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9 56. 지중해 원정 =========================================================================
다음 날 오전 고산국 함대는 키프로스 섬 북쪽 항구 키레니아에 들어가 하루 정박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섬이었다.
고산국의 대규모 함대가 접근하자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면서도 의례적으로 동맹국 함대를 환영했다. 항구가 비좁아 절반 이상은 항구 바깥에서 정박했다.
항구 입구에 세워진 키레니아 성은 기원전부터 지배자와 형태를 계속 바꿔가면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성이었다. 베네치아가 점령할 때 무너졌다가 1570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다시 세워졌다. 성의 기반은 기원전에 세웠던 형태 그대로였다.
오스만 제국 상인들이 부두에 몰려나와 고산국 함대를 열렬히 반겼다. 상인들은 미묘한 현재 상황을 빤히 알고도 함대가 동방에서 가져온 값비싼 상품을 뜨겁게 환영했다.
고산국 함대가 항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니코시아에서 달려온 상인들로 인해 항구는 밤에 더 북적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저항했던 시민들이 일만 명이나 처형됐던 니코시아는 지금은 이미 무슬림의 도시로 변했다.
“전하! 함대 기함에서 보고입니다. 키레니아 성에서 몰래 빠져 나간 배는 바다 건너 이첼 주의 메르신으로 향했습니다. 총함장은 연락병이 이첼 주 총독에게 보고하러 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키레니아 성에서 오스만 군이 확인한 고산국의 함대 규모는 순양함 12척이 빠진 숫자였다. 총함장 이순신이 이끄는 순양함들이 키레니아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넓게 퍼져서 키프로스 북쪽 바다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전령이 어째서 배를 타고 에게 해로 가지 않아? 미친 것들!”
“보고 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메르신에서 이스탄불로 파발을 띄울 것 같습니다, 전하.”
“도로가 이 모양이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소아시아 지도에는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이리저리 우회해가는 도로가 표시돼 있었다. 메르신에서 이스탄불까지 직선거리는 500km가 살짝 넘는 정도였지만 도로 사정이 나빠서 파발이 하루에 50km 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함장이 항법사와 함께 계산한 다음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우리 함대가 에게 해를 통해 직행한다면 이틀 내에 이스탄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파발보다 8일이나 빨리 도착하게 됩니다. 만약 오스만 제국에 심리적 충격을 줄 목적이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민호는 고산국 함대 50여 척이 이스탄불 앞바다에 떠 있는 동안 오스만 제국의 황궁에서 황제와 대신들이 고성을 질러가며 회의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중해에서 사라센 해적을 퇴치하겠다고 공언한 고산국 함대가 제국의 수도 앞바다에 들이닥쳤는데도 해안 지대에 배치된 총독이나 사령관들이 전령을 보내지 않는 나태함에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해안이나 섬 여러 지역에서 출발한 전령들이 함대보다 뒤늦게 연달아 제도에 도착한다면 황제를 비롯한 국가지도부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스탄불이 바닷가에 있는 한 현실적으로 고산국 함대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실제적인 공포였다.
말 타고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빠른 고산국 함대를 막을 생각을 한다면 제도 근처에 대규모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한다. 헝가리 땅에서 전쟁 중이며 페르시아와도 매번 다투는 이때, 제국의 병력 운용에 크게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상시적인 반란 위협에 노출되는 문제가 생긴다.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우리 함대의 진입을 막으려 하겠지.”
“오스만의 요새는 언덕 위에 서 있는 형태입니다. 포격 몇 번에 무너질 것이 확실합니다.”
해협을 지키는 예니체리의 요새 위치는 예조 판서가 이스탄불에 들락거리면서 이미 파악을 해두었다. 요새를 무너뜨리거나 요새의 포격을 무시하고 함대가 해협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그것은 전쟁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럴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게 낫겠다. 어디 시간 때울 데 있나?”
“그래도 제도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
“너무 심한 충격을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특히 기다리는 것은 내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아.”
이민호는 이때 함교에 나와 있는 베네치아 시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시녀들이 활짝 웃었다.
“그럼 베네치아에 가요. 중간에 크레타도 들러요.”
“오! 그래. 그게 좋겠다. 너희들 고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교역을 위해 입항하는 거야. 그 동안 배운 상재를 마음껏 발휘해봐라.”
“최대한 이익을 보는 것이라면 쉬운데 수출입 금액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수송선의 적재 능력을 고려해서 최대한 균형을 맞춰볼게요.”
