 분명히 이익일 것입니다. 충심을 다해 동인도회사를 고산국의 좋은 무역 상대방으로 키우겠습니다.”

“고산국과 네덜란드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예 생기지 않게 됐다. 고산국 왕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후 홀란트 등 여러 주의 의회와 총독으로부터 50년을 기한으로 동양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부두에 모인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폐하. 위험하니 좌승함으로 들어가시지요.”

“늦게 온 자들이 불만이 많구려. 여기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 설립과 운영에 관한 지침이오. 수고 좀 해주시오.”

“믿어주시옵소서, 폐하!”

상품은 이미 바닥났다. 그러나 뒤늦게 도착했다가 물건을 사지 못한 상인들이 함대가 정박한 부두로 끊임없이 몰려왔다. 팔아달라고 밤새도록 눈물로 호소하는 암스테르담 상인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한 함대는 결국 야밤에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 함대가 북해에서 떠돌게 됐다. 답답해진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를 불렀다.

“어서 공주를 모셔드려야 하는데 덴마크 영토에 빈 배로 들어가긴 어렵소. 어떡하면 좋겠소? 다른 배로 먼저 모셔드릴까요?”

“저는 전하의 함대와 같이 가면 좋겠어요. 수송선을 북미로 보내고 그 사이 우린 노르웨이 베르겐에 가서 좀 놀아요.”

팔자 좋은 공주가 대안을 제시했다. 작년에 들렀던 한적한 도시 베르겐은 이민호에게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수송선 선원이나 수병들에게는 안됐지만 다시 한 번 대서양을 왕복하도록 했다. 특별히 상여금을 많이 주기로 약속하고 순양함 몇 척을 호위로 딸려 수송선 전단을 구성한 다음 새원산으로 보냈다.

새원산은 유럽과의 교역을 위한 중개기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또한 북미 모피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샛강과 그 지류 모호크 강을 타고 내려온 원주민들이 모피를 농기구나 곡식 종자로 바꿔갔다. 이민호는 새원산에 도착하면 수송선에 모피를 최대한 적재하라고 전단장에게 지시했다.

============================ 작품 후기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견제하느니 차라리 직접 운영을...

이런 마인드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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