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57 57. 지중해 순회 =========================================================================
이민호와 후궁들이 놀고 있는 산 너머 다른 해변에는 난데없이 천막촌이 생겨났다. 발렌시아에서 결혼한 부부들이 다만 며칠이라도 신혼여행을 만끽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민호가 조리사들과 고기를 충분히 보내서 신랑들이 밤에 무시당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장교들은 결혼 전에 대체로 숫총각이어서 처음에는 조루 증세를 보인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장교들 체력이 좋아서 힘이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며칠 만에 다시 툴롱에 돌아왔을 때 신혼부부들이 헤어져 다른 배를 타면서 눈물 나는 신파극을 연출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신랑들보다 몇 배나 많네?”
“나머지는 신부의 임시 시녀나 친척 동생들이에요. 일 년 안에 발렌시아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가긴 어딜 가? 여자들이 결혼적령기 같은데 신랑은 함대 내에서 찾아보라고 해.”
발렌시아 하급 귀족 여자들이 교육도 잘 받고 미모도 괜찮아 이민호의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쇠퇴했다 해도 발렌시아가 옛날부터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라 여자들이 상재에도 밝았다. 이민호가 보기에 놓치기 아까운 여성 인재들이었다.
만약 청년 장교들이 퇴역한다면 아내와 함께 무역상이나 차리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부업으로 아내 혼자 무역상을 경영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인구가 적은 고산국 본토나 북미에서 여자라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신부들도 부려먹게요? 착취예요.”
“착취라도 해야지. 민영이도 이렇게 호위를 하고 있잖아. 발렌시아 귀족 신부들도 우리 왕실 여자들을 배워야 해.”
“여자들이 일하는 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 애 낳은 여자도 마찬가지야. 애를 적당히 키운 다음에는 일터로 돌아와야 해.”
도시에서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유아원과 유치원이 많이 생겼다. 부족하면 학교나 종교시설에 부설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래도 고산국 본토에서는 퇴근시간이 일정하기 때문에 애 혼자만 내버려두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다산을 장려하기 때문에 서너 명 이상을 낳은 여자들은 애들이 웬만큼 성장할 때까지 다른 일을 하기 어려웠다. 기본소득 덕택에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은 없지만 고산국 전체적으로 보면 일손 부족이 만연했다. 인구는 적어도 문제 많아도 문제였다.
그 사이 위그노들이 계속해서 툴롱으로 몰려들었다. 전염병이 도는 마르세유로 통하는 길이 국왕군에 의해 차단되는 바람에 약간 우회해야 했으나 며칠 만에 2천 명 정도가 더 모였다.
이주민을 태우는 수송선이 한 척밖에 안 남았는데 벌써 3천 명을 꽉꽉 채웠다.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짐을 다른 수송선으로 옮기는 문제로 부두에서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웠다. 화물에 숫자를 붙이고 주인에게 번호표를 나눠주었다.
“그럼 대령께 잘 부탁하겠소.”
“맡겨두십시오, 폐하! 위그노를 보호하는 것은 프랑스 국왕폐하의 명과 같습니다.”
왕의 망루 수비대 사령관에게 일정 금액을 주기로 하고 뒤늦게 온 위그노들의 보호를 맡겼다. 이들이 발렌시아로 가는 상선에 탈 때까지 왕의 망루에서 보호해주기로 했다.
발렌시아에서도 건물 몇 채를 사서 위그노 이민자들의 임시 숙소로 만들었다. 발렌시아 부왕이 발 벗고 나서서 일을 도와주었다.
며칠 후 함대가 제노아에 도착해서 상품을 잔뜩 풀었다. 제노아 상인들과 일부 운 좋은 밀라노 상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경매에 참가했다. 이들 상인들에 의해 육로를 거쳐 독일 남부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빈까지 고산국 상품이 퍼져 나갈 것이다.
