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5 60. 레반트 =========================================================================
이민호는 건설 중인 아슈도드 신항에 정박한 국왕좌승함에서 항구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도로 건설을 지휘했다. 그리고 이민호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흐마드 파샤와 아르노 도사 추기경이 합의를 통해 건설 계획을 세웠다.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아슈도드 항에서 내린 순례자들은 예루살렘까지 약 60km 거리를 이틀에 걸쳐 도보로 가야 했다. 그러나 항구에서 예루살렘까지 마차를 타고 간다면 기간이 절반 이하로 단축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마차 운송을 제안했으나, 두 사람이 반대했다.
“폐하의 하명처럼 마차 역참을 만드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순례자들이 부활절에 한꺼번에 몰려올 테니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이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파샤.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은 말이나 마차에 타는 것보다는 성지까지 걷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 숙소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순례자들이 부활절에 집중 방문한다고 파샤가 반대해서 이민호는 아슈도드에서 예루살렘까지 아예 철도를 놓을까 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한 말을 듣고 그 생각을 접었다. 어느 종교나 그렇듯 순례자들은 성지까지 걸어가는 것을 선호했다.
아흐마드 파샤와 아르노 도사 추기경이 지도상의 한 점을 찍는 곳이 앞으로 아슈도드와 예루살렘의 중간 도시가 될 예정이었다. 이민호는 파샤와 추기경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려서 사귀냐고 농담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슈혼이 좋겠군요. 주변에 저수지가 있습니다. 이 마을의 농민들은 제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겠습니다. 물론 토지와 이주비를 충분히 지급해서 보상을 해주겠습니다.”
“파샤 덕택에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습니다. 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심어야겠습니다.”
“햇볕이 강하니 유실수보다는 그늘을 넓게 드리우는 품종이 좋겠군요. 유대 산맥에서 적당한 나무를 골라서 옮겨 심겠습니다.”
두 사람의 기획력과 고산국 공병대의 추진력으로 순례자들을 위한 도로와 편의시설이 빠르게 결정되고 건설됐다. 이민호는 두 사람을 영입해서 북미의 신도시 개발을 맡기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치안이었다. 구호기사단 선임기사를 불러서 세 사람이 함께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순례자들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합니다만, 이들이 오히려 산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선임기사 사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요즘에도 순례자로 가장한 일부 무뢰한들이 강도질을 하거나 사고를 치는 바람에 아랍계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파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슬림인 파샤가 아니라 구호기사단의 선임기사와 추기경이 한 말이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무슬림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과장한 교황 우르바노 2세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발언이었다.
레반트 지역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십자군 전쟁이란 유럽의 정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자행된 파렴치한 침략전쟁이었다. 또한 약탈과 학살로 점철된 야만행위였다. 내년에도 일부 불순한 성지 순례자들이 십자군 운운하며 소요사태를 일으키거나 성지 수복을 하자고 선동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구호기사단과 제 부하들이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슈도드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도로의 일정 거리마다 구호기사단과 제 병력을 함께 주둔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다만 교황 성하의 호위는 더욱 완벽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두 문명권을 공멸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저희 구호기사단도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여전히 이민호는 할 말이 없었다. 고산국은 로마가톨릭과 이슬람 양 세력의 화해를 주선하고 합의를 보증하는 역할에 그쳐야 했다. 어느 쪽 신도도 아닌 이교도로서 둘 사이에 가장 적합한 중재자이기도 했다.
파샤와 추기경 등이 회의하는 동안에 집무실로 내려간 이민호는 예루살렘 관련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아르노 도사 추기경은 물론 아흐마드 파샤가 보낸 정보가 큰 도움을 주었다. 집무실에서 공부하는 이민호에게 파샤가 따로 보내준 무슬림 학자가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해주었다.
“예루살렘 남동쪽이 유대인 구역이군요.”
“서기 135년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잔해 위에 10군단의 주둔지를 건설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 구역의 시작입니다.”
예루살렘이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후 1538년 쉴레이만 대제 때 성벽을 쌓은 안쪽 시가지는 현재 네 구역으로 분리돼 있었다. 예루살렘의 지도를 살펴보면서 학자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이곳에 몰려 살고 있단 말이오?”
“유대인 구역의 건물들은 대개 아랍인 재산가들이 소유하고 세를 내주고 있어서 이 구역 전체에 유대인들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성 바깥 황무지 쪽에 새 건물을 세우는 편을 선호합니다. 유대인 구역 북쪽 무슬림 구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습니다.”
두 번 파괴되고 23번 포위되고 52번 공격받고 점령과 탈환을 44번 당한 예루살렘의 역사는 실로 파란만장했다. 예루살렘 거주민들도 꽤나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네 구역으로 나뉘었지만 학자가 설명한 것처럼 명확한 인종 및 종교 구분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슬림 구역, 아랍인 기독교도 구역, 유대인 구역은 대충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구역은 뭡니까?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동쪽 사람들인데 도대체 언제 예루살렘에 왔습니까?”
이민호는 불쌍한 약소민족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한두 세대 전에 예루살렘에 노예로 끌려왔다가 정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르메니아 제국의 티그라네스 2세가 즉위한 기원전 95년 예루살렘 주변에 아르메니아 병사들과 상인들이 처음 정착했습니다. 아르메니아가 파르티아를 무찌르고 티그라네스 대왕이 셀레우코스 시리아의 왕좌를 차지한 기원전 83년 이후 로마 공화정 때......”
