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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549화 (498/1,000)

00549  56. 지중해 원정  =========================================================================

“그래도 절반 이상이 항복해서 다행이오.”

“고산국 국왕폐하의 위엄이 대단하십니다.”

트리폴리 총독 이브라힘 파샤는 사략선으로 등록된 해적선의 선원 대부분이 반기를 들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3분의 1은 도망치고 3분의 1은 항복했다. 그만큼 고산국 해군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래도 트리폴리 남쪽에 진을 친 해적이 1만 5천 명이라면 트리폴리에 파견된 소수 예니체리와 해군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렇다고 반란 뒤처리 문제로 정신이 없는 이스탄불에서 병력을 보내줄 경황도 없었다. 결국 오스만이 아니라 고산국에서 해결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 죽일 수는 없고, 일단 선무 공작을 시도하기로 했다. 해적들이 제법 앙탈을 부리더라도 좀 두들겨 팬 다음 북미로 데려가서 일꾼으로 부리고 싶은 이민호였다.

“사략선 선장들은 들어라! 저들은 오스만 제국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반역자들이다. 하지만 고산국 국왕인 나는 관대해서 나를 향해 칼을 뽑았다 해서 무작정 몰살시키지는 않겠다. 너희들은 물론 저들에게도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겠다. 그 전에, 고향에 돌아갈 자들은 언제든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고향에서 농사지을 자들은 지금까지 해적으로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바다에 나오지 않게 하려면 해적들에게 먹고 살 길을 제시해줘야 했다.

물론 남의 것을 빼앗는 해적질을 업으로 삼았던 자들이라 쉽게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한 지역에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호주나 북미 일부 지역도 처음에는 범죄자들을 정착시켜 개발했었다. 범죄자들에게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너희들은 트리폴리 파샤에게 부탁해서 이곳 농민으로 정착할 수도 있다. 그럼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겠지. 만약 지금처럼 바다를 누비며 먹고 살고 싶다면 고산국에서 선원으로 고용해주겠다.”

“우와! 관대하십니다, 폐하.”

“북미에 정착해 대서양을 왕복하는 상선에서 일하거나, 또는 인도양에서 일할 수 있다. 알아서 선택해라. 다만 너희들은 더 이상 지중해에서 선원으로 일할 수는 없다. 해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중해에는 일자리가 없잖아?”

항복한 선장들이 술렁거렸다. 반응을 살펴보니 이들 중 절반 이상, 저항하는 해적들 중에서 4분의 1 이상은 선원으로 고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새원산이나 새강릉에 부족한 선원 숫자를 대충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고산국에서 선원으로 일하면 유럽이나 오스만 제국의 농민보다 훨씬 부유하게 살 수 있다. 혼자 오는 것보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데려오는 것을 추천한다.”

“폐하! 감사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혹시 저희들이 북미에서 농민으로 정착할 수는 없겠습니까? 저희들 대부분은 원래 농민이나 어민이었습니다.”

“그것 참. 벌써 이곳까지 소문났나? 처음부터 농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야. 농민은 고산국에서 꽤나 특권층이라서 말이지. 유럽과 달리 영농 기술도 많이 필요해.”

약간 과장이 섞였지만 대체로 진실이었다. 농업 전반에 기술이 필요하고, 특히 북미에서 드넓은 땅을 경작하려면 최소한 경운기라도 몰아야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에게 출신이 농민이랍시고 무작정 경작지를 줄 수는 없다. 관계시설이나 농기계 등 농지에 투자되는 자본이 꽤 크거든.”

“일이야 배우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농업노동자나 건설노동자로 3년 간 일을 배우면 농지를 배분해주겠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농지 소유권은 없다. 다 내 땅이야!”

북미 새강릉 주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정착한 농지 중에 여자가 가장인 경우가 3분의 1이 넘었다. 힘든 일 대부분을 농기계를 동원해서 하더라도 분명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날품팔이 역할을 해줄 인력이 많이 필요했고, 북미 원주민들만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해적 출신자들이 농가 일을 도와주다가 아일랜드 과부들하고 눈이 맞아 재혼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고산국 농민이 될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냥 북미로 이민 와서 처음부터 농민을 하면 될 것을, 해적들은 괜히 농업노동자나 건설노동자로 3년 동안 생고생하게 됐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지중해 해적들은 이민호가 제시한 3년을 교육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순화과정, 또는 지금까지 해적질을 한 것에 대한 처벌로 여기기도 했다.

“저기 싸우자고 모인 놈들한테 가서 설명 좀 해줘.”

“제가 친구들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무기를 폐하의 군대에 넘겨주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항복하는 자들은 창칼은 계속 소지해도 상관없다. 머스킷과 권총 같은 화약무기만 총독에게 넘기라고 해.”

