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2 61. 대서양 =========================================================================
“전하! 부두에서 아일랜드 총독 에섹스 백작이 깃발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전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드디어 왔군. 오라고 하게.”
함장이 보고하자 이민호가 함교로 나왔다. 에섹스 백작이 이민호에게 집요하게 접근해서 짜증나지만 언젠가는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작은 배에 화려한 군복을 입은 높은 사람들이 잔뜩 타고 몇 안 되는 선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다. 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어떻게든 국왕좌승함에 접근하고 있었다.
“에섹스 백작이면 로버트 데버루 그 사람 맞죠?”
“오! 헤드비히 공주. 저 사람 알고 있소?”
덴마크 공주 헤드비히가 함교에 올라왔다. 공주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어느새 작은 티아라까지 쓰고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해적들에게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겨우 하녀복을 빌려 입었는데, 이제는 제법 공주 같았다. 역시 옷이 날개였다.
“잉글랜드의 예비 찬탈자에요.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시집간 큰언니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저 사람에 대한 험담으로 가득해요.”
로버트 데버루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인척관계를 바탕으로, 또는 옛 연인의 아들로서 여왕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여왕이 죽기 전에 잉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야망을 가진 자가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였다.
“그런데 진주목걸이는 어디서 났소?”
“민영님에게 빌렸어요! 티아라는 비앙카님 것이고요. 드레스는 승전 수당 받은 것으로 비단을 사서 제 시녀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됐어요?”
공주가 화가 난 듯이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아니, 뭐. 신경 좀 써줄 것을 그랬소. 미안하오. 내게 요청을 하지 그랬소?”
“민영님이 잘 챙겨주셨어요. 사실 부족한 것은 없어요.”
금은보석으로 만든 사치품이 없다뿐이지 나머지는 모자랄 것이 없게 받았다. 다만 화장품은 미백효과를 우선하는 고산국 제품이라 원래 흰 공주의 피부에는 살짝 어울리지 않았다. 화장을 제대로 하니 확실히 미인이었다.
곧 덴마크에 도착할 테니 공주와 시녀들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민영에게 부탁했다. 바로 그 날부터 장신구만 놓고 보면 공주는 여왕이 되고 시녀들은 공주가 되었다.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군의 사령관이 탄 배가 드디어 국왕좌승함에 접현했다. 사다리를 타고 국왕좌승함에 오른 에섹스 백작을 알현실에서 맞이했다. 아일랜드 총독이라는 높은 직위에 비해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아일랜드 총독의 시종장이 주도한 복잡한 의전 절차가 끝나고 이민호는 에섹스 백작과 독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이 독대지 백작의 참모들과 통역관이 주렁주렁 딸린 작은 회의였다.
“폐하! 우리는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합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유럽과 전 세계의 운명이 우리 두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폐하께서 운명을 회피하시는 바람에 제가 아일랜드에 와서 켈트 야만인들과 싸우게 됐지 않습니까? 이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뭔 소리가 했더니 잉글랜드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기가 왕으로 즉위하는 반란을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지난번에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에섹스 백작의 편지를 받은 기억이 났다.
“왕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군사반란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소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폐하. 잉글랜드에 로마의 군인황제 시대를 열고 싶은 마음은 저도 없으니까요. 제가 이끄는 군대도 왕위쟁탈전에 동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래서 민중이 직접 왕을 추대하는 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말이 민중에 의한 추대지, 그다지 평화적인 방법일 것 같지 않았다. 이 시대 잉글랜드에서 숱한 반란과 암살 사건이 있었다. 로버트 데버루도 1594년 의사 로데리고 로페스에 의한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음모 사건을 적발해낸 적이 있었다.
“민중봉기요? 반란을 일으키면 런던 시민들이 많이 참가할 것 같소?”
“당연합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스코틀랜드 촌놈에게 넘길 수는 없지요. 이것은 잉글랜드 귀족과 런던 시민들의 자존심입니다.”
충성스러운 민중들이 여왕의 인신을 말로는 보호, 실제로는 구금한 다음 여왕 주변의 아첨꾼들을 처단한다는 계획도 설명했다. 사법부에서는 베이컨이라는 음식 이름을 닮은 법관이 도와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백작이 잉글랜드 국왕의 자격을 갖췄는지, 외국인인 나는 잘 모르겠소.”
