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4 56. 지중해 원정 =========================================================================
예니체리 장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장군의 대답은 이민호가 예상한 것과 비슷했다. 사라센 해적들이 약탈한 물건들이 제3 중정의 보물임이 확인된 순간부터 장군은 황제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황궁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거나 바다 쪽에서 해적들이 갑작스럽게 공격했다면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황궁 안에서도 예니체리 총사령부와 각종 교육기관이 자리한 제4 중정에서 반란이 처음 일어난 것으로 장군은 판단했다. 반란이 황궁 안쪽에서 시작됐다면 제2 중정의 정문인 ‘인사의 문’과 성곽을 지키는 황궁 근위대가 제대로 막지 못하게 된다.
“장군은 상륙하자마자 황궁의 본궁을 점령해서 지키시오. 황제의 안위가 불투명한 지금은 황궁부터 장악해야 하오.”
“예. 제3 중정과 제4 중정을 점령하겠습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가 아닌 재상이 국장을 갖고 있었다. 재상은 황제 외에는 일절 책임을 지지 않기에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함대에서는 재상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와 재상, 태후와 황후, 예니체리 총사령관 등 중요한 인물들과 각종 교육시설은 모두 황궁 안에 들어 있었다. 황제가 죽었더라도 황궁을 장악한 것만으로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과 황제군은 현재 황궁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함대에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병사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반란에 참가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다.
“나는 외국 국왕이니 장군이 내 명령을 들을 필요는 없소. 내 말을 참고나 하라는 뜻이오.”
“아닙니다, 폐하! 반역자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 같으니 임시로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수시로 폐하께 전령을 보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좋소.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장군을 위해 황제나 재상에게 변론을 해주겠소. 장군은 황제에게 충성스런 군인이라고 말이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아를 알기 어렵게 뒤섞여 있어서 장군은 그보다 상관인 예니체리 장군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았다. 묘하게 장군이 정치에 욕심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민호는 국왕좌승함에 탄 해병 1개 분대와 통역장교를 장군과 동행시켰다. 장군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위병은 필요 없습니다만.”
“저들은 장군의 감시병이 아니라 나하고 연락할 자들이오. 전령을 보내지 말고 이들을 통해 나에게 보고하시오.”
“아! 전화기를 들고 따를 병사들이군요. 고맙습니다.”
장군이 어느새 전화기에 대해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해병이 등에 진 커다란 상자 같은 것은 유선전화기가 아니라 무전기였다. 먼 거리까지 통신할 수는 없지만 마침 황궁은 언덕에 있고 순양함들은 그 아래 바다에 있으니 통신 장애가 생길 일은 없었다.
갑판에 예니체리 병사들을 가득 태운 수송선들을 해안으로 접근시켰다. 황궁 아래 해안에 정박한 갤리선들은 이미 파괴된 이후였고, 저항하는 해적들은 수송선에 탑재된 3인치 함포가 불을 뿜거나 예니체리 병사들이 머스킷을 쏴서 침묵시켰다.
반란에 참가한 해적들은 그렇다 치고, 졸지에 유탄을 뒤집어쓴 노잡이들이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갤리선 노잡이들은 노예나 범죄자들로서 쇠사슬에 다리가 묶여 있어서 배가 침몰하는데도 도망치지 못했다. 갤리선이 점점 물에 잠기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노잡이들을 구해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 타타탕!
수송선들이 접근하자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에서 저항이 시작됐다. 복장은 같은 예니체리였는데 상륙 직전인 예니체리들이 성벽을 향해 분노의 총질을 해댔다.
- 콰콰쾅!
성벽에 숨어 함대를 향해 머스킷을 쏘는 예니체리 병사들을 향해 순양함들이 일제히 함포를 발사했다. 기다란 해안 성벽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지고, 저항하던 예니체리 반란군 병사들이 성벽의 거대한 돌에 한꺼번에 매몰됐다. 이민호가 예니체리 병사들이 탑승한 수송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상륙!”
수송선들이 해안에 닿는 순간 예니체리 병사 3천여 명이 일제히 배에서 뛰어내렸다. 상륙함이 아닌 수송선에는 사람이 내리는 철제 계단과 화물을 나르는 아래 갑판 문밖에 없는 탓에, 높은 갑판에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부러지는 병사도 몇 생겼다.
예니체리 병사들이 무너진 해안 성벽을 타고 넘어가 황궁 정원으로 진입했다. 가끔 정원 언덕 나무 뒤에서 머스킷을 쏘며 저항하는 자들은 함포 사격으로 날려버렸다.
