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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542화 (491/1,000)

00542  56. 지중해 원정  =========================================================================

킬리트바히르 요새 북쪽 항구에서는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새나 산등성이 쪽에서 함대를 향해 대포를 쏘지도 않았고, 배를 불태우겠다고 횃불을 들고 달려드는 자들도 없었다.

아침에 출항준비를 하는 중에 산등성이 쪽에서 대규모 기마가 동쪽으로 달리는 소리가 났다. 바닷물까지 뒤흔들리는 진동으로 미루어 최소 수천 단위의 오스만 제국 기병이 밤새 언덕 뒤에 매복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어제 오스만 군이 제지해도 언덕을 강행 정찰할 걸 그랬습니다.”

“내버려 둬. 기병이 함대를 칠 방법은 없잖아.”

등골이 서늘해진 계복이 국왕좌승함으로 찾아와서 이민호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새에 가까운 항구에 함대를 정박시킨 것도 사실 위험했습니다. 앞으로는 함대가 요새 대포 사거리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피차 공격할 방법이 없는데 뭘.”

옛날에 천자 전선을 활용하던 시대와 달리 순양함은 철저히 유럽 대포 기준에 맞춰 건조됐다. 킬리트바히르 요새에 배치된 대포가 얼마나 대단할지 몰라도 이 시대 기술력으로 순양함이나 함대 소속 수송선, 즉 수송함을 관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포탄에 잘못 맞으면 마스트 주변의 전파송신기 정도는 부러질 수도 있었다.

“여기서 육군이 싸울 일은 없을 거야. 북아프리카라면 몰라도.”

“함대가 적의 수도에 접근하면 어떻게든 오해 여지가 많이 생깁니다.”

“물론 알고 있다. 일종의 함포 외교라고 생각해라.”

그런데 고산국 육군이 싸우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이민호의 예상이 흔들릴 일이 생겼다. 어제 저녁에 알현했던 예니체리 사령관이 이민호에게 다시 알현 신청을 한 것이다. 이스탄불로 가지 말라고 사령관이 강압적으로 요구할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스탄불까지 부대를 태워달라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고산국 국왕폐하! 육로로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이렇게 청합니다. 정 떨어지게 시파히 놈들은 말 타고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천지를 진동시킨 기마병은 역시 제국의 기병 시파히였던 모양이었다. 유럽의 기사와 비슷하게 국가에서 토지를 받는 대신 수하 병사 몇 명을 이끌고 군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시파히였다.

그런데 남의 군대를 함대에 태우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특히 고산국 입장에서 현재 오스만 제국은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어서 전혀 신뢰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승선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제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소?”

“별 일은 아닙니다만, 귀환 명령이 떨어졌으니 급히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별 일 아닌 일이 뭐냐고 묻지 않소?”

이민호가 장군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배에 안 태워주겠다는 의사표시를 확실히 했다. 계급이 미를리바라는 예니체리 장군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를리바는 현대 기준으로 여단장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서 파샤 칭호를 받는 최저 계급인 리바 바로 아래 계급이었다. 전공을 세워 파샤가 되기를 가장 갈망하는 계급이기도 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제도에서 해적들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북아프리카 사략선 선원들이 이스탄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씀이오?”

“해적 본성이 어딜 가겠습니까? 제도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보이니까 눈이 뒤집혀서 욕심을 낸 것이지요.”

“흠. 알았소. 병력을 모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민호가 고산국 함대를 이끌고 협상을 하러 이스탄불로 향하자, 오스만 제국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육해군 병력을 수도로 집결시켰다. 그런데 집결시킨 이 병력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버렸다. 만약 오스만 제국을 침략할 의도가 있었다면 아주 좋은 기회겠지만, 이민호에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민호는 총함장 이순신과 상의한 다음 몇 가지 조언을 얻었다. 배를 탈취당할 가능성이 있기에 순양함에는 절대 외국 군대를 태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2천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부대를 수송선에 나눠 태웠다. 예니체리 병사들은 대포나 천막 같은 장비는 모두 버리고, 거의 맨몸으로 무기만 갖고 탑승했다. 이민호는 예니체리 병사들이 선실에는 절대 못 들어가게 하고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도록 했다.

바다 건너 차나칼레에서도 수송선들에 예니체리 병력 천여 명을 태웠다. 상자 모양의 차나칼레 요새 주변에서 병사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와서 수송선 갑판에 마치 피난민처럼 올라탔다. 밤새도록 자면서 심리적으로만 대치했던 양쪽 군대가 이제는 한 배를 타게 됐다.

“폐하! 선실을 이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제도까지 뱃길로 최소 이틀은 걸릴 텐데 갑판에서 재우면 병사들 체력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이스탄불까지 네 시간쯤 걸릴 것 같소. 장군도 저 배에 타시오. 기름 수송선이니까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마시오.”

옆에 데리고 있어봤자 고급 정보를 흘릴 사람도 아니라서 장군을 수송선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장군이 이민호에게 사정사정해서 호위병들을 다 빼고 참모 둘만 데리고 국왕좌승함에 탑승했다. 함대 지휘는 기함에서 총함장 이순신이 하는데 무조건 높은 사람과 한 배에 타면 장땡일 것이라는 심리도 오스만 장군에게 작용했다.

“출항! 이스탄불로 직진한다.”

국왕좌승함 함장이 기함에 보고하고, 곧이어 함대 전체가 움직였다. 장군을 함교에 있게 했더니 순양함의 속도에 아주 기겁을 하면서 놀랐다. 통신기나 전화 같은 처음 보는 설비에도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예니체리 장군을 태워서 뜻밖의 효과를 보게 됐다. 깊이 들어간 다르다넬스 해협 안에 킬리트바히르 요새처럼 세워진 요새가 몇 곳 더 있었다.