해적 선장 세 명이 남쪽으로 말을 타고 가서 설명하는 동안 함대에서 전투 병력이 상륙했다. 순양함에서 구르카 보병이 내리고, 수송선에서 기병들이 말을 탄 채로 내렸다. 그리고 상륙함 함수 부분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장갑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항복한 선장들이 해적이 몰려있는 곳에 가서 설명을 잘 한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평화적으로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해적 수천 명이 대거 트리폴리로 넘어와 항복했다.

해적들끼리 싸우다가 전투력을 상실해버리면 편하겠지만, 그럴 위험을 감지한 주전파 해적 두목들이 항복하겠다는 해적들을 순순히 보내줬다. 그래도 아직 7천에 가까운 자들이 평원에 남아 저항의지를 드높였다.

“폐하! 자기들은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않는 자유민이랍니다. 국왕폐하 밑으로 들어가 말 잘 듣는 백성이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황제나 총독 밑에 있는 것은 괜찮고?”

“사실 황제와는 충성 관계가 아니라 해적질과 안전 보장을 교환하는 계약관계였지요.”

“고산국 백성들도 나한테 충성하는 것이 아닌데 뭘. 너희들도 고산국에서 살기 싫으면 언제든 고국으로 돌아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해산 명령에 저항하는 해적들과 반드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저들을 내버려두면 다시 트리폴리를 장악하고 지중해에서 해적질에 나설 것이다. 괜히 다시 돌아와야 할 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100년 후에 투르크 부계 혈통의 현지인 예니체리 장교 아흐메드 카라만리가 왕조를 세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독립 상태가 된다. 물론 황제에게 명목상의 세금은 바쳤으나, 백년 넘게 세습되는 독립 왕조를 유지했다.

이민호가 계복을 불러 전체 지휘를 맡겼다. 상륙 직전까지는 총함장이 전체를, 상륙 후에는 지상군 지휘관인 계복이 함대의 지상 포격 지원 작전까지 통합적으로 지휘하도록 돼 있었다.

“적당히 조지다가 항복하면 전투를 그치라는 말씀이죠?”

“응. 새원산 서쪽 탄광하고 미시간 호 주변 철광에서 일할 광부가 많이 부족하대.”

“강제노역이라 해도 노천탄광이라면 별로 힘들지 않겠는데요. 통신병이 부대 단위로 필요한 것은 처음입니다.”

함대는 1전단, 2전단, 상륙함전대, 수송전단으로 이루어졌고 지상군은 구르카 여단과 기병연대, 장갑차대대였다. 수병과 해병 절반은 배에 남았고 해병 일부가 모스크 첨탑을 비롯해 트리폴리 시가지 주요 거점 몇 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시내 지형도 복잡해 깃발과 나팔 신호가 불가능할 정도라서 통신 소요가 많았다.

30여 명에 달하는 통신병들이 담당한 부대와 주파수를 이미 맞춰놨고, 시험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사이 부대는 시내 남쪽으로 이동해 전열을 갖췄다. 장갑차 사이에 구르카 보병 1개 소대씩이 3열로 배치됐다. 기병 연대는 전열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진!”

계복이 백마를 타고 지휘했다. 장갑차 대열과 함께 구르카 보병들이 천천히, 그러나 위압적으로 전진했다. 희뿌연 모래바람이 대열을 휩쓸고 지나갔다. 화승총이라면 화승의 불을 끌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해적들이 전열을 갖추고 대포 5문을 앞으로 내밀었다. 현재 고산국 지상군과 해적들의 거리는 500미터로 좁혀졌다. 해적 포병들은 아직 대포를 쏠 거리가 되지 않아, 심지에 불을 붙일 횃불을 들고 있었다.

“총구마개 열어!”

구르카 병사들과 장갑차 승무원들이 포구와 총구에서 마개를 뽑았다. 그러나 미세한 모래가 많은 곳이라 전투 후에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총구 수명이 뚝 떨어질 것이다.

“쏴!”

- 콰쾅!

장갑차 중대마다 경량 유탄포를 실은 장갑차가 두 대씩 배치돼 있고, 대대에는 직할 유탄포 소대가 편제돼 있었다. 합계 10대의 유탄포 장갑차가 일제 사격을 해서 대포 5문을 격파했다. 해적들이 경악하는 순간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대포가 날아가는 순간 함대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트리폴리 시내에 남은 구르카 연대 포병대대에서 야포를 발사했다. 장갑차에서는 기관총을 쏘았다. 구르카 보병들에게 500미터는 총기의 성능만 갖춰진다면 충분히 명중시킬 거리였고, 신형 보병총은 그 정도 성능을 갖췄다.

“오로로로로~”

해적 보병들이 전열 곳곳에서 터지는 포탄 파편과 화염에 휘말릴 때, 현지 베르베르인들의 지원을 받은 해적 기병 천여 기가 45도 측면에서 용감하게 돌격을 시작했다. 해적들도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해두었다.

