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55화 (504/1,000)

00555  57. 지중해 순회  =========================================================================

작년에 프랑스 국왕과의 회담에서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어서, 고산국 함대의 툴롱 항 입항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몰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부러 함대 기함에 오스만 제국 해군기와 제독기를 달고 들어갔더니 툴롱 전체에 소란이 크게 일어났다.

“프랑스는 오스만과 여전히 동맹 아닙니까, 전하? 왜 저리 놀랍니까?”

“동맹이지. 오스만 제국 해군에게 도시를 비워줘야 하는 줄 알고 시민들이 혼란에 빠진 것 같다.”

밀라노 공작령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증조할머니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1525년 밀라노 남쪽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며 에스파냐에 포로로 잡힌 국왕은 영토 양도 조약을 강요받았다. 1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서도 질병에 고통 받고 가족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불행을 겪으며 최후의 선택으로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36년에 프랑스와 오스만 연합함대가 신성로마제국과 제노아 등 이탈리아 동부 지방을 공격했을 때는 마르세유를, 1543년에 바르셀로나와 사보이 공작령 니스를 칠 때는 툴롱 항을 오스만 함대의 근거지로 제공했다. 이때 툴롱 시민들 중에서 성인 남자들은 오스만 함대를 위해 일하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으로 소개시켰다. 국왕의 칙명에 의해 가톨릭 성당도 임시로 모스크로 개조할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는 종교가 다른데 참 잘도 연합했습니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너무 강해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교황이 한 편이었어. 당시 프랑수아 1세는 가능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거야. 이교도 오스만은 아무 것도 아니지.”

젊은 함장은 호기심이 많아 나중에 크게 성장할 인물이었다. 몇 마디만 해주면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해서,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그럴 듯한 대답을 할 정도였다.

“아까 해안 요새는 봤지? 어땠어?”

“투우우우우르 르와얄라 비슷하게 발음하는 요새 말씀이십니까? 5인치 함포 몇 발이면 무너지겠습니다.”

“함장 자넨 참 낙관적이군. 기회가 되면 프랑스어 통역을 데리고 요새를 방문해보게. 화가도 함께. 프랑스군이 요새 출입을 거부하면 산등성이에서 내려다 봐도 돼.”

“예. 간첩질이군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함대는 툴롱 항에 들어섰다. 프랑스 관리들은 물론 장교들까지 나와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대규모 함대의 입항을 도와줬다. 국왕좌승함에 영접하러 나온 관리가 물었다.

“고산국 함대의 입항을 환영합니다, 폐하! 그런데 입항 목적은 무엇입니까?”

“교역과 친선.”

강력한 군함들이 입항해 툴롱 전체가 불안한 와중에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시민들은 불안에 떨더라도 상인들은 쌍수를 들어 고산국 상품을 환영했다.

그리고 해군 장교들이 프랑스 해군 장교들의 안내로 툴롱 항 주변에 깔린 방어시설들을 참관했다. ‘왕의 망루’도 빠지지 않았고, 함장은 이민호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 사이 툴롱의 위그노 대표들이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상공인, 법률가, 의사 등 직종이 다양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저희들은 프랑스 신교도, 위그노입니다.”

“낭트 칙령이 내려져서 이제 종교는 상관없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왕리 4세 국왕폐하께서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셨지만 저희들은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살아남았군.”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왕의 망루로 피난 가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이번에 부임한 왕의 망루 수비군 사령관은 위그노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구교 신자입니다. 폭동이 일어나더라도 더 이상 저희들을 숨겨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허락해준다면 함대에 동승해서 북미로 이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을 배에 태워주면 자칫 이 지역 영주인 기즈 공작과 충돌할 우려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구한 해방노예라면 노예 주인이 고산국 국왕이라는 핑계로 거주지를 벗어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어려웠다.

