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68화 (5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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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예멘

수에즈 항에서 출발한 고산국 함대는 느긋하게 움직여 이틀 후에 예멘 모카 항에 도착했다. 항구 도시에는 누런 흙벽돌로 쌓은, 높이 3, 4층 정도 되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카 시가지에 거대한 모스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허름한 상가 겸 일반 가정집들이었다. 구운 흙벽돌로 건물을 짓고 전통적인 하얀 장식을 한 아덴 항의 시가지보다 훨씬 초라했다.

예멘은 서기 1세기 전후에 유향과 몰약의 산지로서, 그 외에 다른 지역에서 수입한 향료, 상아, 보석, 관상동물 등을 이집트 등 주변국과 활발히 교역했다. 이 시대에도 유향과 몰약은 여전히 교역 상품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나 지금은 커피와 약초, 염료, 장식품, 그리고 다양한 식료품 수출 비중이 더 높았다.

물론 인도에서 향신료 등 상품을 매입해 예멘을 거쳐 홍해를 지나 이집트의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에 보내는 무역이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상행이었다. 항해가 성공하면 이익이 2배 이하인 적이 드물었고, 시기만 잘 맞춰 도착하면 20배나 100배도 가능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진입한 이후 아랍 상인들에 의한 교역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다. 또한 각종 세금이 판매액의 절반 이상에 이를 정도로 오스만 제국 총독과 이맘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상인들을 뜯어먹었다. 상업이 급격히 쇠퇴한 현재는 커피 수출과 홍해를 지나는 상선에서 받는 통과세가 예멘 총독부와 이맘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오스만 제국 총독이든 자이디야파 이맘의 관리든 좀 나와 봐!”

아무도 없는 항구에 내려선 이민호가 시내를 향해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있는데 마치 좀비들인 듯 길거리에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전염병이 돌아 다 죽었나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하얀 치마에 샌들을 신고, 머리에 터번도 아닌 스카프를 대충 감은 듯한 모습이 예멘 사람들의 복장이었다. 잠비아라는 전통 칼을 화려한 허리띠에, 정확히는 배꼽 위에 차고 다녀서 언뜻 보면 다른 것으로 오인할 만한 모습이었다.

“카트를 씹고 있습니다, 전하.”

오후에 입항해서 그런지 그늘마다 사람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예멘에서는 점심시간 후에 카트라는 풀의 잎과 가지를 씹는 것이 일상이었다. 머리를 벽이나 기둥에 기대고 입안에 가득 넣은 카트를 서서히 씹으며 멍한 모습을 짓는 게 참 딱해 보였다.

“약쟁이들 천지로군.”

“위험한 마약은 아닙니다. 마약 성분이 아주 살짝 섞였다고 합니다.”

아랍어 통역장교가 축 늘어진 예멘 사람의 손에서 카트 잎 하나를 빼내 씹었다. 그도 말만 들었지 직접 씹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카트 잎의 약효가 약하다고? 볼이 터질 정도로 한 입 가득 씹으면 그게 그거지.”

이민호가 투덜거리고 있는데 아랍인 복장으로 위장한 백인 같은 자들이 부두로 우르르 몰려왔다. 커다란 터번을 쓰고 화려한 조끼를 입어 예멘 사람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페르시아인과 비슷하게 생긴 무슬림 인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웬 묘목 수십 그루를 들고 배에 올랐다. 이민호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이봐! 인도인!”

“예? 예. 나리.”

커피의 원산지는 모카 건너편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오피아에서 자연산 커피를 수확하는 것을 넘어 직접 재배했으나 요즘에는 예멘 북부 고원지대에서 커피를 더 대량으로 재배했다. 그래서 이 시기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커피 생산을 독점하기 위해 볶지 않은 커피콩이나 커피나무 묘목을 반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인도인들도 라마단 기간에 모카 항에 들르면서 커피 맛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모카에서 많은 양의 커피 원두를 수입해갔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무슬림의 음료인 ‘악마의 음료’ 커피에 세례를 해줬다는 1600년 이전에도 유럽에 많은 양이 수입되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백주대낮에 커피 묘목을 배에 싣고 달아나고 있는데도 모카 항에서는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민호는 이 기회에 장물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그거 커피 묘목이지? 반출 금지 물품이잖아!”

“커피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커피라는 영어 단어는 1582년에 생겼다. 커피는 네덜란드어 koffie에서 따왔고, 그 전에 투르크어 kahve였고 그것은 아랍어 qahwa에서 빌려왔다. qahhwat al-bun, 콩으로 만든 와인, 콩술이라는 뜻이었다.

“커피 묘목이 아니라면 세금으로 세 그루만 바쳐.”

“예? 예!”

이 시대에 아라비아 지역에서 세금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강요하는 선물과 비슷한 것이었다.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세금 부과를 강요할 힘이 있느냐가 중요했다.

