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5 58. 이집트와 레반트 =========================================================================
그날 밤은 카이로 성채에서 묵었다. 높다란 성채에서도 가장 높은 층의 테라스에 서서 카이로 시내를 굽어보고 있자면 마치 신이라도 된 듯했다. 베네치아 시녀들의 들뜬 모습을 보면 남들도 대충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높은 곳에 사는 높은 사람들은 일반 시민들이 카이로 성채에 거주하는 통치자를 우러러 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카이로 시민들은 고된 생활에 지쳐 하늘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힘겹게 살고 있을 뿐이었다.
“회의를 계속하자. 이집트에 식량 생산이 충분한데도 인구가 늘지 않는 것은 역시 열악한 위생 문제 탓이겠지?”
테라스 회의장에도 갖가지 간식과 과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난한 이집트인의 집안을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최소한 음식만큼은 풍족하게 먹고 살았다.
화덕에 구운 빵과 맥주가 이집트인들의 기본 음식이었다. 나일 강 강물을 직접 마시지 않고 맥주를 마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음식을 할 때 사용되는 물은 그 더러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었다.
“나일 강이 카이로 시내 한가운데를 흐른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 같아요. 식수와 하수가 같이 흘러요.”
카이로 시민들이 똥 덩어리와 각종 동물들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강에서 물을 퍼서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것은 파리나 런던, 그 외에 유럽 여느 나라들과도 같았다. 베네치아 시녀들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고산국 왕도에 가서야 깨달았다.
왕도 고북과 고산국의 모든 도시에는 수원지가 따로 있고 상수도가 가정에 연결돼 항상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 그리고 물은 무조건 끓여서 마셨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나라와 달리 고산국에서 전염병이 돌지 않는 이유를 베네치아 시녀들도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카이로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상수도를 만들자. 카이로에서는 연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물을 끓여 마시는 것도 힘들 것 같다. 이럴 때는 소독약을 팍팍 타야지 뭐 어쩌겠어?”
연료를 구하기 어려워 이집트에 흔한 사람과 개, 고양이의 미라를 연료로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왕족뿐만 아니라 평민이나 애완동물이 죽어도 기름칠한 붕대를 감아 미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땅만 파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말린 탓에 불에 아주 잘 탔다.
“그래도 수돗물 맛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앗!”
“에밀리아! 물은 어디서건 항상 끓여 마시라고 했잖아?”
“네. 헤헤!”
이민호는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능력도 좋은 에밀리아가 병에 걸려 고통을 겪거나 죽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표정을 굳히고 엄하게 나무랐다. 다른 시녀들도 고개를 숙이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너희들이 젊어서 병에 걸려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병에 걸릴 수도 있어. 한 번 가르쳐준 것을 잊지 마라.”
“네. 죄송해요. 주인님.”
“하여간 이집트에서는 특히 더 주의하도록 해.”
다른 나라보다 이집트에서 흑사병이 더 자주 유행한 것을 맘루크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 맘루크들이 노예로 팔린 곳이 흑해 연안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지역은 흑사병의 주요 발생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상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무역도시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항상 전염병에 노출돼 있었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유럽의 항구도시들에서도 전염병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번에 마르세유에 전염병이 돌아서 입항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상수도 설치와 유지비용은 어떻게 준비하죠? 카이로 시민들이 그 동안 상수도가 없어도 잘 살아왔는데, 그냥 살면 안 되냐고 반발할 것 같아요.”
“상수도를 만드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나 상수도가 없음으로 인해 증가하는 의료비나 전염병으로 죽는 자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보다는 훨씬 적게 들어. 차라리 상수도를 설치하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돼.”
카이로 성채 안에 살라딘이 파게 했다는 요셉의 우물은 계단 300개를 내려가서 물을 떠야 한다. 그러나 수량이 부족해서 나일 강에 물레방아를 설치해 성채 안에 물을 공급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카이로 성채에서 거주하던 술탄과 총독들도 시민들과 똑같이 똥물을 마시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카이로 성채에 들어온 군의관과 조리사들이 기겁해서 물을 몇 차례 정수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식수는 당연히 팔팔 끓였고, 목욕물과 생활용수도 일단 무조건 끓여서 사용했다. 물통에 물을 받으면 시커먼 흙먼지와 이물질이 가라앉아서 보기에도 끔찍했다.
“하지만 다들 가난해서 수도요금을 낼 돈도 없을 거여요. 고산국처럼 가정마다 상하수도를 연결하기는 어려워요.”
“맞아. 가능하면 싸게 공급하자. 상수도는 시멘트 석관으로 만들고, 모스크에 연결해서 사람들이 공동수도를 사용하게 하는 거야. 빨래터도 따로 만들어서 정화조를 통하게 한 다음 버려야겠어.”
문제는 나일 강이 6,690km나 되는 긴 강이며, 카이로는 나일 강 상류보다 하구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나일 델타 가장 남쪽에 위치한 카이로였지만 강을 따라 올라가면 숱하게 많은 마을과 농경지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에 취수원을 만들든 이미 물은 심하게 오염돼 있었다. 차라리 더 깨끗한 바닷물을 해수 담수화 기술을 적용해서 정제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다른 아랍 지역에는 하수도가 있는 곳이 많던데 여긴 없네.”
“로마 사람들이 세우지 않은 도시니까요.”
