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72화 (521/1,000)

00572  59. 예멘  =========================================================================

“통과세를 받아서 예멘의 군비를 증강한다는 소리는 다 거짓말이었어. 금은보화로 화약무기를 사기는 아까웠을 테지.”

예멘의 이맘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제대로 독립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외국에서 화승총과 대포부터 샀어야 했다. 그러나 예멘의 이맘이 주변국이나 유럽 나라들로부터 무기를 사들였다는 소문은 전혀 없었다.

이맘은 그저 북부 산악 부족들을 흡수해서 늘어난 병력으로 오스만 제국을 밀어붙이려만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화약무기에 그렇게 당해놓고도 무기와 전술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맘은 사나 등 산악지대가 본거지라서 화약무기가 없더라도 지키기에 유리한 탓이었다. 그러나 화약무기가 없어 해안 항구도시에 자리 잡은 오스만 제국군을 공격하지도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알 만수르 알 카심이 죽은 1620년이 넘어서야 예멘 군이 화약무기로 무장한다. 카심의 아들 알 무아야드 무하마드가 이맘이 되고 나서 다수의 총기와 대포로 무장한 예멘군이 본격적인 공세로 돌아선다.

무하마드는 사나에서 1628년에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낸 다음 1634년에 오스만 제국 세력을 예멘에서 완전히 축출한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가 이라크 지방을 공격 중이던 때에 맞춰 공세를 퍼부었기에, 오스만 제국은 결정적인 시기에 예멘에 충분한 병력을 파견하지 못했다.

“보물을 그렇게 많이 쌓아두고 뭐하려 했을까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겠지.”

“가끔 주인님이 왕궁 지하실에 내려가서 말없이 헤벌쭉 하는 것처럼 말이죠?”

“놀리지 마! 그래도 나는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투자한다.”

금과 은이 넘쳐나는 유럽과 직접 교역을 하고부터는 왕궁 지하에 귀금속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아시아와 달리 유럽은 무역수지를 맞출 필요가 없기에 일방적으로 무역흑자가 쌓인 탓이었다.

구르카 병사들이 이맘의 왕궁에 쌓인 금은보화를 상자에 잘 포장해 마차에 실어서 열 대 단위로 반출했다. 마차를 자비드 성채에 들여보낼 때는 곡식을 가득 실어서 도시 빈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나중에는 모스크와 대학에도 식량을 기부해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자비드 성채 주위에서 전장 정리를 하는 중에 계복이 이끄는 기병연대가 돌아왔다. 기병연대는 예멘 기병 거의 전부를 사살하고 말 위주로 전리품을 끌고 왔다. 큼직한 아라비아 말 수천 마리에게 줄 건초를 구하지 못해 잡곡을 먹였다.

“의외로 말들이 잡곡을 먹는데 익숙합니다.”

“사막에서 말도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었겠지. 사상자는?”

“전사자는 없고 열한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대부분 총을 쏘는 중에 낙마 사고를 당했습니다. 군의관들이 돌봐주고 있습니다.”

고산국의 의술도 그 동안 계속 발전했다. 이제는 부러진 뼈가 살을 찢고 나온 정도의 부상은 수술을 통해 완치도 가능했다. 혈액형을 구분해 현장에서 수혈을 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말을 달리는 중에 총을 쏴서 표적에 명중시킬 만한 기병은 고산국이 유일했다. 조선과 여진의 기마궁술, 그리고 고산국의 과학기술이 합해져서 가능했다.

화승총 시대에 승마 중에 총을 쏘기는 어려웠다. 16세기에 처음 생긴 유럽 흑기병들은 정지한 상태로 밀집해서 권총을 발사하는 카라콜 전법으로 운용돼서 전술상 한계가 있었다. 앙리 4세는 중기병이 돌격하는 중에 동반한 흑기병들이 주요 방어지점을 향해 집중 사격하도록 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사나를 공격하려면 산길로 한참 동안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시간만 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 시간이 문제야. 괜한 시간 낭비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비록 홍해 통과세를 낮추기 위해서라지만 오스만 제국 편을 들어 그 지역 세력을 파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이맘의 후계자가 알아서 찾아와서 항복해주면 좋겠군요.”

