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54화 (503/1,000)

00554  57. 지중해 순회  =========================================================================

57. 지중해 순회

거의 여섯 달 만에 발렌시아에 다시 입항했다. ‘발렌시아 왕국’의 부왕 후안 알폰소 피멘텔, 베나벤테 백작은 이번에도 고산국 함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귀족들도 항구에 많이 나왔고, 저번처럼 시민들도 잔뜩 몰려나왔다.

“폐하 덕택에 잘하면 발렌시아가 세비야를 뛰어넘는 무역항으로 발돋움하겠습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요.”

“발렌시아 왕국의 귀족들이 항구에 이렇게 많이 나온 것은 저도 처음 봅니다.”

마닐라 갈레온 몇 척의 적재량만으로는 에스파냐의 귀족 사회에 필요한 사치품을 매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는 사이에 고산국의 상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발렌시아처럼 동쪽에 치우친 지방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고산국 국왕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왔으니 발렌시아 귀족들 사이에 기대가 컸다. 작년에 부왕이 주최한 환영만찬과 무도회에서는 참석한 귀족 모두에게 선물을 돌려 감동시킨 적이 있었다. 오늘 밤 만찬과 무도회에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몰려올지 알 수 없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호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상품을 충분히 내놓겠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귀족과 시민들이 참으로 기뻐하겠습니다.”

발렌시아는 지중해에서 손꼽히는 큰 항구도시로서 15세기에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유럽에 비단을 공급하는 최대의 시장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대서양 항로가 열리고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면서 발렌시아는 100년 동안 쇠락해 지금은 낡은 건물이 이어진 활기 잃은 도시로 전락했다.

발렌시아는 16세기 초반부터 이어진 무슬림들의 반란, 독일인 또는 형제단이라 불린 직공 길드들의 반봉건 및 반왕정 봉기, 흑사병, 사라센 해적으로 인한 무역 중단 등 온갖 문제를 겪어왔다. 유일한 경제적 돌파구가 신대륙 개발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카스티야인들의 특권이었다. 카스티야와 연합왕국인 아라곤을 비롯해 발렌시아, 카탈루냐, 마요르카 주민들은 신대륙의 정복과 탐험, 상업적 개발에 참가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모리스코인들의 추방으로 농업경제와 수공업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발렌시아 인구 3분의 1이 북미로 이주하거나 이주를 준비하고 있어서 농, 공, 상업 등 모든 산업분야에 투자한 귀족들의 파산이 이어졌다. 발렌시아 경제는 100년 넘게 산 넘어 산이었고, 고산국 함대의 방문을 진정으로 반길 수밖에 없었다.

“민영이 예뻐. 너희들도.”

“주인님도 멋지세요.”

만찬에 앞서 이민호를 비롯한 연회 참가자들은 오후 내내 몸단장을 했다.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은 민영이 이민호의 파트너를 맡았고 두 사람을 로마 여신들처럼 차려 입은 베네치아 시녀들이 둘러쌌다.

갈라티아 시녀들과 이번에 왕립여학교를 졸업한 신입들도 화려하게 치장했다. 아이누 후궁들은 전통 복장과 흡사하면서도 이민호의 취향이 반영된 민속 복장을 차려 입었다.

다만 덴마크의 헤드비히 공주와 시녀들은 신교도들이라서 국왕좌승함에 남기로 했다. 헤드비히의 맏언니 앤 공주 같으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게 시집가자마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결혼 전에는 함부로 개종하면 욕먹는 법이었다.

“다들 미혼이지? 잘 놀아보게나.”

“전하! 연회장에서 신부를 구해도 됩니까?”

“능력이 된다면.”

일부 고급 장교들과 미혼 장교들도 예복을 차려입고 만찬에 참가했다. 청년 장교들은 근대 유럽식 예복을 입고 이순신과 계복 등 고위 장성들은 전통 예복을 입어서 같은 군인 예복이라도 복식이 다채로웠다.

만찬장 바깥에서는 발렌시아 주 전역에서 하급 귀족들이 몰려와 선물을 받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방명록을 작성한 남자는 모피 모자, 여자는 진주 반지나 귀걸이를 받았다.

만찬에 참가한 귀족들 숫자가 대폭 늘어나서 작년보다 작은 선물이 됐다. 그러나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 팔면 웬만한 하급귀족의 일 년 수입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쯧! 축구 선수나 선물이나 줄기차게 두 도시에 팔아야겠군.”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폐하?”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하!”