남는 상품 대부분을 이곳에서 판매했다. 유럽에서 악어가죽 가방이 제대로 평가받은 곳은 제노아가 유일했다. 상인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폐하! 혹시 악어를 구할 곳이 있겠습니까? 아! 나일 강에도 악어가 사는군요.”
“살지. 바다악어 다음으로 가죽 재질이 좋은 게 나일 악어야.”
그러나 이집트도 이번에 이민호 손에 들어왔다. 북미와 호주, 동남아시아 등 우연이겠지만 악어 산지는 모두 이민호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
남는 곳은 인도와 버마 등 일부에 국한됐고, 그런 곳에 사는 악어 종류는 가죽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상인들이 악어가죽에 욕심냈지만 어쩌다 보니 독점이 되어버렸다.
사실 악어의 뱃가죽은 별로 튼튼하지 못해 자연 상태에서 자란 악어가죽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호주 장영실 항에 대리석을 바닥에 깐 악어농장을 지어 바다악어를 키우기로 했다. 나일 강 유역에도 악어농장을 적당히 하나 만들 계획이었다. 악어가죽을 생산하기 위해 키우는 악어는 사실 크지 않은 편이라 사육사가 위험할 일은 없었다.
함대가 제노아를 떠나 이집트로 출발하려는 순간 갤리선 한 척이 항구에 급히 들어왔다. 갤리선이 부두에 접안하는 순간 노를 젓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노를 젓던 사람들 중 노인 한 사람이 허겁지겁 사제복을 걸치더니 국왕좌승함으로 달려왔다. 노인이 입은 복장과 모자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민호는 환갑 넘은 노인이 갤리선의 노까지 젓다니, 그 나이에 참 정정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함대 출발을 늦추도록 함장에게 지시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저는 교황청 특별대사 직을 수행하는 추기경 아르노 도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추기경 예하.”
노인은 프랑스의 렌 대주교였다가 20일 전에 추기경에 임명된 아르노 도사(Arnaud d'Ossat)였다. 그는 추기경 서임 직후 바이외(Bayeux)로 교구를 옮겼으나, 여전히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일단 함대가 출항해야 해서 국왕좌승함 뒤에 교황청 갤리선을 달고 남쪽으로 항해했다. 아르노 도사 추기경과 사제 몇 사람이 국왕좌승함에서 이민호와 대화를 나눴다. 예전에 전단 지휘실로 사용하던 곳을 알현실로 전용해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일단 지중해에서 사라센 해적을 퇴치하신 일을 경하 드립니다. 교황 성하께서 폐하께 감사인사를 전해 올리라는 명을 받고 폐하를 만나러 몰타 섬부터 발렌시아와 툴롱을 거쳐 제노아까지 온 지중해를 돌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오늘에야 주님의 뜻으로 폐하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런! 서 지중해를 한 바퀴 도셨구려. 고생하셨소이다.”
알고 봤더니 갤리선에서 노를 저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수도사들이었다. 그 동안 갤리선에서 노를 젓던 무슬림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구호 기사단을 통해 노잡이들을 북아프리카 고향에 보내줘서 노를 저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북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발렌시아와 툴롱을 지나가면서 교황청 갤리선은 계속해서 허탕을 쳐야 했다. 갤리선에서 노를 젓던 수도사들이 너무 지쳐서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까지 직접 노를 저어야 할 정도였다.
“참! 이번 일로 고생한 구호기사단을 비롯해 구출기사단과 구출수도회에 대한 격려는 해주셨소? 친서를 교황 성하께 올렸는데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소.”
“당연히 교황 성하께서 폐하의 친서를 읽으셨고, 너무나 감동하셔서 기도까지 올리셨습니다. 세 조직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들을 위해 성인시성위원회의 조사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 아주 잘 됐소.”
그런데 추기경이 잠시 뜸을 들여서 이민호가 조용히 기다렸다. 역시나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침 내년 1600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주빌리(Jubilee), 성년(聖年)이며 대사(大赦)의 해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신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폐하!”