그런 희망이 스파게티 괴물이나 알라께 전해진 것인지 다음 날 이맘의 후계자 알 무아야드 무하마드가 자비드 성채로 찾아왔다. 원래는 주변 부족을 공략하는 문제로 이맘에게 협의하러 온 것인데, 중간에 이맘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무하마드는 10대 후반의 젊은 정치가치고는 매우 냉철했고, 부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따금 그의 눈길에서 깊이 잠긴 강렬한 증오심을 읽을 수 있었다.

“폐하! 고산국 국왕폐하께서는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예멘 이맘의 세력을 토벌하시려고 하십니까?”

“아니요. 이맘의 부하들이 홍해에서 통과세를 받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겠소.”

“오늘부터 통과세를 받지 않겠습니다! 겨우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예멘의 이맘이 이런 꼴이 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게 겨우 몇 푼이 아니라서 이집트의 무역을 말려 죽일 뻔한 것이 문제였다. 예언자의 후손들인 샤리프들, 그리고 사나 서쪽 도시 카콰반의 아미르도 이맘 후계자를 따라와서 임시지만 북부 고원지대의 대표성을 갖췄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모카의 관리가 내게 무례를 범하기도 했소. 그 관리는 이미 처형했지만 아무래도 임명권자인 이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단 말이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사죄하는 의미로 금괴 열 상자를 바치겠습니다. 다만 사나에서 가져와야 하니 나중에 폐하의 신하를 모카로 보내주십시오.”

“예멘이 독립하고 싶으면 국제관계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오.”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버지 이맘의 죽음으로요!”

알 만수르 알 카심이 이맘이었을 때는 예멘이 산적이나 해적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로이 이맘이 된 이 젊은이가 예멘을 짧은 시간 내에 근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대포와 화승총 같은 화약무기를 저희에게 판매해주시겠습니까? 고산국의 무기는 정밀하기로 정평이 났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지역 생산품보다 높은 가격에 매입할 용의가 있습니다.”

“거절하겠소.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세력에게 넘기기에는 부담이 크오.”

동맹국에 판매하려고 화승총과 전장식 대포를 생산해서 수송선에도 쌓아 놓았다. 하지만 예멘에는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현재 예멘은 오스만 제국과 휴전 중입니다. 휴전 조약도 제가 승계하겠습니다. 그 동안 북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예멘 총독에게 화승총 5백 자루를 넘길 테니 그에게 사시오. 바가지 쓸 각오는 해야 할 것이오.”

“혹시, 제가 계속 저항하면 폐하께서는 사나를 공격하려고 하셨습니까? 오스만 제국 10만 병력으로도 불가능했는데요?”

젊은 이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안한 듯 이민호의 눈치를 살폈다. 이민호는 은근히 장난기가 들었다.

“당연하오. 물론 여기서 동쪽으로 산맥을 넘거나 남쪽 모카에서 출발해 산악지역을 통해서 사나로 갈 생각은 없었소. 북쪽에서 예멘 영토에 진입해 사다를 지나 남진할 계획이었소.”

“헉!”

도로 사정이 나쁜 산맥을 넘거나 매복하기 좋은 산악지대 계곡을 여러 차례 지나느니 차라리 약간 우회하더라도 북쪽에서 남진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예 처음부터 고원지대에 들어서서 장갑차와 기병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예멘 총독이 아니라서 작전지역을 예멘에 한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렇게 다른 진공로를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국경에 가까운 사다는 이맘의 통치에 종종 반기를 들었던 곳이라서 협력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제가 아버님의 복수에 눈이 멀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도전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이겠소. 그런데 저 똘똘하게 생긴 친구는 누구요?”

“제 동생 사이프입니다, 폐하. 아차!”

이민호가 꼬마를 가리킨 단순한 행위 하나로 이맘 형제가 겁에 질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알 만수르 알 카심 이맘의 자식들을 한꺼번에 죽여서 혈통을 단절시킬 의향은 없었다. 사촌이든 다른 친척이든 누군가 다시 이맘으로 나설 게 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호가 물어본 것 때문에 젊은 이맘은 단번에 위축됐다. 후계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가 몰살당할 위험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좋았다. 사이프의 원래 이름은 사이프 알 이슬람 알 하산으로서 나중에 이맘인 형을 도와 주변 부족들에 대한 정복전쟁에 나선다.

