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58화 (507/1,000)

00558  57. 지중해 순회  =========================================================================

국왕좌승함에서 교황청 깃발을 휘날리는 갤리선을 예인하니 마치 고산국 함대가 교황청 갤리선을 나포해 전리품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 해안 가까이 접근하면 어민들이 볼까봐 해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함대가 기동했다.

며칠 내내 노를 젓다 지쳐버린 수도사들을 보는 것도 민망했다. 군의관들과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보내 수도사들을 구호했다. 수도사들이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오렌지 주스를 많이 퍼 먹였다.

그 날 오후 로마 앞 해안 도시에서 갤리선과 헤어졌다. 수도사들이 덕택에 로마까지 편히 왔다면서 감사 인사를 하고 육지에 내렸다. 그러나 아르노 도사 추기경은 배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추기경 예하. 로마에서 내리지 않소? 우리 함대는 이집트로 가는 길이오.”

“폐하! 제가 함대 기동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게 이탈리아와 지중해 안내를 맡겨 주십시오.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휴! 알았소. 나중에 몰타 섬에 내려주겠소.”

마구 엉겨 붙는 추기경에게 숙소를 배정하고 함대는 남쪽으로 향했다. 추기경이 덴마크 공주하고 교리 논쟁이 붙어서 시끌벅적했다는데 종교 문제는 이민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오후 늦게 이탈리아 반도 남부 나폴리 왕국의 나폴리 항에 함대가 들어섰다. 탐사선을 미리 보내 함대가 나폴리에 입항할 것을 알려줘서 큰 소란은 없었다.

15세기 후반부터 나폴리 왕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상속권을 둘러싼 전쟁에 휘말렸다. 15세기 말의 이탈리아 전쟁에 이어 1501년 루이 12세가 점령한 이후 나폴리는 잠깐 프랑스 영토가 됐다.

그러나 1504년 아라곤이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아라곤 왕국령 나폴리 왕국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현재 나폴리 왕국의 국왕은 필리포 2세로서,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와 동일 인물이었다.

에스파냐 영토에 속한 어느 항구에서나 그렇듯 고산국 함대는 나폴리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발렌시아와 툴롱, 제노아에서 상품 대부분을 팔아치워서 이곳에는 샘플 정도밖에 내놓지 못할 것 같았다.

16세기 들어서부터 에스파냐 본토와 대규모 무역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도시의 성장이 가속화된 나폴리는 현재 지중해 연안 유럽 도시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조만간 파리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된다.

“어서 오십시오, 고산국 국왕폐하!”

나폴리 부왕이 항구에 나와서 이민호를 영접했다. 부왕 페르난도 루이스 데 카스트로 안드라데 이 포르투갈, 레모스 백작 겸 사리아 후작은 비올레타와 동향인 갈리시아 귀족 출신이었다.

“북아메리카 공작부인은 이번에 대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름다운 공작부인을 못 뵙게 되다니 정말 아쉽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제 아들들이 공작부인을 알현하게 될 줄 알고 목욕하고 향수까지 뿌렸는데 말입니다.”

쉰 살 넘은 남자가 이런 말을 하니 이민호는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옆에서 스물 전후의 장남 페드로 페르난데스와 차남 프란치스코 루이스가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미남 청년들이 아내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하하! 폐하께서는 독점욕이 과하십니다. 미인을 얻은 남자는 마땅히 부인을 공개된 자리마다 대동해서 자랑하셔야 합니다.”