학자에게서 골치 아픈 이야기가 이어지려 할 때 민영이 이민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더 골치 아플 일이 생겼다.
“예루살렘과 가자에 거주하는 유대인 대표들?”
“예, 주인님. 랍비를 비롯해 다섯 명이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집무실로 안내해.”
학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무실에서 유대인 손님들을 맞이했다. 시커먼 사제복을 입고 곱슬거리는 턱수염을 자랑하는 랍비와 빵모자를 쓴 중년 남자들이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랍 지역에 살면서도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화는 잘 통하는 편이었다.
“폐하! 저희는 기독교도들이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성지이지만 동시에 다른 종교들의 성지이기도 하오. 무슬림들도 종종 예루살렘을 순례한다고 들었소. 어느 종교의 신도라도 순례를 막을 이유가 없소.”
오스만 제국에서도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민호는 유대인이 어째서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합당한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프랑크인들이 유대인과 아랍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소? 몰랐소.”
아랍에서 프랑크인은 유럽인 전체를 가리켰다. 나중에 이슬람 학자에게 물어보니까 1차 십자군 원정 때 발생한 예루살렘 대학살에 관한 기록문서는 꽤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학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14만 명 정도가 일주일 사이에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알 아크사 사원 한 곳에서만 아랍인 7만 명이 넘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것은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형 선고에 유대인들이 연루됐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근세 유럽에서도 흔히 그 이유를 내세워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사회적으로 조장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부터 제자들까지 죄다 유대인들이었으니 그런 이유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들이 숱하게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유럽인들은 남의 재산을 약탈하기 위해서 이교도라는 핑계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요즘도 기독교 순례자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년에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항상 문제긴 하오. 가자의 아흐마드 파샤가 그대들을 보호할 것이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킬 생각도 하시오.”
“저희 유대인들은 수도 적고 약합니다.”
“고산국도 인구가 적소. 재산도 아직 유대인들보다 적을 것이오. 하지만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지키고 있소.”
그러나 이민호는 이 문제로 유대인들을 비난하거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19세기 시오니즘이 확산된 이후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일으킨 유대인들과 같아질까 몹시 경계했다.
“북미 영토 일부를 매입하게 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폐하께서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북미에서 민족적 통일성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영토적 통일성이라도 유지해야지요. 다음에도 국토를 분리하라는 요청을 한다면 고산국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대응하겠소.”
랍비가 입을 다물었다. 이민호는 유대인들에게서 두 번 다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못을 박았다.
“저희 유대인들은 돈이나 힘이 있더라도 다른 곳에 국가를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신과의 계약에 의해 가나안 땅을 삶의 터전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는 오래 전부터 이민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소. 이들을 몰아내고 싶겠지만 그들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인 만큼 저항할 수밖에 없소.”
원래 유대교의 교리대로라면 구세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건국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세우지 않더라도 유대인들이 살아갈 일정한 면적의 땅을 확보해 자치를 유지할 방법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폐하?”
“유대인에게 많다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시오.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으면 그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는 등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오.”
“하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19세기 이후 유대인 은행가들이 큰 성공을 거두기 전부터 무슬림 또는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주요 종교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종사할 직업에 제한이 많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에도 이미 유대인들에게 충분한 자본이 갖춰져 있었다는 뜻이다.
“가자의 지사 아흐마드 파샤나 드루즈파 종교지도자 파흐르 앗딘처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인정받으시오.”
“오스만 제국에 반역을 하라는 뜻입니까?”
“아니요. 보아 하니 아흐마드 파샤 같은 이들은 지사 직책을 세습하고 있더군요. 나라 속의 나라이며 제국 속의 왕조라고 할 수 있소. 유대인들이 군사력이 없으니 뇌물로 이스탄불의 고관들을 유혹해야겠지요.”
이스탄불에는 제국에 충성스런 군인과 관료도 많았지만, 돈만 주면 언제든 나라를 팔아먹을 준비가 된 고관들도 즐비했다. 아랍인들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유대인들이라면 뇌물 좀 바치고 일정한 공간을 자치 영토로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느 지역이 좋겠습니까? 예루살렘은 여러 국가와 종파에서 관심을 가져서 유대인이 공개적으로 수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제도시인 예루살렘은 지금 이대로 두고, 그 서쪽 아슈도드와 도로 주변에도 내년부터 순례자들이 몰려올 테니 빼는 게 좋겠소. 아무래도 아슈다드 북쪽 7리그 거리의 바닷가 모래언덕에 유대인 정착지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소. 야파 항 바로 북쪽이오. 모래땅이라 농사는 못 짓겠지만 그 북쪽에 강이 있어서 식수 문제는 해결될 것이오.”
이 시대에 텔아비브는 해안가 모래언덕에 지나지 않았다. 텔아비브라는 지명도 아직 생기지 않았다. 반면에 야파 항은 기원전 7500년부터 사람이 살았고 성서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지역이었다.
“저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이오. 이 지역의 지배자인 아흐마드 파샤와 논의를 해보는 게 좋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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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유대인 문제를 정리하고 예루살렘에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