“지난 10년 이상을 사실상 제가 잉글랜드를 다스려왔습니다. 혈통이나 능력이나, 저만큼 자격이 있는 자도 없습니다. 다수 민중들의 지지도 확보했습니다. 제가 선언만 하면 런던은 바로 제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민호는 골치가 아팠다. 백작은 선거 전에 이미 당선된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정치인 같았다.
“내게 원하는 것이 뭐요?”
“제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잉글랜드에 위협을 가해주는 것입니다. 런던 수비군 병력이 런던에서 빠져나간 틈에 일을 도모하겠습니다.”
“일이 성공하면 내게 무엇을 주겠소?”
로버트 데버루는 잉글랜드의 외교권을 장악한 세실 가문과 몇 년 동안 투쟁하면서 외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많이 배웠다. 고위 귀족답지 않게, 원하는 게 있으면 상대방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우쳤다. 명나라, 오스만 제국, 에스파냐라는 이 시대 세 제국의 수준 미달 군주들과 달리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인재였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콘월 중에서 둘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다른 나라 아니오?”
“어차피 곧 한 나라가 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반란 예비 음모자들의 수장은 이민호에게 이용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손해 볼 일도 없으니, 당분간 에섹스 백작의 장단에 춤을 춰주기로 했다.
“알았소. 성공하면 아일랜드와 콘월을 주시오.”
“폐하라면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콘월은 유럽에서 전략적으로 무척 중요한 지역이지요.”
고산국에게 가장 나은 선택이며,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가장 적게 손해를 보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반란을 도와준 대가로 영토를 외국에 넘겨주는 자는 반란이 성공한 그 직후 또 다른 반란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시간만 있다면 잉글랜드를 내란에 휘말리게 하고 싶어 하는 이민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이걸 조약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오늘 합의를 문서화해야 하지 않소?”
“폐하께서는 충분한 신뢰를 가지신 분입니다. 구태여 문서로 남길 필요가 없습니다.”
영토를 외국에 넘겨주는, 에섹스 백작에게 불리한 내용을 문서로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민호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백작의 신용이 나만큼 되는지 모르겠소.”
“폐하께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제가 약속을 어길 일은 없을 테니 믿어주시고,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문서로 합의내용을 기록하지도 않으려 하면서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은 당연히 사기꾼이었다.
에섹스 백작이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합의사항에 없으니 들어줄 필요가 없다면서 거절했다. 백작이 투덜거리면서 곧 배를 타고 떠나갔다.
“저런 사람을 믿어도 되나요?”
“전혀 믿으면 안 돼.”
집무실로 돌아온 이민호에게 민영이 물었다. 아기 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민영의 모습이 조금 측은했다.
“그럼 왜 비밀협약을 맺었어요?”
“나중에 혹시나 기회가 되면 써먹으려고.”
이익이 된다면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척하면서 반란을 도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유럽에서 영토를 얻을 생각도 없었고, 에섹스 백작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실 에섹스 백작이 계획하는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었다.
이렇게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나 권력을 가진 자들 중에서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도 잉글랜드의 왕위를 얻기 위해 나라를 통째로 잉글랜드에 바친 사람에 불과했다.
영토가 국민이 아니라 왕가의 재산이 되는 시대였다. 사실 국민이라는 개념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겨레붙이라 해서 민족 개념은 동서양에 당연히 있었다.
“아일랜드 해방군에서 보낸 전령입니다!”
밤이 되면서 더블린 항 앞바다에 정박한 함선들 사이에 갑자기 작은 배가 나타났다. 각 함선 함장들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할 그 시간 당직자와 견시들의 원망을 한 눈에 받으며 전령이 국왕좌승함에 올랐다.
“의외로 잘 싸우고 있더군.”
“모든 것이 폐하 덕분입니다. 머스킷은 매달 2천 정씩 들어오고 있으며, 이것으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식량이 잘 분배돼 서쪽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도 굶어죽지 않게 됐습니다.”
전령은 스코틀랜드의 클레이모어보다 더 긴 칼을 등에 메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드러난 치마를 입고 맨발에 가죽 샌들을 신었는데 머리 모양은 완전 현대 드라마의 꽃미남 주인공처럼 생머리를 시간을 들여 다듬었다. 그렇다고 전령이 꽃미남인 것은 아니었다.
