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4 60. 레반트 =========================================================================
60. 레반트
“폐하! 여기는 성경에 블레셋 사람들이라 불리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추기경 예하. 저기가 바로 가자입니다.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십시오.”
함대는 수에즈 운하 북항에서 밤을 보내면서 고산국에서 싣고 온 무역용 상품 일부를 수송선에 적재했다. 그 동안 상품이 없어서 조금 불편했는데 마침 국영상단 상선들이 수에즈 운하 북쪽 출구에 도착해 화물을 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일찍 출항해 오전 중에 가자에 도착했다.
아르노 도사 추기경이 사제들과 함께 정식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추기경은 순교를 각오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자는 이슬람 지역이었으니 추기경 입장에서는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가자 시는 오스만 제국에서 레반트 전 지역을 아우르는 다마스쿠스 총독령에 속한 여러 지구들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가자 지구의 수도였다. 가자는 동시에 카라 샤힌 무스타파, 즉 무스타파 파샤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운 리드완 왕조의 수도였다. 가자 지구는 북동쪽 예루살렘 지구와 접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카라 샤힌의 손자이며 리드완의 아들인 아흐마드 파샤가 1585년부터 가자 지구와 예루살렘 지구, 나블루스 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용감하고 명석하기로 소문난 아흐마드 파샤는 오스만 제국군의 육군 장성으로서 이스탄불의 황제를 위해 일한 적도 있었다. 1601년부터 다마스쿠스 총독이 될 사람이었는데, 총독 자리를 얻기 위해 이스탄불의 정계 관료들에게 엄청난 양의 뇌물을 뿌려야 했다.
“폐하!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의전과 경호상의 문제 때문에 공주는 함에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소만.”
“오늘은 기병들이 배에서 안 내린다고 하니까 나중에 다시 아슈도드에 상륙해 예루살렘에 가시려는 것 맞죠? 예루살렘 순례가 이뤄지는 역사적인 협상 과정을 신교도로서 전 유럽에 증언하고 싶어요.”
신교도가 우세한 북유럽에서는 교황청에서 알리는 것보다 덴마크 공주가 발표하는 것이 훨씬 신빙성이 높겠다 싶었다. 어차피 예루살렘은 로마가톨릭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였다. 여기에 개신교가 추가된다 해서 어색할 것도 없었다.
“알았소. 공주를 위해 마차를 한 대 내주겠소.”
“고마워요, 폐하!”
헤드비히 공주가 이민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바로 옆에 선 민영이 막을 수 있었는데도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했다. 공주가 춤추듯 폴짝거리며 숙소로 돌아간 다음 이민호가 민영에게 물었다.
“왜 안 막아?”
“마나님이 되실지 모르는 분께 제가 실례를 저지를 수는 없어요.”
“감사 표시한 것뿐고 유럽에서 이 정도는 그냥 인사야. 그리고 민영이 마나님으로 모실 사람이 생기지는 않을 거야. 저 공주는 더더욱 아니야.”
“흥! 과연 그럴까요?”
이민호도 아주 약간 불안했다. 기병이 가자에 상륙하지 않는다는 한 마디로 함대의 다음 기동 방향을 예측할 정도로 똑똑한 공주였다. 이민호에게 도움이 많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 여자로 만들어서까지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수많은 문제가 닥치고 수많은 인재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여자를 후궁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고산국 함선들이 깃대에 오스만 제국 해군기를 게양하고 가자 항에 접근했다. 특히 함대 기함에서 제독기와 파샤기를 휘날리며 입항하자 항구를 지키는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며 함대 기함으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가자 지구의 지사가 이끄는 관료와 병사들이 황급히 부두로 달려왔다. 일반적인 지사보다 훨씬 규모가 큰 행렬이었다. 가자 항에 정박한 유럽 여러 나라의 상선 갑판에서 상인과 선원들이 보는 가운데 환영의식이 거행됐다.
“환영합니다, 고산국 국왕폐하! 이스탄불에서 연락을 받고 폐하의 방문을 기다리던 차였습니다.”
“반갑소, 아흐마드 파샤.”
정식 직책인 지사라고 부르기도, 이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왕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군주든 관료든 상관없이 파샤는 적당한 호칭이었다.
“이집트의 총독이시며 지중해의 지배자이신 알리 파샤께 무한한 존경을 바칩니다.”
“민망하군요. 반갑소이다, 아흐마드 파샤.”