“프랑스 국왕 앙리 4세하고는 이민 협정을 맺었지만 국왕과 원수 사이인 기즈 4세 공작이 허락할 것 같지가 않아. 미안하지만 함대에 태워줄 수는 없어. 그렇다면 밀항하는 수밖에 없겠군. 일단 주변국에 빠져 나가서 고산국 배를 타면 어떨까?”

“주변에 온통 가톨릭 국가들뿐입니다. 저희들더러 죽으라는 말씀이십니다.”

프랑스 남부에는 고산국 상선이 들어올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고산국 배를 타기 위해 주변국이라는 에스파냐나 로마, 몰타 섬에 가야 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는 신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고산국 배에 타는 것보다 장작더미 위에 올라서는 것이 더 빨랐다.

“기즈 공작에게 허가를 받는 방법은 없겠나? 다른 위그노들을 위해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고산국 또는 이주 희망자가 프랑스 국왕이나 영주에게 10리브르를 지불하고 북미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곳곳에 영지가 산재한 기즈 공작령에서는 그 협정이 통하지 않았다.

“이민을 가려면 전 재산을 두고 가야 합니다.”

“버려.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위그노 대표들이 입을 떡 벌렸다. 상공인이라는 사람이 부들부들 떨다가 항의했다.

“폐하께서 저희들을 우습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재산만 해도 1천 리브르가 넘습니다!”

“북미 농민 일 년치 수입밖에 안 되네?”

이 시대에 마음대로 이민을 갈 수는 없다 해도 길은 많았다. 일단 집과 농지, 공장 등을 매각해 돈으로 바꾼 다음 함대에 예치하고 그 다음 프랑스 관리들에게 몸수색을 받아 몸만 오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며칠 동안 툴롱에서 위그노 1천여 명이 함대에 탑승했다. 상인과 직공, 의사와 법률가 등 이민호가 좋아할 만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에밀리아! 이런 식으로 이민을 받는다면 피차 피곤하겠다. 주 프랑스 대사에게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하라고 해야겠어. 지난번에 프랑스 국왕과 협정을 맺었어도 기즈 공작의 영지에는 적용되지 않아.”

“위그노들이 이민을 쉽게 하도록 말씀이죠? 하지만 우리 상선들은 프랑스에서 오직 르아브르에만 입항하고 있어요. 남부 프랑스에 사는 사람들은 북부로 이동하기도 어려워요.”

“남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교도를 화형 시키지 않을 만한 곳이 있나?”

“베네치아를 뺀다면, 아! 발렌시아가 있어요. 인구 3분의 1이 모리스코였으니까요. 이따금씩이라도 상선 왕래가 있으니 신교도들을 태워줄 거여요.”

“발렌시아 부왕에게도 친서를 보내야겠군.”

이주민 모집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문제가 됐다. 마르세유에 전염병이 돌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됐다. 프랑스 국왕의 명령을 따르는 다른 항구를 입항지로 구해보기로 했다.

“폐하! 저희들은 로마입니다.”

“집시 말인가?”

시커먼 중년 사내들 10여 명이 몰려와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이들은 집무실과 다른 방을 기웃거리고 온갖 장식품을 손으로 만지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다 호위에게 걸렸으나 물건은 어느새 옆 사람에게 빼돌린 다음이었다. 여진족 호위가 권총을 들이밀면서 물건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으나 집시 남자들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생사람 잡는다고 항의했다. 이런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됐다.

“저희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정착민들이 저희들을 집시라고 불러서 멸시하곤 하지요. 로마, 지역에 따라 롬은 사람, 또는 순례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집시라고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너희들한테 어떤 이름을 붙이든 멸칭이 될 거야.”

집시를 가리키는 롬 또는 로마가 로마제국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하나, 집시들이 전 유럽과 서아시아를 유랑하면서 이미 지나친 나라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 집시가 이집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체코인을 뜻하는 보헤미안도 집시를 뜻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나라 없이 유랑하는 저희들이 정착민들에게 차별을 받아서 일자리를 제대로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도둑질이나 구걸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주면 한 곳에 정착해서 열심히 일할 거야?”

