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76화 (525/1,000)

00576  60. 레반트  =========================================================================

아흐마드 파샤가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리아 총독 직을 얻기 위해 이스탄불의 고위 관료들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래서 파샤에게는 아슈도드를 항구도시로 만들거나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이용할 도로와 숙소의 건설에 들일 자금이 부족했다.

이민호와 교황청이 지원하고 있었지만 파샤가 가자 지사 겸 예루살렘의 지배자로서 직접 자본을 투자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여기에 유대인의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 아흐마드 파샤가 시리아 총독이 된다면 예루살렘에 대한 보호를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아흐마드 파샤는 훌륭한 학자이긴 합니다만 정치적 야심이 너무 커서 저희들이 전쟁에 휘말릴까 걱정입니다.”

“파샤가 이스탄불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적나라하게 말하겠소. 나는 당신들이 아흐마드 파샤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야파 북쪽 지역의 땅을 얻어 자치를 하라는 뜻이오. 처음부터 면세지역으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오.”

“폐하의 말씀을 듣고 방금 저희들끼리 이야기해봤습니다. 그곳은 겨우 모래땅에 불과하다고 들었습니다. 농사도 짓지 못한답니다.”

텔아비브 지역은 지난번에 함대가 지나칠 때 대충 확인했었다. 밭도 없고 가끔 목동이 양떼를 몰고 지나가는 한적한 황무지였다. 아랍인이 사는 집도 거의 없었다.

“그렇소. 하지만 수량이 풍부한 강이 가까이 있으니 유대인들이라면 그곳을 충분히 낙원으로 바꿔 놓을 것으로 믿소. 상업과 금융업으로 유명한 유대인들이 농사지을 것도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곳을 유대인들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중에 구세주가 올 때에 대비해 이스라엘 건국의 기반을 닦아 놓으면 어떨까 싶소.”

“아!”

유대인들의 얼굴이 확 피어났다. 역시나 유대인들에게 구세주를 언급하면 뭐든 술술 풀렸다.

유대인 대표들이 잠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구세주라는 한 마디에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지 이민호가 오히려 더 걱정해줄 정도였다.

“그곳이라면 지중해 여러 도시와 무역도 하고 유대인만의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 건설할 유대인 도시의 이름을 폐하께서 직접 지어주시겠습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텔아비브라고 정하시오.”

“히브리어로 봄의 언덕입니까? 오래된 새로운 땅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폐하의 안목에 실로 감탄하겠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군요.”

이민호가 지은 도시 이름으로는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남이 지은 이름이기에 양심에 조금 찔렸다. 그래도 파괴된 도시에서 일어나 새로 짓기를 반복해온 유대인들에게 텔아비브는 최적의 이름이었다.

“앞으로도 폐하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스탄불과 지사, 총독으로부터 저희 유대인들을 보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곳에 올 일이 별로 없을 것이오.”

“직접 다스리지 않으시더라도 폐하의 위명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신 수입의 일정액을 세금으로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돈 때문에 부담을 지고 싶지 않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래도 텔아비브라는 이름이 유대인들의 감성을 크게 자극한 것 같았다. 유대인들이 이민호를 보는 눈이 처음 접견실에 들어왔을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휴! 골치야! 알았소. 도와주겠소. 앞으로 내가 레반트 지역 유대인의 보호자를 자임하겠소. 내 이름을 팔아도 좋소.”

“폐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나안 지역의 모든 유대인은 오스만 제국 황제의 백성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군주는 언제까지나 폐하이십니다.”

이민호가 낯을 긁으며 아흐마드 파샤를 불렀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대화한 지 얼마 안 돼서 쉽게 결론이 났다. 시리아 총독 자리와 아슈도드 건설로 인해 자금이 궁했던 파샤는 큰돈을 받기로 하고 유대인들의 청원을 들어주었다.

야파 북쪽의 모래밭과 황무지를 떼어 유대인 자치지역을 만들기로 문서로 약속하고 이민호가 중재자 겸 공증인으로서 고산국 국왕의 옥새를 찍어줬다. 유대인과 파샤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다.