총함장 이순신이 지사에게서 극도의 존경이 담긴 인사를 받았다. 파샤라는 칭호 안에도 세 가지 계급이 있었다. 가장 높은 파샤는 동양의 둑기와 발음부터 모양과 기능까지 비슷한 투이에 말꼬리 털이 세 가닥이었고, 두 번째는 두 가닥, 세 번째는 한 가닥이었다.
이순신은 이집트 총독이며 오스만 제국 전체 해군의 명예 제독으로서 최상위 파샤 칭호를 중복해서 받았다. 다마스쿠스 총독령 아래 일개 지구의 지사에 불과한 아흐마드 파샤보다 단순히 한 단계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흐마드 파샤는 독립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이 분은 아르노 도사 추기경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블레셋의 왕이시여. 처음 뵙겠습니다.”
“오! 추기경 예하! 저는 블레셋도 아니고 왕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파샤.”
아흐마드 파샤가 이민호와 이순신 등 귀빈들을 카스르 알 바샤로 안내했다. 13세기 이집트 맘루크 왕조 때 지어지고 최근에 아흐마드 파샤에 의해 증축된 성인데, 사실상의 궁전이었다. 거대한 사자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문을 지나 성에 들어섰다.
“교황 성하께서 알 쿠즈를 순례하신다고요? 아! 잘됐군요. 진작 순례하셨어야 했습니다. 그 전에도 얼마든지 알 쿠즈를 순례할 수 있었는데 오래 전의 교황 성하께서 괜히 전쟁을 일으키셨지요. 이미 수백 년 전 일입니다만.”
오찬을 겸해서 회의가 열렸다. 교황의 예루살렘 순례 문제에 아흐마드 파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추기경이 얼굴에 희색을 띄었다. 덴마크 공주도 통역장교와 함께 오찬에 참가해서 회의 진행 과정을 기록했다.
“문제는 내년에 주빌리를 맞이해 기독교 신도 수백 만 명이 예루살렘을 순례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희 입장에서야 기독교 신자들이 알 쿠즈를 많이 방문하실수록 좋지요. 혹시 신도들 간에 불미스런 일이 발생할 것 같아 걱정되십니까? 제 수하 병사들을 총동원해서 기독교인들을 철저히 보호하겠습니다.”
아흐마드 파샤가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협상은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순례자 수백 만 명이 예루살렘을 방문한다면 가자 지구의 지사이며 예루살렘 지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파샤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적극적이었다.
내년에 있을 교황의 예루살렘 순례 계획은 주로 추기경과 파샤가 협의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파샤. 아무래도 기독교인들을 무슬림들과 가급적 만나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오. 이슬람에는 라마단 기간이 따로 있지만 기독교의 순례는 특정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소.”
“일 년 내내 유럽에서 순례자들이 오시겠군요. 그 와중에 어느 종교 신도든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사고가 날 수도 있겠지요.”
“순례를 내년에만 오고 그칠 것도 아니요. 내가 알기로 가자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들었소. 그런 중요한 길이 기독교 순례자들로 미어터지는 꼴을 본다면 파샤도 무척 답답할 것이오.”
“그렇겠습니다, 폐하.”
아흐마드 파샤가 가자 지구의 지사에만 그친다면 상관없었다. 그러나 파샤는 예루살렘 지구와 그 북쪽 나블루스 지구를 통치하고 있었기에 도로는 중요한 전략시설이었다.
나블루스 지구가 아슬아슬하게 나사렛 바로 남쪽부터 시작해서 안타까웠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지구에 속했다.
“그렇다면 가자가 아니라 북쪽 아슈도드에 새로운 항구를 만드는 게 어떻겠소? 사실 가자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좀 멀어서 말이오. 물론 아슈도드도 파샤의 영지임을 보장하겠소.”
“아슈도드에 항구를 크게 만든다면 예루살렘까지 하룻길을 줄일 수 있겠습니다. 참 훌륭한 고견이십니다. 그리고 아슈도드를 제 영지로 인정해주신다면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데 겨우 여덟 달 만에 항구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슈도드는 예루살렘에서 정확히 서쪽 해안 마을이었다. 까마득한 구약 시대에는 블레셋을 구성하는 5개 도시 연맹의 하나였으나 이 시기에는 겨우 몇 십 가구가 몰려 사는 바닷가 어촌에 불과했다.
가자도 16세기 초반까지 한적한 작은 어촌 마을로 전락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다음부터 단기간에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빌려주신 이스탄불의 장인들 몇 백 명이 함대에 동승하고 있소. 이들이 나서고 고산국 공병대가 며칠 일을 도와주고 간다면 공사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오. 자금을 파샤에게 맡길 테니 인부들을 모아주고 나중에 우리가 떠나고 나면 나머지 공사를 완공시켜주시오.”