그러나 해적 기병들도 기관총 사격에 연달아 쓰러지면서, 기병들이 아무리 달려도 고산국 지상군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해적 기병들은 접근하는 족족 말과 함께 죽어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장갑차 대열과 200미터 거리를 남겨두고 총탄에 맞아 쓰러진 인마가 산을 이뤘다.

- 카라랑~

함포와 야포 사격이 그치는 순간 해적 기병이 아직 전멸하지도 않았는데 장갑차들이 전진했다. 장갑차가 굉음을 울리며 움직이자 겁에 질린 기병들이 도주했다. 전진하려 해도 말이 기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갑차들은 해적 보병 대열에 접근하면서 기관총을 연사했다. 구르카 병사들도 장갑차들을 따르며 계속해서 총격을 퍼부었다. 장갑차에도 보병들이 탄 채로 사격을 했다. 잠시 전진하던 대열은 해적들 100미터 앞에서 정지한 다음 총탄을 그야말로 쏟아 부었다.

“폐하! 그만! 제발 이제는 그만하십시오!”

“저들이 항복을 하지 않았잖아? 저들의 전투 의지를 무시하는 건가?”

“항복할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해적들 전열을 살펴보니 사략선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전열은 이미 해체되고, 해적들은 다들 구덩이에 고개만 처박은 채 떨고 있었다. 해적 기병들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되니까 도주하다가 도주로를 따라 연속 터지는 함포탄에 몰살당했다.

이민호와 함께 관전하던 항복한 선장들은 얼굴이 허옇게 변한 채 손 하나 까딱 못했다. 만약 선택을 잘못해 저항하는 쪽에 섰다면 일방적으로 죽어 나가는 저들 속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알았다. 계 장군. 항복을 권하시오.”

“예! 도련님. 사격 중지! 기병은 써먹지도 못했습니다.”

“루스 차르국에서는 기병을 써먹을 일이 굉장히 많을 거야. 산악기병이라든지, 공성기병이라든지. 시가지 전투에도 기병이 투입될 거야.”

“루스라는 곳은 아주 극악한 곳인가 보군요.”

고산국 기병은 대부분 조선인 출신이더라도 소수 여진족이 끼어 있어서 양쪽의 장점이 잘 결합된 경우였다. 여진족의 기마술과 조선의 사격술에 고산국의 기병총을 합하니 일반 여진족이나 조선 기병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함포 사거리 이내에서 싸울 일이 대부분인 북아프리카 해안 전투에서는 기병은 그저 잉여에 불과했다. 건초가 부피를 많이 차지해서 차라리 쌀과 콩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포격과 총격이 멈추고 3분쯤 지났는데도 살아남은 해적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엎어지는 해적은 진정한 용자였다.

“폐하! 저는 두렵습니다!”

“이보시오, 총독! 이럴 때는 보통 승전을 축하하는 말을 하지 않소?”

“저는 너무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이스탄불에서 보여주신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혹시나 이스탄불의 관리들이 폐하께 공손하지 못했다면 제가 사죄드립니다.”

이스탄불 관리들 중에서는 고산국에서 황제를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황제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분개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고산국 군인들이 황제에게는 무례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과도하게 친절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가마다 예절 기준이 다른 것뿐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다른 세력이 먼저 싸움을 걸지만 않는다면 고산국이 먼저 공격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오. 지금까지 그래왔소.”

“관대하신 국왕폐하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노인이 허리를 굽혀 절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총독이 다시 절할 준비를 했다.

“승리에 대한 축하의 절을 올리겠습니다.

졸지에 절을 두 번 받게 된 이민호가 뒷목을 잡았지만 외국인의 예의를 두고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그 정성 뒤에 담긴 총독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 전투는 목격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짧은 전투에서 아마도 3천 명 정도 죽거나 다친 모양인데, 소문을 타고 얼마나 과장될지 알 수 없었다.

“폐하! 적이 항복했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전령을 보내자마자 해적들이 유령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고산국 지상군 대열을 향해 이동했다.

지휘관들은 해적들이 무기를 버린 채로 움직여서 위협적인 이동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내버려두었다. 사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나 다름없는 전투 현장에서, 그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려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포로는 내가 갖겠소.”

“승리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폐하.”

“저들의 무기는 총독이 가지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승전 축하금을 더 많이 바치겠습니다.”

돈을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 없었다. 이틀 동안 예니체리와 이미 항복한 해적들이 전장 정리를 마쳤다.

해적 전사자가 3천, 부상자가 천 명 정도 발생했다. 평지에서 전투를 벌여서 전사자 비율이 극악하게 높았고, 부상이 심해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자들을 예니체리 병사들이 다 쳐 죽인 탓이었다.

보고를 받은 이민호는 고산국 의료기술로 더 많이 살릴 수 있었다고 총독에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트리폴리 주둔 예니체리와 사략선 선원들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예니체리들이 중상자들을 감정적으로 대한 탓이 컸다.

============================ 작품 후기 ============================

트리폴리 이야기 좀 더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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