커피 묘목 세 그루를 국왕좌승함에 넘긴 인도인들이 돛을 올리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커피 묘목이란 게 흔해 빠진 관목처럼 생겼으나, 이것이 큰돈이 될지도 몰랐다. 어차피 커피나무는 인도인이 훔쳐가고 1616년에는 네덜란드인이 모카에서 훔쳐서 곧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아무도 안 나오네. 에스파냐 시에스타도 이 정도는 아니다!”

혀를 차던 이민호는 해롱대는 모카 사람들이 깰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국왕좌승함으로 돌아갔다. 함대가 항구에 도착하면 도시 전체가 긴장하고 최소한 오스만 제국에서 파견한 예멘 총독이라도 영접 나올 줄 알았는데 이 모양이었다.

“와! 카페 나무네요?”

“어? 비앙카가 알아?”

관측실로 묘목을 옮기고 화분에 심는 중에 비앙카가 커피 원두도 아닌 나무를 알아봤다. 신기해서 물어보니 비앙카가 술술 대답했다. 오스만 제국과 교역을 하던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수입했다고 한다.

“당연하죠. 베네치아에서 이 비싼 카페 나무를 재배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하지만 웬만한 곳에서는 자라지 않아요. 온실에서 물을 많이 주면서 키워야 한다고 해요.”

그런 식으로 네덜란드 땅에서도 온실에서 커피나무를 재배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커피 경작에 적합한 지역을 알고 있었다. 차와 똑같이 덥고 습하면서 고도가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목화처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기간에는 건조한 편이 좋았다.

북미에는 커피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별로 없었다. 플로리다는 고도가 낮고, 텍사스는 항상 건조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재배하기에는 위도가 낮고 고원지대가 많은 중남미가 더 적합했다. 아니면 자바 섬과 베트남처럼 열대에 가까우면서 고산지대를 갖춘 곳이 적당했다.

“잘됐다. 화분에 심어서 귀국할 때까지 비앙카가 커피나무를 돌봐줘. 왕도 식물원에서 적당히 키우다가 본토 산기슭이나 바기오에 꺾꽂이 방식으로 심어봐야겠어.”

품종이 카페 아라비카가 되겠지만, 어쩌면 새 품종이 나올 수도 있었다. 로부스타 품종은 19세기 말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발견됐다. 고급품에 속하는 아라비카 단일 품종이 세계 커피 시장을 계속 장악할 것이다.

“주인님! 귀국 후에도 제가 계속 키우게 해주세요.”

“오! 그래. 이곳 모카처럼 수확기 전에는 건조한 곳에서 키워야 한다는 사실만 잊지 마. 지원은 얼마든지 해줄게.”

비앙카와 함께 커피 묘목 화분에 물을 듬뿍 줬다. 분무기를 이용해 잎과 줄기에도 물을 뿌렸다.

집무실로 돌아온 다음 비앙카가 카이로에서 산 원두를 갈아 천에 걸러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설탕과 초콜릿 시럽을 듬뿍 넣어서 일단 달아서 좋았다.

“오! 맛있다.”

“저희들은 베네치아에 있을 때 가끔 커피를 마셨어요. 그런데 너무 비싸요. 물론 중국산 차보다는 싸지만요.”

고산국에서는 카카오 콩을 얼마 전부터 에스파냐의 멕시코 부왕령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이민호와 혜진이 세계 최초로 고체 초콜릿을 만들어서 주로 유럽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선물용으로 사용했다.

“커피에 우유를 섞거나 크림을 얹거나 계피를 살짝 뿌리는 것을 연구해봐. 아니면 술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도 되고. 여러 가지로 시도해봐.”

“아! 주인님은 정말...... 하지만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니 다양하게 시도해볼게요.”

비앙카가 중간에 무슨 말을 생략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미각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는 아닐 것으로 믿었다. 이 시대에는 커피 향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여겼기에 설탕 외의 다른 첨가물을 넣는 시도를 하기 어려웠다.

할 일이 없다 보니 함대 전체에 경계령을 해제하고 휴식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기병과 구르카 여단 등 지상군 전체에 강제 취침 명령을 내렸다. 이민호도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오후 늦게, 햇볕이 부드러워진 다음에야 예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항구로 기어 나와서 움직였다. 부두로 이동하는 사람 몇을 잡고 어디 가는지 묻자,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저희들은 이맘 밑에서 일하는 관리들입니다. 홍해를 지나가는 배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고산국이나 오만의 배에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습니다.”

예멘 관리들이 흐느적거리며 작은 배에 올라탄 다음, 돛을 올리고 부두를 빠져 나갔다. 수십 척에 달하는 외국 군함들이 항구에 들어왔는데, 따뜻한 영접은커녕 항구 책임자가 나와 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저것들이 해적이야, 관리야?”

“전하! 오스만 제국 총독과 다섯 이맘파는 오래도록 휴전 중입니다. 이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통역장교는 기본적으로 지역 전문가로 양성됐으니 그의 말이 맞았다. 예멘에 대규모 군세를 파견하기 어려운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다시 이맘이나 북부 고원지대 부족들과 전쟁을 수행하기 곤란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현재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상선이나 순례자들이 탄 배에서 총독과 이맘이 이중으로 세금을 받아먹으니까 그렇지. 통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받아서 이집트의 무역이 붕괴될 정도야. 기껏 수에즈 운하를 개통해어도 이런 식이면 존재가치가 아예 없어져.”