“헉! 조금 무리하신 것 아니오?”
“크레타 섬과 이집트를 거쳐 배편으로 가시면 안전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사라센 해적을 퇴치해주신 덕택입니다.”
추기경의 말처럼 교황의 성지 순례는 이민호가 지중해에서 사라센 해적들을 퇴치하고 이집트를 위임통치 받은 것 때문에 가능해졌다. 25년 만에 돌아온 성년을 맞은 교황이라면 예루살렘 순례는 당연히 갈구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시간이 좀 부족하구려. 우리 잘 협조해서 반드시 교황 성하와 성도들의 성지 순례가 가능하도록 해냅시다.”
“도와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실제 역사에서 1600년에만 연인원 300만 명의 신도가 여러 지역의 성지를 순례했다. 교황이 예루살렘을 방문한다면 수많은 순례자들이 함께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안전하게 확보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 지배자들이 기독교도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용했으나, 이미 수백 년 동안 전쟁을 하고 난 이 시대에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은 예루살렘 인근을 통치하는 무슬림 태수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순례를 허용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례 중인 광신도가, 또는 이익을 바라는 기독교도가 무슬림들을 공격하거나 약탈하면 두 문화권 사이에 거대한 전쟁이 터질 수도 있었다.
1차 십자군에 앞서 출발한 군중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도중 시장에서 물건 값을 놓고 상인과 싸우다가, 또는 방앗간 주인과 말다툼하다가 전쟁이 났다. 이미 몇 군데를 약탈했던 군중십자군이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기병대나 동로마제국군에게 박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항구 문제도 있었다. 텔아비브는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모래언덕에 불과했고 아슈도드, 아랍어로 이스두드, 헬레니즘 시대에 아조투스라 불린 곳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중해 해안 항구였다. 그러나 아슈도드는 인구 4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보통은 그 남쪽 가자 시나 아스칼론, 아랍어 에슈켈론이 순례자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배에서 내리는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 유럽 기사들이 점령하고 살라딘이 탈환하고 12세기에 몽골군이 무너뜨린 바로 그 가자였다.
“폐하께서 지중해의 해적을 사라지게 하신 일은 실로 기적이었습니다. 노예시장에서 팔릴 예정이었거나 해적선에서 강제로 노를 젓던 수만 명의 성도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역시나 기적입니다.”
“신도들을 고향에 보내느라 교황청에서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폐하! 만약 폐하께서 성도였다면 서거하신 후에 성인으로 시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진지하게 개종을 고려해보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하하! 추기경 예하께서는 나를 빨리 천국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나셨소?”
‘천국에는 저런 새끼가 필요해. 당장 죽여 버려야지.’라는 인터넷 짤방이 언뜻 생각났다.
“앞으로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시고 제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천국에 가십시오. 하하!”
추기경이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민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수 있다면 로마교황청은 그야말로 호랑이 몸에 날개를 다는 셈이었다. 당시 유럽 국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경제력, 영토를 갖춘 국왕인 이민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신교도 국가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민호는 국내에서 고위 성직 임명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기독교도가 아니기 때문이었지만, 이는 가톨릭교회의 권력 강화와 경제력 상승을 가져왔다.
이민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고산국 본토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청으로 보내는 자금이 엄청났다. 천주교회 건물 신축과 관리 비용은 다른 종교 사원들도 마찬가지지만 모두 국비로 지원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산국 가톨릭교회에서 빈민구제를 하려고 해도 고산국에는 빈민이 없었다. 신부들은 고스란히 남은 교무금과 헌금을 거의 그대로 로마로 보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수확을 하는 올해부터는 북미에서도 엄청난 자금이 에스파냐 교구를 통해 교황청으로 흘러들어올 것으로 교황청에서 기대했다. 일반 사제들과 달리 교황청은 세계 가톨릭교회를 경영하는 입장이므로 자금은 중요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