처음 지나치려는 요새에서 경고사격을 통해 고산국 함대의 진입을 제지했다. 그러나 국왕좌승함에서 예니체리 장군의 깃발을 올리자 바로 통과시켰다. 그 다음부터 함대 선두에서 움직이는 탐사선에 장군 깃발을 달고 속도를 올렸다.

“장군은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오? 해적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도 막강한 예니체리가 단숨에 진압했을 것 아니오?”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 시기에 예니체리는 통틀어서 1만 5천 정도에 불과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4만까지 병력이 증강되기는 하지만 아직은 소수정예를 지향하던 때였고, 이 숫자로도 충분했다.

오스만 기병 시파히는 4만 정도였고 각 주에 지방군이 따로 배치됐다. 당연히 헝가리에 보낸 15만 병력 중에서 예니체리나 시파히는 소수에 불과했다.

“혹시 예니체리도 반란에 가담했소?”

“예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희는 비록 형식뿐이라 하지만 황제의 노예입니다.”

아마도 동유럽 출신일 백인 예니체리 장군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맘루크와 마찬가지로 예니체리도 주인을 수시로 바꿔치운 것을 이민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맘루크와 예니체리는 처음에는 노예 병사로 시작했다가 군 지휘부는 물론 행정 관료로 진출하면서 지배층에 자연스럽게 편입됐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고용주를 갈아치우다가 아예 왕조를 세운 것이 맘루크였고, 예니체리도 현재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맘루크와 예니체리는 권력을 독점하고 과도하게 횡포를 부리다가 결국에는 철저히 씨가 말리는 비슷한 종말을 맞는다. 맘루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국인이었고, 예니체리는 나중에 무슬림으로 대체됐으나 결과는 같았다. 원래 국가를 지배할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면 더욱 철저한 응징을 받게 된다.

“지금 예니체리들은 대부분 전대 황제 때 임관한, 그러니까 무라트 3세 황제의 노예 아니오?”

“노예는 상속되는 재산입니다.”

“과연 그럴지 모르겠소.”

최고 속도로 달린 함대는 두 시간도 못 돼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고 마르마라 해에 진입했다. 속도가 느린 수송선 일부가 함대에서 뒤쳐졌으나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는 통신을 받았다.

“폐하! 저기 시파히가 달리고 있습니다.”

“두 시간 넘게 저 속도로 달리다니, 대단하오.”

겔리볼루를 지났을 때 너른 밭을 짓뭉개며 급히 달리는 오스만 제국 기마군단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기병도 아닌데 밤새도록, 며칠 동안 저런 속도로 계속해서 달릴 수는 없었다.

“기병의 속도를 따라잡아 결국 추월하는 폐하의 함대가 더 두렵습니다.”

“장군! 기병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오스만 제국에 있소. 저들 시파히가 급히 움직인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소. 이제 솔직히 털어놔보시오.”

시파히가 말의 상태를 무시하고 저렇게 급히 달린다는 것은 제도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안위와 관계없는 일이라면 시파히 지휘관이 처음부터 말의 기동 속도를 제한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폐하를 속이겠습니까? 사실입니다. 예니체리 부대 절반 정도가 답답한 황제를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에 알았습니다. 반란은 어제 이미 일어났습니다.”

“장군도 반란에 가담하러 가는 길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반란군에 가담했다면 고산국 함대를 견제하러 킬리트바히르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무조건 친황제파인 시파히와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흐음. 장군은 황제파요?”

“오늘 아침부터 친황제파가 됐습니다. 감히 나를 빼고 반란을 일으키다니, 나쁜 놈들을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맘루크나 예니체리나 그 나라 출신자들로 구성된 정상적인 군인이 아니었다. 황제라는 고용주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질 경우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기함과 통신을 하던 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멀리 전방에 범선 한 척이 떠 있었고, 탐사선이 그 배로 접근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배는 이스탄불로 향하고 있었으나 해협 안에서 바람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었다.

“전방에 잉글랜드 함선 발견! 갑판에 대포 다수를 확인했습니다!”

“무장상선인가? 나포하라!”

급히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가는 바쁜 와중에도 잉글랜드 함선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함대가 에워싸자 잉글랜드 배에서 백기를 올렸다. 잉글랜드 배는 대포 27문으로 무장한, 대형 상선이었다.

“정체를 밝혀라!”

“잉글랜드 여왕이 보내는 선물을 오스만 제국 황제에게 바치러 가는 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페르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그 적국인 오스만 제국과도 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공해상에서 이 배를 잡았다면 선물을 빼앗지 않더라도 자세히 구경했겠지만 현재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내해나 다름없는 바다였다.

“좀 더 자세히.”

“원래는 여왕이 전대 황제 무라트 3세에게 보내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황제가 바뀌어서 메흐메트 3세에게 바칠 예정입니다. 선물은 시계 오르간과 기타 등등이고, 사피예 술탄에게 바치는 편지도 있습니다.”

선장이 자세한 선물 목록은 얼버무리고 말았다. 금은보화도 있겠지만 이미 남의 것이라 이민호가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오르간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오르간 기술자가 그 배에 탔나?”

“예! 저는 토마스 달람이라고 합니다. 선장 대신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시계 오르간은 19세기에 제작된 오르간 시계가 아니라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으로서 사람이 직접 연주하거나, 기계 장치를 이용해 자동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악기였다. 이때 잉글랜드에서 오스만 황제에게 선물로 보낸 오르간은 조립하는데 몇 달이 걸릴 정도였다.

오르간 연주 중에 조각상이 춤을 추고 연주가 끝나는 순간 새가 날갯짓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충분히 소유할 가치가 있었다. 16세기 말에 자동 악기를 제작했다면 다른 기계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꽤나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피아 구별이 힘들어졌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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