“오인 사격이 많이 나오겠다.”
예니체리 부대마다 특이한 장식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는 알아본다지만, 이민호나 고산국 병사들 입장에서는 다들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황궁 본성 주변에서 예니체리끼리 맞붙었을 때는 더 이상 함포 사격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됐다.
“마치 우리가 황궁을 점령하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겠군.”
“전하! 우리 군은 상륙하지 않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둬. 그리고 혼전 중인 황궁 한복판으로 내 병사들을 내몰 수는 없어. 변수가 너무 많아. 저 장군이 황제를 손에 넣었을 때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야.”
이민호는 함장의 생각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이때 병력을 내보내 황제를 구하거나 황궁을 점거하고 있으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큰 외교적 양보를 얻어내기가 쉬웠다. 그러나 동시에 오스만 제국 백성들에게 침략자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었다.
예니체리 병사들이 용감하게 황궁 본성의 성벽을 타고 넘었다. 여기서는 의외로 저항이 적었고, 본궁 성벽과 연결된 높은 건물의 창문에서는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쪽으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급히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해병 분대를 이끌고 예니체리 장군과 동행한 해병 소대장에게서 첫 번째 보고가 들어왔다.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 황제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황제의 침소에서 소수 병력이 황제를 지키고 있습니다. 황궁 전체는 현재 예니체리 반란군이 장악했으며, 일부 해적들도 가담했으나 그들은 전투보다는 약탈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황궁 바깥에서 황제군 예니체리 부대가 공격 중이나 진격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장군은 어떤 판단을 내렸나?”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이라 이민호는 시큰둥했다. 황제의 목숨을 구해주더라도 사라센 해적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적들이 황궁 안에서 날뛸수록 황제가 해적들을 없애고 싶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 현재 황제의 침소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장군의 부대는 적을 물리치며 황제 침소를 향해 급속 진군 중입니다! 피아 구분이 어려워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황제를 구한 다음 만약 불리해지면 함대로 귀환하라고 전하라.”
- 장군이 황제를 납치해 외국군에게 넘기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면서 곤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제의 안위를 우선시 하는 장군의 특성상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 사이 총함장 이순신이 순양함 1개 전단과 상륙함들을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해협 양안에 가득 세워진 갤리선들을 파괴했다.
역시나 반란 중에는 피아를 구별하기 곤란했다. 그래서 갤리선 종류 중에서 삼각돛 2개를 단 북아프리카 갤리선은 확실히 격파하고, 마스트 3개를 단 대형 3단 갤리선 중에서는 저항하는 배만 응사했다. 정박 중에 돛을 묶어 비스듬히 늘어뜨린 배들은 전형적인 바르바리 해적이었으므로 지벡이라 이름 붙은 선형은 보이는 순간 바로 격파했다.
전투 중에는 혼란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데 반란 진압 중에는 피아 구분이 어려워 혼란이 더 심해졌다. 가끔 친황제군이 분명한 함선에서 순양함을 향해 포를 쏘기에 어쩔 수 없이 격침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혼동되는 배는 베네치아 갤리선과 제노아 갤리선이었다. 1층 노 젓는 구멍이 포문처럼 닫혀 있고 2층과 3층에서 대포를 내밀어 마치 18세기 전열함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갤리선은 오스만 정규 해군으로 간주해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타는 배인지 거대한 갈레온에 노를 다수 붙인 함선도 있어서 이것 역시 포격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황궁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거나, 반란군이나 해적들이 배를 점령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배에서 함대를 향해 포를 발사하면 즉각 반격해서 격침시켜버렸다. 5인치 함포 몇 발을 맞은 거대한 갈레온이 화약창고에 명중했는지 대폭발을 일으켰다.
- 전하! 포격 지원 요청합니다. 황궁 남쪽, 하기아 소피아 모스크의 북쪽 첨탑에서 저격수들 때문에 아군이 못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거리가 얼만데 총격이 가능해?”
- 무기는 활입니다. 저격수는 예니체리 궁수입니다.
“알았다.”
터키 활도 복합궁이라 사정거리는 조선 단궁에 못지않았다. 천 야드를 쏜다는 터키 활이 친황제군 예니체리 병사들의 진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저격수들이 높은 첨탑에서 아래를 향해 활을 쏘아서 사정거리가 짧은 머스킷으로는 아예 저항이 불가능했다. 해병이 소지한 보병총으로도 제거하기 어려웠다.