“이번 일로 인해 새로운 이맘은 교훈을 많이 얻으셨을 것이오.”

“예.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 제가 폐하께 도전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모카에서 출발한 예멘 총독이 도착했다. 총독 하산 파샤는 이민호에게 승전을 축하하며, 알 무아야드 무하마드에게는 이맘 즉위를 축하했다.

“폐하! 갑옷과 무기 등 전리품이 어마어마합니다.”

“필요하면 총독이 사시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허허! 고맙습니다.”

오스만 총독이 예멘의 낡은 갑옷과 무기를 사려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승전 전리품으로 이스탄불에 보내려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구멍 난 갑옷과 부러진 무기를 신품보다 비싸게 팔았다.

그리고 화승총 500정과 화약 몇 통을 총독을 통해 이맘에게 판매했다. 국제시세보다 서너 배 더 비싸게 판 것 같았다.

그런데 이맘에게 당장 돈이 없어서 이맘이 총독에게 금화 몇 상자를 빌렸다. 이민호는 총독에게 수수료를 좀 떼어주고 금화를 챙겼다. 새 이맘은 다 좋은데 쉽게 외상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이민호는 지상군 병력을 이끌고 함대로 귀환했다. 총독과 이맘이 회담을 열어 휴전 협정의 승계 문제를 논의한다고 해서 자비드에 남겨두었다.

“어디 보자. 다음에 받기로 한 사죄 보상금 금괴 열 상자는 내 것. 화승총과 흑색화약 판매대금으로 받은 오스만 제국 금화 중에서 두 상자는 조정으로, 한 상자는 내 것, 두 상자는 이집트로. 이맘의 왕궁 전리품 일부에서 병사들 승전 수당을 나눠줘야겠지. 그 중에서 금괴 열 상자는 이집트로 보내자.”

모카의 관리처럼 가끔 싸가지 없는 마약중독자가 있다 해서 이민호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그 관리의 목을 치고도 자비드를 공격할 명분을 얻고, 또한 금괴 열 상자를 더 챙기게 됐으니 참으로 고마운 약쟁이였다.

“얼마씩 나눠줘야 할까요?”

“기병연대에게는 황금 두 냥에 전리품 판매금 한 냥을 합해서 석 냥, 장갑차 대대에게는 두 냥, 구르카 여단에게는 한 냥 반, 해군 수병과 해병에게는 한 냥. 나머지 배에 탄 사람들에게는 반 냥씩 지급해. 장교는 두 배, 장군은 열 배.”

베네치아 시녀들이 열심히 명나라 주판을 튕겼다. 요즘 돈 계산을 베네치아 시녀들에게 맡겨서 이민호는 아주 편했다.

최근 명나라의 금과 은 교환비율이 널뛰기를 하는 바람에 지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까운 고산국에서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은값의 변동 폭이 더 커서 결국 고산국에서는 금을 기준으로 삼은 지 오래였다.

“2만 5천 냥 정도에요. 오늘 바로 전 장병들에게 지급할게요.”

“호위와 후궁들에게는 스무 냥씩. 수습들에게는 닷 냥씩.”

“고마워요, 주인님. 왕궁 보물은 정리하는데 사흘쯤 더 걸릴 거여요.”

자비드 왕궁에서 가져온 금은보화 중에는 골동품과 예술품으로 분류될 만한 보물이 많았다. 각종 보석 외에 금화와 은화는 견본 몇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녹여서 금괴와 은괴로 만들기로 했다. 주화에 들어간 귀금속 함량이 주조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함대는 자비드를 떠나 사흘 동안 항해해서 아부다비로 향했다. 수에즈 운하 북단에 저유고를 건설해 고산국 상선들에게 연료를 공급하고 있지만 대규모 함대에 연료를 공급하는 임무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함대 단위로 움직인다면 이렇게 항로를 벗어나 직접 아부다비에 가서 연료 보급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순항속도로 천천히 항해하는데 홍해와 아라비아 만은 정말 끔찍하게 더웠다. 여름에 더 더워질 테니 얼른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나았다.

침전에서 아이누 후궁들이 자면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도 민망했다. 선풍기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 아부다비에서 이번 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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