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0 56. 지중해 원정 =========================================================================
이탈리아 반도와 비슷한 폭의 아드리아 해는 해적선 한 척 없이 아주 깨끗했다. 향신료 등 비싼 상품을 실은 상선이 많이 지나다니는 바다라는 사실은 해적보다 베네치아가 더 잘 알았다.
베네치아를 향해 북상하던 함대는 아드리아 해를 순찰하는 베네치아 갤리선과 대포를 싣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갤리엇 조합과 가끔 마주쳤다. 이따금 용감한 함장이 단 두 척만으로 50여 척에 달하는 고산국 함대를 가로막고 용무를 묻기도 했으나, 보통은 태극기만 보고도 만세를 불렀다.
“용감한 뱃사람이 많군. 함장! 탐사선 여러 척을 멀찌감치 앞에 세우고 우리 함대가 북상 중인 사실을 베네치아 함선들에 통보하라고 총함장께 전하게. 우리 함대 규모가 너무 커서 누가 봐도 베네치아를 정복하러 가는 모습이야.”
“베네치아를 정복하러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전하?”
“농담 말고.”
이민호는 베네치아 시녀 일곱 명에게 침전에서 목이 졸리고 싶지 않았다. 명나라 가정제는 1542년에 궁녀 11명에게 목 졸려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적이 있었다.
“전하! 오스만 제국에 미리 통보를 하시지 그랬습니까?”
“협상에 실패하면 내가 이스탄불에 가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예조 판서가 휴대하고 갔었지. 나를 환영하겠다는 황제의 답서도 받았어.”
정확한 날짜를 기입하지 않았지만 일단 방문하겠다고 통보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온 함대는 순양함 1개 전단 12척을 포함한 20척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겠지요.”
“순양함 2개 전단이면 많은 것도 아니지. 지상군은 해적 소탕과 혹시 모를 러시아 때문에 많이 동원한 것뿐이야. 착각하면 안 돼.”
이민호의 이스탄불 방문을 앞두고 끙끙 앓고 있을 오스만 제국의 황제와 대신들이 상상되면서 이민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이 외국 수도를 방문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이렇게 대규모 군세를 끌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었다.
함대는 느긋하게 항해해서 크레타에서 출항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오전에 베네치아에 입항했다. 탐사선을 미리 보내 베네치아에 통보하고 두 시간 후에 들어갔다.
방파제처럼 일직선으로 형성된 가느다란 연안섬 안쪽, 석호가 되기 직전의 호수 같은 바다에 떠 있는 섬들 중 하나에 3층 석조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찬 도시가 베네치아였다. 이 시대에도 일부 지역에서 건물들이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전하! 왜 소선 같은 배 수천 척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고바야가 아니라 곤돌라야. 물의 도시에서 유일한 교통수단이지.”
함대는 꽃으로 외부를 장식한 작은 곤돌라들의 환영을 받았다. 선수가 높이 솟은 검은색 곤돌라 5천여 척이 수로에 빽빽이 들어차서 고산국 대형 함선들이 부두에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베네치아에 곤돌라가 일만 척이나 있다니까 절반 정도가 몰려나온 셈이었다.
산마르코 광장 동쪽 부두에도 베네치아 시민들이 몰려나와 고산국 함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좁은 부두에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배에서 내리기도 어려웠다.
국왕좌승함에서 먼저 내린 해병들과 근위병들이 두 줄로 서서 시민들 사이에 억지로 길을 만들었다. 그런데 병사들마다 목에 화환이 걸리고 뺨에는 여자들 입술 자국이 묻어 있었다.
“와!”
이민호가 배에서 내리자 베네치아 시민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이민호에 앞서 국왕좌승함에 동승한 처녀들, 그러니까 올해 초에 왕립여학교를 졸업한 설비와 여진족 호위들, 아이누 족 후궁들이 바구니에 담긴 꽃잎을 뿌리며 길을 열었다.
이민호가 지나가는 순간 남자들이 일제히 모자를 벗고 상체를 살짝 숙여 경의를 표했고, 여자들은 자칫하면 출렁 쏟아질 것 같은 가슴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도제가 시가지를 행진할 때와 같은 예우였다.
예전에 베네치아가 강성했을 때는 귀족 여자들은 건물 2층, 외국인 상인들은 3층에서 도제의 행진을 구경했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달라졌다. 거듭되는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시민들 숫자가 많이 줄어든 탓도 있었다.
“에밀리아. 시민들이 이렇게 나를 환영해주는 이유가 뭐야?”
“그야 당연히 오스만 제국 때문에 항상 불안하니까요. 주인님은 베네치아의 구원자가 되실 거여요.”
화려한 치장을 하고 이민호의 뒤를 따르는 에밀리아와 포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멀리서 와서 좋은 상품을 싸게 팔아주는 돈줄로 이민호를 보던 이슬람 상인들과 달리, 베네치아 시민들의 눈에는 뭔가 다른 염원이 담겨 있는 듯했다.