일단 급한 상수도부터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예방백신은 모스크를 통해 공급하기로 했다. 이민호는 조선에서 시멘트를 더 생산하고 고산국에서 석관을 만들어 이집트로 보내달라고 혜영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이집트의 모든 지역에 모스크를 비롯한 ‘기도드리는 곳’이 있었고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도 지정돼 있었다. 지방행정이 느슨한 이 시대 이집트에서 모스크는 좋은 행정 보조 기관이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공식 정부기관이 백성들을 직접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도 됐다. 울라마들이 세력이 큰 이유였다.
다음 날 아침, 새벽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모스크 첨탑마다 목청 좋은 무아진들이 내지르는 아잔 소리 때문에 놀란 이민호가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알라흐 아크바르로 시작되고 네 번이나 반복돼서 반란이 일어난 줄 알았으나, 노래에 가까워서 놀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새벽기도를 할 시간이 됐으니 모스크로 오라는 낭송이었고, 하루에 다섯 번 시내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북아프리카 등 다른 곳에서도 새벽마다 여러 번 놀랐으나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지역은 아직 봄일 텐데 카이로는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강수량이 극히 적은 사막 지역이라 먼지도 많이 날렸다.
“그래도 아라비아 반도보다 훨씬 낫다, 뭐.”
이민호는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맘루크 관료들에게 일을 시켰다. 반란에 참가한 맘루크 병사들의 봉토는 이미 회수했고, 이집트군 신병을 모집한다는 이집트 총독의 포고문을 시내 거리마다 붙였다.
예전 맘루크 병영 입구에 아침부터 허름한 옷차림을 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유럽과 달리 웬만하면 다들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포고문을 게시하면서 따로 포고자를 둘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나리! 포고문처럼 말이나 무기가 없어도 상관없습니까? 저는 승마술이나 무술을 전혀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맘루크를 뽑자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어. 나이는 몇인가?”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나이가 좀 많죠?”
“조금 늙어 보이긴 하는데, 서른 이하면 상관없어. 통과! 저기 연병장 대추야자나무 밑에서 기다려.”
“따로 시험을 봅니까, 나리?”
“시험은 따로 없어. 뛰어다닐 정도면 된다니까 웬만하면 합격할 거야.”
맘루크 관리들이 툴툴거리면서 이집트인 지원자들을 병영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술탄이나 후원자 밑에서 평생 무술만 닦던 맘루크들이 보기에는 군인으로서 자격 미달이었으나, 이민호는 보통 이집트인을 병사로 쓸 생각이었다.
체력을 중시하며 창칼과 활을 쓰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리고 용기와 충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군인의 덕목이지만 국민국가가 됐을 때 가장 잘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원한 프랑스군이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와 북부의 민병대들은 신념을 갖고 용감하게 싸웠다. 이민호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군인들이었다.
“저런 약골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계복아. 남자란 말이지.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단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자들은 전쟁터에서는 도망치고 미녀를 지킬 때만 용감하게 싸운다.
“뭐, 저나 여진족 호위들도 도련님을 지킬 때는 정말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생각나서 이집트 빈민들을 군인으로 선발하는 거야. 그 대신 저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만들어줘야겠지. 저들에게 자기 목숨과 가족은 물론 이집트라는 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을 심어주고 싶어.”
이집트군 병사들에게 주는 급료는 도시 비숙련 노동자 수준 정도로서,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초급 장교나 부사관들도 기껏 해야 숙련 노동자 이하 수준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해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고산국이 예외로 보이지만 장인들에 대한 대우가 워낙 좋아서 군인 봉급이 기술자 이하 수준인 것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집트군이 진정으로 용감히 싸우게 만들려면 지킬 것을 만들어줘야 했다. 일반적인 군인들에게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이 용기와 희생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민호는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만들어줘서 스스로 지키게 만들려 했다.
“징집병도 아니고 급료를 받는 병력치고는 지나치게 약체입니다. 훈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래도 저들은 명령을 내리면 위험하더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거야. 불리해지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용병이 아니니까.”
“가족들이 인질이군요.”
“바로 그렇지.”
국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감히 싸운다는 말은, 결국 가족이 인질이라는 소리였다. 국내에서는 용감히 싸울지 몰라도, 해외로 파병할 경우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전락할 수 있었다. 현재 창설하는 이집트군은 순수하게 국내용, 방어용이었다.
오후에 주변 주들에서 맘루크 주지사들이 이민호를 찾아왔다. 어제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맘루크 군대 해산령을 내려서 주지사들은 호위로 데려온 맘루크 병사들을 슬그머니 관리 행세를 시켰다.
“현재 이것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내린 명령서요. 다른 주에서도 똑같이 적용하시오. 군대도 창설하시오. 다만 주의 군대가 아니라 이집트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언제든 병력을 교체하거나 주둔지를 바꿔서 주둔시킬 수 있다는 뜻이오.”
“예, 폐하. 일단 맘루크 병사들의 봉토를 압수하고 연대 병력 3천을 모집해서 훈련을 시키겠습니다.”
“이 자리에 예니체리 장군이 없어서 하는 말인데, 기병훈련은 예전 맘루크 병사들에게 시켜도 괜찮소, 다만 소문만 나지 않게 하시오.”
“제 수하들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폐하.”
주지사들이 보유한 맘루크 병사들은 일단 관리나 호위병으로 전용시켰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왔던 맘루크 병사들은 몹시 어색해 했으나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했다.
얼마 전 총독과 맘루크 지휘관들이 순수하게 군대만으로 반란을 일으킨 게 실패 요인이었다. 주지사들이 보유한 맘루크도 꽤 있었으나, 예니체리에서 긴급 조사에 들어가는 바람에 반란 주모자들이 이들에게 반란 가담을 요구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반란은 실패하고, 덕택에 주지사들과 휘하 맘루크 병사들은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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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앞으로 한두 편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