이민호는 아르노 도사 추기경과 함께 나폴리 왕궁으로 가서 부왕과 회의를 열었다. 추기경에게서 교황의 성지 순례에 관한 설명을 들은 부왕은 이 계획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동안 나폴리 왕국은 서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에서, 그것도 사라센 해적이 무서워 연안 항해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성에 차지 않았다. 만약 교황의 순례가 성공한다면 해적시대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사건이었으니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부왕은 앞으로 지중해가 다시 무역으로 풍요로워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당연히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나폴리 왕국이 얻을 이익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추기경 예하께 섭섭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로마교황청이 다시 유럽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에스파냐가 교황에게 압력을 가해서 헨리 8세가 교황에게 요구한 이혼 무효화를 선언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헨리 8세가 왕위지상령을 선포해 잉글랜드가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16세기 서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태풍 와중에 여러 가지 요소가 잉글랜드 성공회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교황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에 눌려있던 것이 주요 계기가 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그 후에 잠시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재위 기간 동안 완전히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스파냐 귀족들은 여전히 종교적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고산국 국왕폐하 덕택에 사라센 해적이 지중해에서 사라진 것은 큰 사건입니다만 아직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행사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수확을 할 때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예루살렘을 순례하신다면 오래도록 전쟁이 지속된 지중해에서 기독교세계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중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저희도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일은 이민호와 고산국 함대가 다 하고 과실은 교황과 나폴리가 따먹겠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교황이 명분을 갖게 됐고, 나폴리 왕국은 실체적인 이익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이번 일로 기독교가 승리했다고 말하긴 어렵지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폐하. 고산국 국왕폐하께서는 오스만 제국과도 가능하면 평화를 유지하려 하셨습니다. 유럽이 이슬람을 억누를 힘이 없으니까 이제는 평화를 도모할 때가 되긴 했습니다.”

“사실 양쪽 다 지쳤지요.”

“이때 마침 폐하께서 사라센 해적을 완전히 해산시키는 예기치 않은 대성공을 거두셨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기독교도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사라센 해적의 소멸로 얻어진 승리는 반대편인 기독교의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마침 그 전에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있었지 않습니까?”

이민호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고산국은 아직 지중해 국가가 아니었다. 일단 이집트의 통치권을 인수한 다음 지중해의 평화로 얻어질 과실을 따먹는 일에 동참하기로 했다.

“아직도 무슬림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교황 성하께서 순례하시다니,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십니다. 저희도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알게 모르게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된 나폴리 왕국이 이번 일에 참가하기로 했다. 나폴리 왕국이 로마에서 메시나 해협까지 교황 순례행렬을 보호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의 부왕과 협의해야겠지만, 시칠리아가 메시나 해협에서 크레타 섬까지, 베네치아가 크레타에서 이집트까지 해역을 나눠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고산국 지중해 함대와 몰타 기사단이 교황 함대의 직접적인 호위를 맡는다면 순례 행렬에 위험이 닥치지 않을 것 같았다.

“고산국은 뭘 얻게 됩니까?”

“고산국은 기독교세계의 수호자라는 평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폐하.”

“그런 건 됐소. 사라센 해적 소탕은 진작 기독교 국가들이 했어야 할 일인데 국익 우선순위에 쳐졌던 것뿐이었소.”

“그건 사실입니다만, 오스만 제국의 힘은 보기보다 훨씬 큽니다.”

자세히 찾아보면 에스파냐와 프랑스, 베네치아와 나폴리, 시칠리아와 몰타 기사단 등 지중해의 기독교 국가들에도 해군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몰타의 구호기사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들은 자국 연안만 지키느라 사라센 해적들이 전체 지중해를 약탈하고 다니는 것을 내버려둔 꼴이었다. 덕택에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던 주민들만 지난 수백 년 동안 해적들에게 약탈당하고 노예로 끌려가는 등 시달리게 됐다.