“백작이나 씨족장 중에 배반자가 있다며?”
“중립을 선언한 왕들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아직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해방군이 그들의 영토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아일랜드에는 해군이 없다. 기동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지. 지금은 병력이 우세해도 정규군이 아닌 이상 병력의 우위를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해.”
“해방군 사령관에게 폐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아일랜드 해방군과 잉글랜드 진압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것 같아 속이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진압군 사령관 에섹스 백작도 잉글랜드에게는 반란군 수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고 에섹스 백작의 반란을 막는다면, 잉글랜드 정치가들이 우수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쪽의 무능을 따져봐야 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게 돌아갔다.
“내게 원하는 게 있나?”
“해방군에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웬만한 것은 저희들이 자체적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저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려고 온 것뿐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압제에 맞서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8백년을 싸웠다. 가끔 성공을 이뤄냈으나 대체로 실패가 많았고, 10만 단위 이상의 학살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천 년 동안 나라 잃은 설움 운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훨씬 처절하게 싸우면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나는 권력자들을 믿지 않는다. 아일랜드의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귀족 출신인 전령은 잘 모를 것이다.”
“저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씨족장의 아들입니다. 당연히 일반 백성들의 고통을 파악해 해결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귀족 출신인 것은 어떻게 아셨는지요?”
“노를 저은 자들이 맨발인 것과 달리 너는 가죽샌들을 신었으니까. 그런데 씨족들의 분열은 문제가 되지 않나?”
“얼스터에 약간 문제가 있으나 대체로 괜찮은 상황입니다.”
전령은 박 주부가 걱정하던 것보다 훨씬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이민호는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됐다.
“이기고 있는 동안에는 괜찮겠지만, 불리하면 달라질 것이다. 반역자들의 움직임이 독립전쟁에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어. 반역자는 유리할 때 미리 제거해놓는 편이 좋아.”
“완전한 승리를 앞두고 자칫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아버님께 상의하겠습니다, 폐하.”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많은데 외국의 군주인 이민호에게 요구할 수도 없었다. 아일랜드에서 대가로 내놓을 만한 것도 없었다. 이민호도 그 사정을 이해했다.
“아일랜드에는 먹고 살만한 산업이 없더군. 곡물 경작도 북부에서만 가능하고 말이야. 나머지 지역에서는 양을 키우는데 겨우 입에 풀칠할 만한 정도지?”
“남부 코크에서만 잉글랜드 맥주를 매년 6만 배럴 넘게 수입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배를 곯으면서도 술은 마셔야 합니다. 이것만 봐도 아일랜드의 산업이 얼마나 뒤쳐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일랜드 해방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주지는 않겠다. 식량과 머스킷을 공급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해주었다고 본다. 그러나 돈을 벌 방법을 가르쳐주지.”
이민호가 전령에게 건넨 것은 시커먼 색깔의 맥주 한 잔과 얄팍한 책자 하나였다. 스페인어로 작성된 책자에는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기술이 설명돼 있었다. 위스키를 생산하는 현재 아일랜드의 기술로 맥주 양조장을 간단히 만들 수 있도록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아일랜드에는 아직 비미쉬나 기네스 같은 흑맥주가 생산되지 않았다. 포터나 스타우트는 18세기 이후에 영국에서 생산이 시작됐고, 아일랜드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산하면서 인기를 끌게 됐다.
“어? 맥주 맛이 아주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술 생산 여부가 아니라, 그 나라 백성이 즐겨 마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이 제대로 된 맥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면 잉글랜드로부터 맥주를 수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일랜드인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술을 못 마시게 만들 수 없다면 술 수입이라도 하지 않게 만들어야지.”
“이 정도 맛이라면 잉글랜드에서 맥주를 수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으로 기발하십니다. 양조사업이 잘 되면 독립전쟁을 명목으로 아일랜드인에게 세금을 걷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아일랜드 해방군은 국내에 술을 팔아서 만든 자금으로 독립전쟁을 하게 됐다. 일본처럼 여자를 팔아서 화약을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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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섹스 백작은 멍청이니까 그냥 넘어가시고...
술도 중요한 상품입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