“함장! 동쪽 첨탑을 명중시킬 수 있겠나?”
“열 발은 쏴야 명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빗나간 포탄이 시가지에 피해를 입힐 게 분명하니 3인치 함포를 추천합니다.”
“3인치고 5인치고 즉각 포격 시작해!”
함포 사격 정밀도가 기대만큼 높지 않다 하나 모스크로 변한 소피아 대성당 돔을 잘못 맞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늘처럼 가느다란 첨탑 상부를 명중시킨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전하! 첨탑 하부를 명중시켜 무너뜨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빨리 쏴!”
첨탑 기층은 두껍기도 하고 빗나가더라도 도시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국왕좌승함에 탑재된 함포들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포탄이 첨탑에 명중했고, 잠시 기우뚱거리던 첨탑이 밑에서부터 차례로 붕괴돼 내려앉았다. 희뿌연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면서 첨탑이 있던 자리에는 돌무더기만 남았다.
- 전하! 황제와 가족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반란군에 비해 병력이 부족합니다. 황제군이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마중 나갈 테니 황제를 데리고 함대 쪽으로 이동해!”
- 장군께 명령을 전하겠습니다.
사정이 급해지니 장군도 결국 이민호의 명령을 따랐다. 화려한 복장을 입은 비슷하게 생긴 남자들 수십 명이 무리 지어서 본궁의 쪽문을 통해 비탈길 정원에 나타났다. 뒤에서 반란군이 추격하는지 총소리가 요란했다.
허둥지둥 뛰어오는 황제 일행을 따라서 예니체리 병사들이 예하 부대 단위로 머스킷을 쏘면서 교대로 퇴각했다. 그리고 맨 뒤에 해병 분대가 반란군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서서히 물러섰다.
그 사이 급히 구르카 여단에서 1개 중대 병력을 차출해서 상륙시켰다. 비탈길 아래쪽에서 전투를 하려면 불리하겠다 싶었는데, 이민호가 구르카 여단 병사들의 능력을 잘못 판단했다.
구르카 병사들이 바람처럼 언덕에 올라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일부는 갈고리 달린 밧줄을 던져 황궁 본성 벽에도 올랐다. 좋은 위치를 점한 병사들이 숨도 몰아쉬지 않고 차분히 사격 준비를 마쳤다.
- 국왕전하! 적은 누구입니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구르카 여단은 대대장부터 고산국 장교라서 무전기로 교신하는 자는 구르카 중대장이었다. 이민호는 확인을 위해 해병 소대장과 교신을 마친 다음 사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황궁 본궁, 그러니까 ‘지고한 행복의 문’ 안에 있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다. 사격 개시!”
- 타타탕!
구르카 병사들이 사격을 시작하자 붉은 옷을 입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비슷한 복장이었으나 저들은 반란군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나름 정예병 대우를 받는 예니체리 반란군 병사들이 구르카 병사들과 치열하게 총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상대는 40미터 표적지를 사격 위치에서 맨눈으로 확인하면서 조준을 변경하는 구르카 병사들이었다. 조준선 정렬과 탄착군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르카 병사들과 총격전을 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무리였다. 예니체리 소총병 1개 여단과 황제를 추격해온 대규모 병력이 구르카 1개 중대 병력에게 저지당했다.
- 콰쾅!
구르카 1개 중대만으로 부족할 일은 없었지만 순양함에서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함포 사격이 계속 이어지자 반란군들이 수백 구의 시체를 남긴 채 성벽 안으로 도주했다.
그 사이 친황제군 예니체리 병사들은 황제 일행을 몸으로 막으며 국왕좌승함 쪽으로 달려왔다. 다들 터번을 써서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장식이 화려한 자들이 더 높은 자였다.
병사의 등에 업힌 약간 마른 30대 초반 남자가 황제인 것 같았다. 작년까지 뚱뚱했다고 들었는데 올해 예조 판서가 만났을 때는 비쩍 말라 있었다.
항법사가 급히 초상화 복제본을 이민호에게 내밀었다. 플로렌스의 화가 크리스토파노 델 알티시모가 그린 메흐메드 3세의 초상화였다.
“음침하게 생긴 주제에 눈은 동그란 것이 겁이 많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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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인질 삼아 이것저것 요구하지는 않습니다만, 반란을 겪은 황제의 덕을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