“베네치아가 그 동안 외교적으로 고립됐다는 소리네. 베네치아의 구원자는 너희들이 아니야?”
“후궁은 후궁일 뿐이에요.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고산국과 베네치아는 말로는 동맹이라 하지만 정식 조약을 맺은 적도 없고 외교관이 서로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하고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공식 환영 행사가 열렸다. 축제 때마다 사람들로 넘치는 광장이 오늘따라 더 붐볐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그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구경꾼들을 위해 높은 무대에 올라가서 공개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항구에서 도제 부처와 인사를 마친 이민호는 공식 석상에서 다시 인사를 나눠야 했다.
“베네치아의 시민들을 대표해서 고산국 국왕폐하를 환영합니다.”
“마리오 도제 각하를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도가레사께서는 참으로 우아한 미인이십니다.”
“어머나! 고마워요, 폐하!”
베네치아의 도제 마리노 그리마니는 1532년생으로서 현재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도제가 종신직이라지만 다 늙어서 즉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보통은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
도제의 13살 연하 부인 모로시나 모로시니(Morosina Morosini)는 여러 세대에 걸쳐 도제와 제독, 추기경들을 배출한 베네치아의 명문가 모로시니 가문 출신이었다. 모로시나는 개인 재산만으로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 복원 공사를 진행시킬 정도로 부유했다.
마리노가 1595년에 도제로 즉위할 때 길고 긴 축제를 열었다. 축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축제를 좋아하는 베네치아 시민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정식 부인인 도가레사의 대관식을 1597년에 따로 화려하게 열었다. 물론 축하를 빙자한 축제가 몇 달이나 계속 이어졌다. 도가레사 별도의 대관식은 그 전까지 아무도 못했던 일이었고, 이후로도 100년 동안 없을 특이한 행사였다.
“제가 고산국에 가서 인사를 먼저 올렸어야 하는데 먼저 오시게 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신 마리오 도제께 힘든 여정을 부담시키는 것보다는 젊은 사람이 오는 것이 낫겠지요. 앞으로 두 나라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도록 합시다.”
이민호를 직접 만나본 군주들은 젊은 얼굴에 놀라고, 국력 차이가 크더라도 상대방을 동등하게 대해줘서 더 놀랐다. 국력에 따라 상대방 국가의 수장을 마치 수하 다루듯이 하는 유럽에서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폐하만 믿겠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은 마리오가 아니라 마리노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마리오는 피치 공주와 결혼한 영웅의 이름인데 혼동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국가원수인 도제는 권력 행사에 여러 가지 제한을 받으므로 왕관을 쓴 공화국(crowned republic)이라 지칭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도제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처형당한 경우도 있었다. 현대 영국이나 입헌 민주국가인 북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도제가 있더라도 상징적인 존재에 그치고 국가의 실체는 국민 주권에 입각한 민주국가에 가까웠다.
도제는 즉위식이나 외국 국가원수를 만날 때만 입는 호화로운 망토를 걸치고, 그 위에 황금색 덧옷까지 입었다. 이민호도 공식 환영식에 참가하려고 화려한 복장을 입어서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도제는 회색 턱수염이 아주 풍성해서 수염을 손으로 쥐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이민호가 손을 다른 손으로 꼭 붙잡았다.
베네치아 시녀들은 화사한 복장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시민들이 내지르는 열띤 환호에 답했다. 사라센 해적에게 납치당할 때 오줌까지 쌌던 시녀들은 이 자리에서는 제법 왕의 여자처럼 조신하게 행동했다.
“에밀리아! 정말로 살아있었구나! 오, 주여!”
“어머니! 매달 편지를 교환하고 있잖아요.”
“천국에서 보내는 편지인 줄 알았지 뭐니.”
“저 잘하고 있어요. 그렇죠?”
“물론이지, 우리 딸!”
크레타에서 부모를 만나지 못했던 시녀 셋은 베네치아에 와서 부모와 상봉했다. 셋의 부모가 무역 상인들이라 거처가 일정하지 않은 탓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시겠습니까? 저희도 준비하겠습니다. 제비뽑기로 시민들 절반을 징병해 갤리선 노꾼으로 동원하면 단기간에 대규모 함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헛소문이요. 해적 퇴치 문제로 그런 소문이 생긴 것 같소.”
도제가 몹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베네치아가 동 지중해에서 강국이라지만 단독으로 오스만과 싸울 역량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항상 로마 교황이 조직한 신성동맹 편에 붙었으나, 이번 도제부터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가 삐끗거렸다. 베네치아 영토 내에서 로마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대폭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교황이 바뀌면 베네치아가 파문을 당할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싸웠으면서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아시아의 상품이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 각국에 배포되는 국제무역 시스템은 대서양 무역이 성장하는 지금도 유효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공언하신 6개월이 가까워지면서 사라센 해적선들이 떼를 지어 다르다넬스 해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측됐습니다. 못해도 이스탄불에 해적선이 300척은 있을 겁니다.”