베네치아 시녀들은 입궁한지 겨우 몇 달 만에 실전 상거래에 나설 기회를 잡았다. 시녀들은 이민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상거래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민호는 교역 자체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음 날 함대가 키레니아를 출항했다. 국왕좌승함이 항구를 떠나는 순간 오스만 제국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상인들은 부두에 가득 몰려나와 뜨겁게 함성을 질러 열렬히 환송했다. 이민호가 듣기에 ‘또 오십시오.’라는 인사말이 육성으로 들리는 듯했다.
멀리 언덕에 세워진 벨라바이스 수도원이 아련하게 시야에 잡혔다. 아치가 줄줄이 이어진 고딕 형식의 요새처럼 생긴 건물은 원래 가톨릭 수도원이었으나 오스만 제국이 키프로스를 점령한 이래 그리스 정교의 수도원으로 변경됐다. 이민호는 조금 씁쓸했다.
함대는 그날 저녁 로도스 섬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로도스 항에 도착했다. 예조 판서가 이스탄불을 오가며 들렀던 곳이라 해도가 자세한 편이었다. 항구 입구에 둥그런 요새 하나, 시내에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이 오스만 제국의 대군을 상대로 버텼던 사각형 성곽 하나가 서 있었다.
오스만 제국 병사들은 고산국 상선이나 외교관이 탄 배들에게 입항을 허가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고산국 대 함대를 항구에 받아들였다. 관리가 탄 작은 배가 함대에 접근해서 형식적으로 질문했다.
“고산국 함대의 입항 목적을 밝히십시오!”
“로도스 항에서 교역하고 이스탄불에서 황제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에 입항을 신청한다.”
“입항을 허가합니다. 교역은 해가 떠 있는 동안만 가능합니다.”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동안 로도스 부두에서 해 지기 전까지 아주 잠깐 교역을 했다. 이 지역 상품 가격을 잘 아는 베네치아 시녀들이 교역을 주도해서 로도스의 무슬림 상인들이 환희에 몸을 떨었다.
“상인들이 왜 저리 좋아해? 이익을 많이 봤나?”
“아니에요. 원가와 운송비를 제외하고 가장 이상적인 비율의 이익이 나게 해줬거든요.”
“그게 얼만데?”
“1.618배에요.”
베네치아 시녀들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로도스 상인들이 오늘 매입한 상품을 이스탄불에 가져가서 팔면 61.8퍼센트의 짭짤한 이익을 보게 됐다고 한다. 상인들이 얻을 이익이 소수점 한 단위까지 정확히 계산될지는 의문이었다.
그 사이 항구 요새에서 배 한 척이 출발했고, 함대 기함에서 그 배의 행선지를 확인했다. 바다 건너편 강상 항구인 달얀에서도 파발이 이스탄불로 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로써 함대가 로도스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 이스탄불로 가고 있으니 그 동안 고민하고 있으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될 것 같았다.
다음 날 함대는 베네치아 영토인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 현지명 헤라클리온에 도착했다. 오스만의 항구처럼 이곳에도 여러 나라의 배들이 요새화된 항구 안에 정박해 있었다. 크레타는 지중해의 중심에 있으며 동서와 남북으로 이어지는 무역로 중간에 위치해서 외국 상선들의 입항이 잦았다.
이곳 역시 전체 함대가 좁은 항구 안에 모두 들어갈 수 없어 절반은 항구 밖에 닻을 내렸다. 항구 입구에 위치한 작은 요새에서는 고산국 함대의 깃대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확인하고 일단 입항을 환영했지만,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유지했다.
베네치아 시녀들은 항구에 도착하기 한나절 전부터 궁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몸단장을 했다. 그 동안 이민호에게서 받은 온갖 보석을 화려한 옷에 치장하니 시녀가 아니라 여왕이라도 된 듯했다.
크레타에서 태어난 시녀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상인이나 크레타에서 대농장주를 하는 부모 세대가 젊어서 정착한 이후 크레타는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시집 잘 간 여자로 보이고 싶은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하루 머문다고요, 전하?”
“왜 싫어?”
“그럴 리가요!”
베네치아 시녀들이 좋아 죽으려 했다. 오랜만에 부모를 만날 생각에 시녀들이 몹시 들떴다.
키프로스와 로도스에서 교역한 것이 오스만 제국에게 연락이 닿을 때까지 함대가 천천히 가야 했다. 베네치아에 왕복하는데 4일쯤 걸린다면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그 시간에 해적들 본거지를 다 불살라버리고 와도 되겠다.”