만찬장의 메인테이블에는 부왕 부부와 이민호와 민영, 이순신과 계복 등이 참가했다. 작년보다 만찬 참가자가 세 배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북적거리니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고조됐다.

특히 만찬에 대거 참가한 고산국 장교들과 귀족 처녀들이 만찬장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산국 청년 장교들은 몇 마디 배운 스페인어를 반복하면서 선물을 돌리며 귀족 처녀들의 환심을 사기 바빴다. 작년에 비해 검은 머리 귀족 처녀들의 비율이 확 늘어난 것을 보면 고산국 청년 장교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염색한 것이 확실했다.

“폐하께서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모두 소탕하고 기독교도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 대업을 끝내신 것인지요?”

“앞으로 지중해에서 해적들이 설칠 일은 없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좀 더 지켜봐야지요.”

“대단하십니다.”

부왕이 몇 번이나 감탄했다. 백 년 넘게 에스파냐를 괴롭힌 사라센 해적을 단 며칠 만에 소멸시켰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리기 직전에 구한 기독교도 수만 명이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소문을 과장해 퍼뜨렸다. 덕택에 고산국 함대는 더욱 유명해지고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가와 군인들은 소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예전처럼 발렌시아가 지중해 무역에서 큰 역할을 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직공들이 예전처럼 많지 않습니다, 폐하. 벌써 예전에 살 길을 찾아 다들 발렌시아를 떠났지요.”

계속된 경제적 어려움과 직공 길드들의 반란 이후 발렌시아의 상공업은 급격히 후퇴했다. 사라센 해적들 때문에 무역이 막힌 마당에 최근 모리스코인들까지 북미로 이주해서 발렌시아 귀족들과 상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중개무역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만, 발렌시아에서 상업이 활발해지면 공업도 발전하겠지요.”

“신대륙의 은으로 에스파냐 전체가 흥청망청하는데 유독 발렌시아만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왕인 제가 무능한 탓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발렌시아가 지중해 무역을 주도할 시대가 올 것입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보낼 친서를 발렌시아 부왕에게 맡겼다. 지중해에서 설치던 사라센 해적들을 소탕했으니 오스만 제국과도 사이좋게 지내라는 권고를 담았다. 마지막에 펠리페의 친구라고 서명해서, 나중에 듣기로 펠리페 3세가 꽤나 기뻐했다고 한다.

대서양에 대부분 함대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에스파냐 입장에서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지중해를 고산국 함대가 안정시켜 준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동안 사라센 해적을 막기 위해 지중해에 배치한 함대와 방어 병력을 대거 대서양 방면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덕택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수세에 몰려 아시아 향료제도로 가는 길에 집중할 수 없게 됐다.

만찬은 성황리에 잘 끝났다. 청년 장교들은 무도회에서 눈이 맞은 귀족 처녀들과 쌍쌍이 손을 잡고, 제대로 출지도 모르는 춤을 추면서도 즐거워했다.

그런데 만찬이 끝나고 귀족 처녀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장교들이 있어서 허가해줬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스파냐가 동맹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사는 잘 돼?”

“발렌시아가 다 쓰러져 가는 명목상의 왕국이라 하지만 아직도 저력이 남아 있어요.”

다음 날 상품을 대량으로 시장에 풀었다. 전에 판매했던 옥 도자기나 나전칠기, 향신료와 비단뿐만 아니라 진주와 모피, 심지어 악어가죽 가방까지 대량으로 판매했다.

비단 시장은 전성기에 비해 규모가 줄어서 함대에서 조금만 풀어도 상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발렌시아에서 소비하기보다는 다른 도시로 보내기 위해 매입하는 경우가 더 많아 그나마 목표 판매량을 채웠다.

그러나 향신료만큼은 얼마든지 사들였다. 에스파냐 내의 다른 도시로 가져가지만 해도 큰 이익이 날 상품이었다. 무르시아나 바르셀로나는 대도시권에 속한 인구가 훨씬 많았고, 여차 하면 최근 에스파냐와 관계가 개선된 프랑스의 툴롱이나 마르세유에 가서 팔 수도 있었다.