사람을 내보내 물어물어 총독 집무실을 찾았다. 그래서 오후 늦게야 총독과 함께 다섯 이맘파에서 보낸 관리가 항구로 영접을 나왔다.

이 인간들이 오후 내내 퍼질러 잔 듯 눈에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이들과 똑같이 낮잠을 잤던 이민호는 그나마 세수라도 하고 나왔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맘의 관리요? 북부 고원에서 농사를 지어 잘 먹고 잘 살 텐데 왜 그리 욕심을 내는 것이오? 통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뜯어 무역을 방해하지 말고 차라리 교역에 참가하는 게 어떻겠소?”

아라비아 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멘은 농업국이었다. 예멘의 북부 고원에서는 몬순 기후와 풍부한 강수량 덕택에 여러 가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예멘은 기원전 10세기나 그 전에 건국된 사바, 즉 솔로몬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바 왕국과 연결된다. 사나 동쪽 마리브에 댐을 쌓고 수로를 관리해 넓은 지역을 경작하고, 유향과 몰약을 이집트로 수출해 부유해진 나라였다.

현재 예멘에서는 일부 식량과 과일, 채소 같은 것을 주변국에 수출했다. 커피와 염료도 수출했다. 인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개무역까지 포함해 이 시대 아랍 지역 중에서는 그나마 탄탄한 경제구조를 자랑했다. 그러나 예멘의 무역 역시 과도한 세금 때문에 최근 축소 일변도로 돌아섰다.

“포르투갈 해적이나 오만 해적이 무서워서 멀리 못 나갑니다.”

“그들은 얼마 전부터 해적질을 하지 않소.”

“그런가요? 그럼 세금을 더 올려도 되겠군요.”

예멘 관리가 주먹을 부르는 발언을 거듭했다. 이민호 앞에서는 그나마 말조심을 조금이라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무능과 탐욕의 극치를 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당신 아무래도 낮잠에서 덜 깬 것 같은데 말이야.”

“외국 국왕이 무슨 상관입니까? 예멘의 일에 괜히 간섭하지 마십시오. 얼른 일 보고 돌아가십시오.”

“어휴! 이걸 그냥 콱! 나는 이집트 상선들에게 부과하는 예멘의 과도한 통과세 때문에 항의하러 왔다.”

민영이 권총을 빼드는 대신 이민호를 말렸다. 이민호가 분노를 억지로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통과세든 뭐든 세금은 그 나라에서 알아서 걷는 것이 원칙입니다. 왕이 그것도 몰라요?”

“당신 지금 나를 모독해서 전쟁을 일으켜보려는 거야?”

“고산국이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이고, 예멘이 제국의 속주 취급을 받는데 설마 뭔 일 있겠어요?”

이민호가 폭발하기 전에 계복이 나서서 예멘 관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흐리멍텅한 눈빛과 독설은 변하지 않아, 급기야 계복이 관리를 땅바닥에 내쳤다.

“도련님! 이놈 목을 치고 그냥 다 쓸어버리시죠.”

“어이쿠! 나 죽는다! 외국 국왕이 그 나라 관리에게 폭행을 하는 건 침략과 다름없소!”

아무래도 이맘의 관리가 카트에 취해 상황판단을 전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약 중독자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한심한 일이었다.

“정말로 예멘을 침략해볼까? 지금 오스만 제국과 이맘이 10년 넘게 휴전 중이라며?”

“흥! 고산국이라면 해안 지방은 간단히 점령하겠지요. 하지만 사나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오. 오스만의 10만 대군도 막아낸 고산지대이기 때문이오.”

“고산지대? 그럼 고산국 군대가 활동하기에는 아주 적합하겠군.”

일단은 말장난이었지만, 구르카 여단은 히말라야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사나가 고산지대에 있다고 하나 해발 2천 미터 수준에 불과했다.

“흥! 마음대로 되나 공격해보시오.”

“저 마약중독자 놈을 묶어. 그래도 정신 못 차리면 목을 쳐야겠다.”

해병들이 달려들어 이맘의 관리를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나 상황 파악도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민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참다못한 계복이 가죽장갑을 낀 다음 관리의 입을 쳐버렸다.

이빨이 서너 개 부러져 나간 관리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더니 이번에는 엉엉 울었다. 아무래도 목을 쳐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마약중독자를 중요한 항구의 관리로 파견한 이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수도가 산악지역이라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홍해 항로를 지키려면 이맘과 그 추종자들에게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준비도 안 하고 왔는데 전쟁을 해야 하나?”

“그렇다면 일단 총독하고 이야기 좀 해보시죠, 도련님.”

이민호가 총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멘 총독 하산 파샤가 벌벌 떨며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 작품 후기 ============================

향신료와 사탕수수에 이어 면화, 설탕, 커피.

근대 상품작물은 거의 다 갖추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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