도장 하나 찍어준 것으로 황금 몇 상자를 얻은 이민호도 만족했다. 물론 중재자의 책임도 막중함은 이민호도 잘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다시 이민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아흐마드 파샤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 덕택에 골치 아픈 유대인들을 한 곳에 몰아넣을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폐하께서 유대인들을 잘 관리해주십시오. 그런데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떻게 폐하를 설득했습니까? 폐하께서는 남을 책임지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휴! 파샤는 말도 마시오. 저렇게 집요한 인간들은 처음 봤소.”

유대인들의 1500년 한을 풀어준 이민호가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공병대와 건설장비 일부를 텔아비브로 돌려 항구와 도시를 건설했다.

항구는 주변 돌산 하나를 무너뜨려 만들었고, 평탄화 작업 위주로 도시 건설이 진행됐다. 당장 하수도가 필요 없는 지역이지만 하수도와 상수도, 그리고 전력선과 가스 공급선이 매설될 호를 깊이 팠다. 그리고 강 중류에 수원지를 만들었다.

그 다음 날부터 가자와 예루살렘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유대인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땀을 흘렸다. 이민호는 수에즈 북항에 연락해서 고산국 국영상단에게 천막과 식량, 건축자재를 텔아비브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텔아비브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민호는 유대인들에게 제2의 키루스 대왕, 기름부음을 받은 자 등의 별명을 얻었다. 이민호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고 넘어갔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6세기에 유대인들을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시켜준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그는 비 유대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자, 아슈도드, 텔아비브. 세 도시가 앞으로 치열하게 경쟁해야겠지만 서로 보완 관계이기도 해.”

“덴마크 공주님께 들어보니까 유대인은 참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천 년 넘게 나라 잃고 떠돈 사람들이잖아요? 주인님이 좀 도와주세요.”

민영이 하는 소리에 이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이민호도 현대 한국에서 어릴 때까지는 유대인이 불쌍한 줄 알았었다.

“유대인이나 텔아비브는 내년까지만 봐줘야겠어. 그 뒤로는 나도 몰라.”

현대에 살았던 이민호가 보기에 유대인은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이차대전 때 나치에게 당했던 짓을 고스란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아직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비난할 필요 없었다.

어느덧 4월 중순이 되었다. 아슈도드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 공사 1단계가 드디어 완료됐다. 밭 사이에 나 있던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마차 네 대가 다닐 만한 직선 도로로 넓게 확장된 것이다.

앞으로 납작한 돌이나 자갈로 길을 포장하고 가로수를 심으면 2단계 공사가 완성된다. 그것은 아흐마드 파샤가 인부들을 동원해서 할 일이었다.

“땅이 건조해서 흙먼지가 폴폴 날리지만 일단 길은 편해서 좋소.”

“어흐! 어흐! 그렇습니다.”

장갑차에 처음 타본 구호기사단 선임기사가 말하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이민호와 추기경, 아흐마드 파샤 등이 장갑차 보병탑승석에 탄 채로 도로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나 유대 산맥 서쪽에서 지중해까지 펼쳐진 평원은 어딜 가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죄다 밭이구려. 레반트 지역 같지 않게 풍요로운 곳이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막에도 가끔 풍요로운 오아시스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계곡에 들어서니 풍경이 확 달라졌다. 도로 주변 산에 폭약을 써서 절벽을 무너뜨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갑차와 기마행렬이 저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동쪽으로 달려갔다.

유대 산맥은 레반트 지역의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며 그 중간에 예루살렘이 있었다. 고산국 공병대가 확장한 도로는 로마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이 소유한 시온 산을 지나 예루살렘 시가지의 북서쪽으로 연결돼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 한가운데의 성전산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유대교의 최고 성지였다. 그리고 수니파 무슬림의 세 번째 성지가 있는 곳이었다. 성전산 위에는 바위의 돔이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고 돔은 노랗게 반짝였다.

예루살렘 주민이 아닌 것이 분명한 유럽인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모래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남루하지만 단단한 여행자 복장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용감한 순례자들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기독교도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방문을 멈추지 않았고, 맘루크 왕조든 오스만 제국이든 순례를 막지 않았다. 그런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성묘 성당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 사흘 만에 예수가 부활했다 해서 동방정교회에서는 부활 성당이라 불렀다.