문제는 발렌시아에서 수입할 것이 약간의 식량과 오렌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함대 조리병들이 총동원되고 수병과 해병들까지 도와줘서 엄청난 양의 오렌지 주스를 며칠 동안 짜냈다. 끓여서 잘 밀봉해 찬 곳에 두면 과일을 구하기 어려운 발트 해에서 장기간에 걸쳐 요긴한 비타민 공급원이 될 수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수입한 가장 비싼 것은 귀족 처녀들이었다. 고산국 장교들이 에스파냐를 동맹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몇몇 청혼에 성공한 청년 장교들은 주변으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그러나 장교들이 다시 발렌시아에 오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서 골치를 썩였다.

“흠.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면 당연히 남자가 여자 집안에 오랜 기간 남아 있어야지요.”

“예?”

이민호는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이순신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조선 중기까지 율곡 이이나 곽재우처럼 신랑이 여자 집안에 남는 경우가 더 흔했다. 조선의 혼인 풍습은 고산국에서도 대가족을 이룬 집안에 대체로 적용됐다.

이 시대에는 신혼부부가 신부의 집에서 살다가 자식을 적당히 키운 다음에야 신랑의 집으로 가거나, 혹은 아예 신부 고향에 눌러 사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순신의 사위도 결혼 후 몇 년 동안 아산에서 지냈다.

“장교들인데 군에서 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장교들은 군무를 수행하면서 가끔 얻는 휴가를 이용해 처가에 가서 신접 생활을 해야지요. 장교들도 그런 어려운 생활을 각오하고 청혼했겠지요.”

에스파냐 귀족 여자들을 납치하려다가 오히려 멀쩡한 장교들을 납치당하게 생겼다. 이민호는 괜히 청년 장교들을 만찬에 참가시켰다면 뒤늦게 땅을 쳤다.

그러나 신부 집안인 발렌시아 귀족들은 당연히 신부가 신랑 집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유교가 보수적이라는 사실만 아는 발렌시아 귀족 가문들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신부를 신랑에게 떠맡겼다.

그래서 고산국의 결혼 풍습을 알려주지 않은 채 신부들을 함대에 데려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민호가 자금을 풀어 신부들 집안에 선물을 잔뜩 안겼다. 딸 팔아서 팔자 고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급 귀족 가문이라면 몇 년 동안 풍족하게 지낼 만할 정도였다.

“제기랄! 큰일 날 뻔했어.”

“신부들은 신랑과 동침시킬 겁니까?”

“무슨 소리! 수송선에 신부들 거처를 마련하고 철저히 지켜! 원정 끝날 때까지 각방을 사용한다.”

청년 장교들을 빼앗길까봐 기겁했던 이민호는 결혼에 성공한 신랑들에게 사소한 복수를 해줬다. 그러나 이번에 장교들과 결혼한 20여 명의 신부들에게는 국왕 하사품이라 해서 잔뜩 선물을 안겨줬다.

나중에 원정이 끝나고 왕도에 돌아가서 신부들 얼굴을 처음으로 봤는데, 역시나 검은 머리 일색이었다. 나중에 절반 정도의 신부들이 염색이 풀리고 나서 신랑과 사소한 분쟁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에스파냐 신부들을 크게 환영을 해서 청년 장교들은 신부의 머리색에 대해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함대는 프랑스 남부로 향했다. 바르셀로나는 발렌시아 상인들의 영업 구역으로 내버려두고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려 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소문을 듣고 피하기로 했다. 항구 입구의 작은 돌섬 위에 자리 잡은 샤토 디프 성으로부터 보호받는 마르세유 항구에 사라센 해적은커녕 프랑스 상선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마르세유 동쪽 툴롱 항이었다. 탁 트인 마르세유보다 남쪽 반도와 북쪽에서 쭉 뻗은 반도가 항구를 파도로부터 보호해주는 툴롱 항이 항구의 입지로 훨씬 나았다.

북쪽에서 방파제처럼 튀어 나온 반도 끝에는 La Tour Royale이라는 원형의 요새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왕의 망루’라는 뜻을 지닌 이 요새는 프로방스가 프랑스 영토가 되고 나서 얼마 후인 1524년에 완공된 이탈리아식 해안 요새였다.

이탈리아 건축가 지안-안토니오 델라 포르타는 원형 요새를 여러 층, 여러 겹으로 설계해 방어력과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17세기 후반의 유명한 요새 건축가 보방도 감탄할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제목은 대충...

프랑스와 이탈리아 잠깐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