“며칠 정도로 얼마나 진행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민호가 공사비로 사용하라고 금괴 다섯 상자를 내놨다. 추기경도 세 상자를 냈다. 파샤가 정중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교황 성하와 신도분들의 순례 중에 별다른 사고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익이 난다면 폐하와 로마교황청에 수익 일부를 분배하겠습니다.”
“분배하지 않더라도 큰 상관은 없소. 혹시라도 내가 받을 이익이 생기면 구호기사단의 병원에 기부해주시오.”
“과연 고산국 국왕폐하이십니다. 저도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아흐마드 파샤가 멋도 모르고 고산국이 주도하는 도로공사에 동의하는 바람에 아슈도드 인근의 산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고산국 공병대가 며칠 동안 돌산을 폭파시키고 바위를 옮겨 항구 방파제와 선착장 여러 개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그 사이 장인들이 가자에서 모은 인부들을 지도해 아슈도드에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과 숙소를 세웠다. 수송선 한 척이 임시로 벽돌 공장으로 전용돼 하루 24시간 벽돌을 구웠다.
아흐마드 파샤가 며칠 만에 아슈도드를 방문했을 때는 항구와 내륙에서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항만과 도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 확장 공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그런데 어느새 몰타 구호기사단 기사들이 와서 병원 건설 현장을 경비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이 날붙이 무기와 함께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몹시 어색했다.
“아흐마드 파샤! 어서 오시오.”
“고산국 국왕폐하! 며칠 만에 아슈도드가 이렇게 바뀌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마침 예루살렘 쪽 도로공사 현장에 시찰을 가는 참이니 파샤도 함께 갑시다. 추기경 예하도 같이 계시오.”
파샤를 장갑차 뒷자리에 끼워 넣고 비명을 지르든 말든 동쪽으로 달려갔다. 파샤의 호위병들이 말을 타고 미친 듯이 쫓아오는 중에 장갑차가 4차선 넓이로 확장된 비포장도로를 따라 30km 가까이 달렸다.
“파샤! 내리시오. 다 왔소.”
“허억! 허억!”
장갑차 후방석에서 간신히 내린 아흐마드 파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추기경은 장갑차를 몇 번 타봤기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 사이 이민호는 도로 건설 현장을 살폈다. 마을에서 벗어난 농경지를 사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직선 도로를 닦았고, 지금은 장인들과 인부들이 길에 평평한 돌을 덮어 다듬고 있었다. 고산국 공병대는 건설 중장비를 총동원해 여기서 동쪽, 예루살렘 서쪽 계곡 길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 콰콰쾅!
“폐하!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혹시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까?”
“아니요. 계곡 도로를 넓히느라 산을 좀 깎고 있소.”
- 우르릉~
발파음이 일어나고 몇 십 초 지나서야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울렸다. 아흐마드 파샤가 호들갑을 떨었으나, 신기하게도 이민호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지진입니다! 어서 지반이 단단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폐하!”
“산이 무너지는 소리요.”
“인간이 어떻게 산을 무너뜨립니까?”
“성벽이나 산이나 그게 그거 아니오?”
아흐마드 파샤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맞습니다. 화약을 전쟁이 아니라 도로건설에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도로는 전쟁의 기본 요소입니다.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시 장갑차를 타고 공사가 한창인 계곡 길로 들어섰다. 안전요원이 장갑차 행렬을 통과시키자 건설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존 도로를 단순히 확장하는 공사라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밀차가 돌조각들을 한 곳에 모으고, 삽차가 바위를 떠서 화물차에 옮겼다. 우렁찬 엔진소리와 밀차가 바위를 부수는 소리 때문에 대화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고산국의 진짜 힘이라는 철의 지니들이로군요.”
“그런 별명이 붙었소?”
“수에즈 운하 건설에 참가한 인부들로부터 들었습니다. 헛소문으로 치부했어도 은근히 불안했는데 사람이 탄 채 직접 조작하는 것을 실제로 보고 나니 안심이 됩니다. 그 동안 철의 지니들이 폐하께서 마법으로 소환한 악마들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옛날 사람 없이 신전의 문을 여닫는 기관 장치와 똑같은 원리로 움직이고 있소. 파샤가 소문을 정정해주길 기대하겠소.”
“고산국과 척을 지면 바로 망하겠습니다.”
아흐마드 파샤는 아직 예멘의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고산국과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 같은 특수한 상대가 아니면 아주 망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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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