“헤헤! 그럴 리는 없지요. 저희들은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말입니다.”

꼴에 정착민들을 토지에 묶인 노예라고 경멸하는 자들이 집시였다. 현대 국가에서 복지제도를 비판하는 자들이 우려하는 모든 악습을 이들 집시들이 갖고 있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집시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이들을 단번에 내쫓지 않고 차분히 바라봤다.

집시들을 시베리아에 정착시킬 경우 십중팔구 굶어죽을 것 같았다. 주변에 구걸하거나 도둑질할 마을이 드물기 때문이다. 북미에서 철도를 놓는 일에 종사시킬 경우 기차 사고가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철도 자체가 처음부터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이 당시 유럽인들은 물론 이민호에게도 집시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나빴다.

“그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돈을 주십시오. 북아프리카 해적에게 붙잡혀간 기독교도 노예들한테는 금화를 세 개씩이나 나눠주면서 왜 저희한테는 안 주십니까? 인종 차별입니다. 당장 내놓으십시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는 자들이었다. 만약 이런 자들을 북미에 정착시킨다면 순식간에 주변을 온통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

동유럽 일부 국가에서 집시들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특히 체코는 공동주택을 집시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거주시켰다. 그러나 집시들은 무료로 나눠준 주택의 변기와 창문 등 기물을 다 팔아먹고 공동주택이 처음부터 부실공사였다고 시위를 벌였다. 답이 없었다.

“꺼져.”

“공짜로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애들을 맡기겠습니다. 한 명에 금화 두 닢만 주십시오. 똥밭에 굴려도 살아남을 튼튼한 놈들입니다.”

문제는 자유롭다고 우기는 집시들이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라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은 가장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가장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구걸이나 도둑질하라고 밖으로 내몰았다.

“자식들을 노예로 팔려고? 너희들은 자유민이라면서 자식을 노예로 팔아?”

“에이! 고산국에는 노예 제도가 없지 않습니까? 어린애와 여자들은 폐하께서 잘 돌봐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알아서 살겠죠.”

고산국 북미에서 유일하게 이민이 거부당하는 인종집단이 집시였다. 작년부터 집시들이 고산국에 이민자로 입국했다가 이것저것 받아먹은 다음 유럽으로 가서 다시 입국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려고 했다.

그 정성이면 차라리 작은 땅을 얻어 밭을 일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으나, 집시들은 땅을 일구는 것을 천시했다. 목축을 맡겨도 가축을 다 팔아먹고 도망갔다고 우기면서 다시 가축을 달라는 자들이었다. 개척도시 시장들이 학을 떼는 인종이라서, 결국 작년 말부터 입국 심사 과정에서 입국이 거절당하고 유럽으로 추방됐다.

“자식들이 아니라 유괴한 애들이겠지?

“유괴한 애들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어쨌든 튼튼한 애들입니다. 지금까지 먹이고 재운 비용만 해도 엄청납니다.”

이민호는 집시 남자들에게 애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대략 3세부터 15세 이하로 남녀 아이들이 500명이나 됐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고산국 해병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해군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툴롱의 신부들과 수녀들까지 나와 있었다. 이민호는 신부들에게 아이들을 구별하라고 요청했다.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집시는 북인도를 떠나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들어온 자들로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에는 15세기 중반 이후에 유입됐다. 그래서 지난 100여 년 사이에 혼혈이 약간 진행됐더라도 대부분의 집시는 프랑스인과 외형적으로 확연히 구분됐다.

프랑스인 아이들이 집시처럼 머리를 안 감고 집시와 같은 옷을 입어도 확실한 차이가 났다. 애매한 경우 아이에게 프랑스어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해서 대충이라도 외우면 프랑스 아이들이 모인 쪽으로 보냈다.

“프랑스 아이들은 300명 정도입니다, 폐하. 아마도 집시들에게 유괴당한 아이들 같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어떻게 하겠냐고? 당연히 키잡이지.

물론 농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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