“이스탄불을 지키기 위해 배를 이동시킨 것이겠지요. 어느 국가든 위협에 맞서는 것은 당연한 대응입니다.”
이민호가 대규모 함대를 몰고 지중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사실상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오스만 제국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라센 해적들을 이스탄불 앞바다에 집결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이 막으면 폐하께서는 뚫고 가실 겁니까?”
“싸움을 건다면 당연히 응전해야겠지요. 해적선 수백 척을 격침시킨 다음 이스탄불 황궁에 가서 오스만 황제에게 지중해의 평화를 호소하는 겁니다.”
“평화 조약은 보통 그런 식으로 체결되지요.”
고산국 상품과 명나라 비단, 인도 후추, 실론 계피와 차까지 대량으로 베네치아에 풀었다. 함대에 적재한 양의 절반에 불과했으나 베네치아의 사업 영역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 외의 동유럽 지역에 판매하기에 충분한 물량이었다.
상인들에게 경쟁을 붙이면 담합하거나 가격 변동이 극심할 것으로 예상돼 베네치아 무역업 협동조합에 일괄적으로 판매했다. 금을 가득 실은 상자 수백 개를 받았으나 국왕좌승함에 적재공간이 부족해 수송선에도 나눠 실었다.
판매대금 절반은 베네치아가 수백 년 동안 모아온 예술품으로 받았다. 판매 대금으로 받은 금괴와 베네치아 금화를 적당히 풀고 싶어도 스위스 시계 말고는 유럽에서 살 만한 상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금과 은이 넘치는 곳이라 막대한 무역흑자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긴 했다.
베네치아 북쪽 해안의 부라노에서 생산하는 레이스가 이민호의 마음에 쏙 들어서 다양한 문양의 제품을 수입했다. 단 며칠 만에 후궁과 시녀들의 모든 옷에 갖가지 레이스 장식이 붙었다.
“전쟁이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베네치아가 전쟁 준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민호는 산마르코 성당 바로 옆 두칼레 궁전에서 도제 및 대평의회 의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민호는 고산국과 베네치아의 장기적인 무역 협력을 주제로 논의하길 원했으나, 위원들은 온통 전쟁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민호는 배 삯이 부족한 4차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려 헝가리의 자라를 공격하게 만든 베네치아의 소행을 알고 있던 터라, 평의회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4차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의 제위 쟁탈전에 참가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 약탈했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나중에 동로마 제국이 다시 회복됐으나 장기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성장을 견제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오셨으면서도 오스만 정벌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한 나라의 국왕이 외국을 순방하면서 위신을 올리기 위해 함대를 좀 더 이끌고 온 것뿐입니다.”
그래도 대평의회 의원들은 이민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베네치아 본토의 인구는 10만 약간 넘는 정도였고 20만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해군도 요즘은 시민이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용병을 고용해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오스만이 지중해를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베네치아가 여전히 엄청난 부를 유지하긴 했으나 예전에 비해 세력이 현저히 약화됐다고 봐야 했다.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뒤에도 오히려 오스만 제국에게 계속해서 밀리자 베네치아 시민들 사이에 패배의식이 만연했다.
얼마 전까지 베네치아에는 오스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자는 현실파와, 오스만을 밀어내고 보다 더 무역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이상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멀리 아시아의 고산국이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다음 강력한 함대가 지중해까지 수시로 들락거렸다. 베네치아 시민들의 여론이 고산국과 동맹을 맺어 오스만을 치자는 쪽으로 확 몰리게 됐다.
“유럽에서 군사를 총동원한다 해도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을 상대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그래도 고산국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산국의 힘을 믿어주는 것은 좋지만 이 정도면 신앙이라 할 정도였다. 중세 유럽이 야만의 시대를 보내는 동안에도 베네치아에서는 이성적인 상인 집단이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스만 문제에서만큼은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베네치아에서 며칠 편히 쉬려고 했지만 대평의회 의원들이 수시로 방문하는 바람에 휴식하기도 쉽지 않았다. 공화국의 귀족 가문들은 오랜 전통의 상인 가문이라 여러 가지 사업 제안을 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공동 투자를 통해 베네치아에서 유리 세공과 안경 제조업을 크게 일으키자고 제안하는 귀족에게 하마터면 혹할 뻔했다. 유리 공업을 동업했다가 자칫 기술이 넘어갈 우려가 있어서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도제 부인 모로시나의 조언을 받아 베네치아 북쪽 부라노에서 레이스 장식을 제작하는 업체들에 투자했다. 이것이 나중에 이민호에게 꽤나 짭짤한 투자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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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부터 이스탄불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