당장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는 지난 세기에 이탈리아 영토를 두고 숱하게 싸웠다. 그 전력을 합한다면 진작 지중해에서 해적들을 소탕하고도 남았다. 오스만 제국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핑계를 대지만, 해적 소탕이 비용은 많이 들고 이익이 되지 않으니 내버려둔 셈이었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서 나폴리 부왕이 주최하겠다는 환영만찬은 사양했다. 만찬을 열면 귀족과 상인들이 잔뜩 몰려올 텐데 당장 나폴리에 판매할 상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함대가 정박한 부두에는 상인들로 북적거렸으나, 판매할 물건이 없다고 하자 상인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부왕이 안절부절못했으나 이민호가 나폴리를 방문한 것은 우연히 중간 기착지로 삼은 것에 불과했다. 교황이 포함된 예루살렘 순례단 보호는 원래 추기경이 알아서 할 일이었고, 지중해가 평온을 되찾은 다음 위험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니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 순례단을 돕든 말든 이민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 상품이 준비되고 나폴리에서 2, 3일 머물 때 크게 연회를 열기로 부왕과 약속했다. 부왕의 아들놈들이 다음에 함대가 방문할 때는 비올레타를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해서 더 밉상이었다.

“나폴리에 온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지.”

환영만찬을 사양한 이유가 있었다. 저녁에 이민호가 호위들, 베네치아 시녀들, 그리고 함대 조리사들을 데려간 곳은 나폴리 시내의 식당이었다. 나폴리 왕궁 주변의 유명한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귀족용 별관 건물에 들어섰다.

테이블마다 앉은 직후에 시간에 맞춰 구운 피자가 연속 들어왔다. 그런데 국왕좌승함의 조리사들뿐만 아니라 각 함에서 한 명씩 뽑은 조리사들이 피자를 보고 몹시 실망했다. 조리사들은 이민호와 혜진이 만든 피자에 이미 익숙해져서, 얄팍한 나폴리 피자를 보고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피자 빵을 왜 이렇게 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바삭바삭해서 좋습니다.”

“유럽이니까 당연히 치즈를 재료로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치즈가 아닙니다. 재료에 포함된 것은 버터입니다. 토마토 소스와 마늘 약간, 올리브 오일도 들어있습니다.”

조리사들이 나폴리 피자에 대한 평가를 하느라 몹시 웅성거렸다. 이민호가 먼저 피자를 잘라서 한 입 먹었다.

“그런 평가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맛부터 봐.”

“예! 전하.”

조리사들이 한 조각씩 떼어 한 입 베어 물다가 말을 잃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한 명씩 일어나서 별관을 나갔다.

“주인님! 조리사들이 왜 저러는 거여요? 몹시 충격 받은 것 같아요.”

“조리 방법을 알려고 하는 거겠지. 재료보다 중요한 것이 조리방법이니까. 맛은 어때?”

“바삭바삭하고 아주 좋아요.”

민영을 비롯한 호위들, 그리고 베네치아 시녀들이 아주 즐겁게 먹었다. 맛있다는 차원을 넘어서 손님이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진다면 그 음식을 만든 요리사로서 최고의 찬사였다.

“아마 90분 동안 벽돌 오븐 안에서 구웠을 거야.”

“90분이나요? 그럼 고산국에서 이런 피자를 만들기 어렵겠어요.”

“점심시간 전에 미리 구울 수도 있지. 식으면 맛없어.”

나폴리 식당 조리사들이 흔쾌히 조리 과정을 공개했다. 고산국 조리사들은 밀가루 반죽부터 시작해 위에 얹는 재료들, 그리고 피자가 벽돌 오븐에 들어가서 구워져 나오는 과정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조리사들이 밤새도록 고민 꽤나 할 것 같았다. 군대나 함대처럼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상관없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식당에서 90분 동안 피자를 구울 식당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선택을 해야겠어요. 맛에 자신이 있으면 예약 손님만 받고도 운영이 가능할 거여요.”

“그야 모르지.”

고산국과 북미 도시들의 식당가에서는 현재 한식 외에 햄버거와 샌드위치, 토스트, 도넛, 치킨, 각종 면 종류 등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러나 피자를 패스트푸드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의 예상이 틀렸다. 일 년도 안 돼서 고산국 왕도에 정통 이탈리아 피자 가게가 생겼다. 그리고 가게는 식사시간 때마다 대성황을 이뤘다. 식당 주인들과 조리사들이 음식의 맛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 작품 후기 ============================

중요한 지역은 아니지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잠깐씩 들르겠습니다.

피자 한 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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