장갑차에 탄 이민호는 추기경과 파샤, 구호기사단 선임기사와 함께 예루살렘 시가지를 구경했다. 외국 군대가 대규모로 진입했는데도 파샤의 병사들이 차분하게 교통 통제를 해서 그런지 예루살렘 시민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고산국 지상군의 행렬은 1555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새로 단장했다는 성묘 교회로 직행했다. 성묘 교회는 동방정교회와 프린치스코 수도회가 이스탄불 포르테의 결정에 따라 공동 혹은 교대로 사용할 권리를 가졌다. 그 권리는 두 교단이 이스탄불 고관들에게 바치는 뇌물 액수에 따라 결정됐다.

행렬이 도착하기도 전부터 성묘 앞에 중세 유럽식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붉은 십자가를 커다랗게 그린 흰색 튜닉을 걸치지 않고 갑옷도 싸구려였지만 이들이 진정한 성기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산국 국왕폐하. 성묘에 잘 오셨습니다. 저희들은 성묘의 수호자들입니다.”

“당신들은 혹시 성묘 기사단이오?”

“그렇습니다, 신의 도구가 되어주신 동방 제국의 폐하. 기적 같은 역사를 성공시킨 폐하께 축하드리며, 기사단원 전체가 폐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성묘를 지키는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민호는 이교도들의 땅에서 오래도록 성지를 지키며 갖은 고난을 겪었을 성묘 기사단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성지 순례는 끊이지 않았고, 무장한 기사들 대신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이슬람 정권의 허가를 받아 성묘를 지켰다. 바로 이 수사들 일부가 기존의 성묘 기사단에 가입해서 군사적 역할, 또는 성묘의 수호와 순례자들의 종교의례를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성묘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를 만나고 싶소.”

“그랜드 마스터께서는 내년에 오실 예정입니다.”

“멀리 출장 가셨소?”

“원래 계셔야 할 자리에 계십니다. 성묘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는 바로 로마에 계신 교황 성하이십니다.”

“어허! 기사단에게 상을 내려줄까 했는데, 차마 교황 성하께 상을 드릴 수는 없겠구려.”

대신 성묘 성당에 헌금을 하고 성묘 기사단에도 운영비로 쓰라고 기부금을 냈다. 내년에 성지 순례자들이 대거 몰려오면 궁핍했던 기사단의 재정상황도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대신 기사단이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아질 것이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이셨던 프레데리크 2세의 딸 헤드비히가 성묘 기사단의 기사 서임을 원합니다!”

헤드비히 공주가 어째서 갑옷을 입고 왔나 했더니 성묘 기사단의 기사 서임을 노리고 있었다. 성묘의 수호자, 성묘 기사단 선임기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200여 년 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 폐하도 바로 이곳 성묘에서 기사 서임을 받으셨지요. 하지만 교황 성하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제가 기사 서임을 해드려도 무효랍니다.”

발데마르 4세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서 비난을 받은 것은 국왕이 교황의 허락 없이 성지 순례를 했기 때문이지 성묘 기사단의 기사로 서임된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국왕으로서의 지위가 불안했던 발데마르 4세는 성묘 기사단의 기사가 됨으로써 국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크게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헤드비히 공주는 기사 서임 자체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저는 교황과 상관없는 신교도라구요!”

“바로 그게 문제지요, 공주님. 성묘 기사단은 교황 직할 기사단이랍니다. 교황 성하는 신교도라 자칭하는 이단들이 구교도라 비난하는 로마가톨릭의 수장이시지요.”

헤드비히 공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성묘 기사단에게 헤드비히 공주는 왕족이 아니라 그저 이단일 뿐이었다. 중세 이후 기사도는 종교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기에 이단에게 기사 서임을 해줄 리가 없었다.

너무나 분해서 울먹거리는 공주를 위해 이민호가 나섰다. 물론 헤드비히 공주에게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할 수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 레반트 편이 끝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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