“그럼 바로 전쟁이잖아요.”
“그게 문제지.”
항구에서 교역을 좀 한 다음, 저녁에 베네치아 시녀들을 앞세워 도시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해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곳이 집이거나 부모의 가게가 있는 시녀들의 부모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이민호에게 장인, 장모님이 수백 명이라서 이름도 다 기억을 못했다.
“우리 카테리네를 잘 부탁합니다, 폐하.”
“두 분을 처음 뵙겠습니다. 아부다비 백작부인 카테리네는 짧은 기간이지만 고산국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백작부인이라고요? 카테리네! 네가 출세했구나! 이 어미는 너무나 기쁘단다.”
카테리네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꼭 껴안은 채로 이민호에게 토라진 얼굴을 보였다. 아부다비 백작부인은 비앙카였고, 카테리네는 장영실 백작부인이었다. 사람 이름을 도시 이름에 붙이면 이래저래 호칭에 혼란이 생겼다.
장인, 장모 일곱 분을 상석에 모시고 시녀 네 명과 함께 착석해서 대화를 나눴다. 웬만한 이민호도 장인과 장모를 한꺼번에 일곱 분이나 만나게 돼서 좌불안석이었다. 베네치아에 가면 장인과 장모 여섯 분을 또 만나야 했다.
“오스만 제국의 사례가 있으니 일부다처제를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실례 되는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혹시 부인을 몇 분이나 두고 계십니까?”
“그, 그게.”
이민호가 당황해서 대답을 못하자 장인과 장모들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사실 이민호도 정확한 숫자를 몰랐다. 이번에 왕립여학교를 졸업해서 아직 승은을 내리지 않은 호위들과 시녀들을 포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왕립여학교 재학생은 아예 빼기로 했다.
“하여튼 카테리네와 비앙카, 제시카, 네리사는 왕궁에서 서열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백작부인 이상의 작위를 받은 후궁이 몇 명 없습니다.”
“네~ 폐하의 후궁 중에서 저보다 더 높은 작위를 받으신 분은 여왕 한 분, 공작부인 여섯 분, 후작부인 여덟 분밖에 없어요.”
카테리네가 장인, 장모들 앞에서 이민호의 심장에 말로 비수를 찔렀다. 여왕은 혜영, 공작부인은 혜진, 민희와 민영, 비올레타, 주상아 공주, 아라 공주였다. 미카가 혜진이나 주상아 공주 등과 동급의 작위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해서 후작부인이었고, 나머지 후작부인은 왕명명과 브루나이 공주들이었다. 작위에 따른 권리는 없고 단순히 서열에 따른 작위 봉작에 불과했다.
“그래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길 바랐는데 아쉽게 됐구나.”
“발가락 열 개까지 동원해도 못 들어가요. 흑~”
베네치아 시녀들이 일곱 명이나 되다 보니 카테리네의 서열이 많이 밀렸다. 그러나 화려한 옷과 보석 장신구를 보면 후궁 서열 스물한 번째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부모를 만나 기고만장해진 시녀들이 만찬 시간 내내 이민호를 구박했다. 그래서 장인과 장모들이 오히려 딸들을 말려야 할 정도였다.
시녀들의 부모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해주고 있었다. 대부분 베네치아 상인들인 시녀들의 부모는 무역에서 다른 상인들과 다른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대신 베네치아를 비롯한 지중해 국가들의 정보를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게 됐다.
시녀들에게 오랜만에 집에서 부모들과 함께 보내라고 하룻밤 휴가를 주었다. 다음 날 오전 출항하기 직전에 배로 돌아온 시녀들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제 언제 다시 부모를 만날 줄 모를 시녀들이 불쌍해서 이민호가 카테리네를 혼내주려던 계획을 슬쩍 접고 말았다.
함대는 서쪽으로 항진하다가 이오니아 해에 접어든 다음 북쪽으로 꺾어 베네치아로 향했다. 폭이 100km가 넘는 아드리아 해를 큰 배 50여 척이 꽉 채우면서 북상했다. 아드리아 해 서쪽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 동쪽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가끔 베네치아 영토가 동쪽 해안에 산재해 있었다.
============================ 작품 후기 ============================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로서 고산국의 동맹국인 베네치아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이쿠~ 지난 편을 올렸네요. 다시 올립니다.
뭔가 수정 좀 한 것 같은데, 날아갔겠군요. 오류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