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4 56. 지중해 원정 =========================================================================
56. 지중해 원정
3월 2일 원정 함대가 아리수 항을 출발했다. 국왕좌승함을 포함한 순양함 24척, 각종 보급선과 수송선이 16척, 장갑차와 기타 차량 100여 대를 태운 신조 상륙함 3척, 해상 수색과 수심 측정을 위한 탐사선과 연락선 등 총 51척이었다. 기병연대와 구르카 여단, 기계화보병 대대 외에 육군 다수가 여러 종류의 함선에 탑승했다.
3개 전단으로 구성된 해군 원정 함대는 총함장 이순신이 지휘했고 지상군 지휘는 계복이 맡았다. 고산국에서 나름대로 국력을 기울인 원정이었다. 규모가 커지자 계복이 이민호를 졸라서 원정에 참가했고, 동해국에 가 있던 감동이 귀국해 왕도 방어를 맡았다.
여차하면 오스만 제국과 일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원정을 가는 이민호의 얼굴색이 밝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국 건국 후 지금까지 패전을 몰랐던 병사들은 그저 웃고 떠들었다. 병사들에게 원정은 공짜 외국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사상자가 좀 나올 것 같은데.”
함교 위층 관측실에 오른 이민호는 순양함 중에서 병원선 설비를 갖춘 배를 확인했다. 고산국 원정군에서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일이 없어서 정식 병원선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불안했다.
“오스만 제국과 싸우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지 않아요?”
“바로 그게 문제지. 교섭을 잘해봐야겠어.”
이민호가 민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4분의 3쯤 고산국의 내해로 변한 남중국해를 50여 척이나 되는 함선이 물살을 갈랐다.
“시녀가 너무 많아요.”
“그러게 말이야. 하마터면 승조원보다 많을 뻔했다.”
에스파냐와 협조할 일이 예상됐으나 아이가 걱정돼서 비올레타 대신 갈리시아 시녀 세 명만 원정에 참가했다. 지중해 무역을 위한 원정이므로 베네치아 시녀 일곱 명이 고스란히 다시 함대에 동승했다. 투르크어 통역으로 지명된 둘을 포함한 갈라티아 궁녀 여섯 명과, 러시아어 통역 둘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궁녀 여섯 명까지 시녀와 궁녀는 22명이었다.
여기에 이번에 왕립여학교를 졸업한 설비와 여진족 호위 여섯, 아이누 족 출신 예비 후궁 넷이 따라왔다. 인턴 비슷한 교육 목적으로 데려왔는데, 전쟁과 교역 모두 이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민영을 제외하고 기존 여진족 호위가 열둘이니까 국왕좌승함에 탑승한 이민호의 여자만 46명이나 됐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적당한 숫자만 노출시키도록 해.”
“어머! 주인님 창피하세요?”
“병사들에게 자랑할 일은 아니잖아.”
민영은 원정에 참가한 내명부 소속 궁인들 중에서 최상위 신분이었다. 후궁들이 침전에 들 순서를 정할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누가 결정하든 순서는 공평한 편이었다.
“지난번 두 달 간의 원정에서 겨우 둘만 임신했어요. 주인님이 좀 더 노력해주세요.”
“그게 마음대로 되나?”
“마음대로 안 되니까 더욱 노력하셔야죠.”
기회를 잘 포착하던 호위 민정이 결국 소원을 풀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적극적이던 갈라티아 궁녀 하나도 임신에 성공했다. 궁성에 남은 둘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돌보는 외에 동료들에게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었다.
이번 졸업생 11명을 빼고 침전에 들어올 여자가 35명이었다. 임신 가능성이 높은 날 이틀 동안 침전에 들게 한다면 이민호는 하루 평균 2명만 안아도 됐다. 이민호가 원정을 자주 나가는 이유가 밤이 무서워서라는 의혹을 샀다.
“오빠! 우욱!”
“설비는 들어가서 누워있어라.”
“임신한 것 아닐까요? 읍!”
“시끄럿! 처녀가 못하는 말이 없어.”
뱃멀미에 얼굴이 허옇게 변했으면서도 농담을 하는 설비가 궁녀의 부축을 받고 비틀거리며 선실로 내려갔다. 왕립여학교 졸업생들에게 다행히 첫 원정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는 항로가 아니라서 뱃멀미가 덜한 편이었다.
나흘 만에 함대가 말래카 해협에 도착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 거대한 배 51척이 해협을 가득 메우며 나타나자 주변국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포르투갈령 말래카에 함대가 정박하자 다음 날 아침에 아체 술탄국과 조호르 술탄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세 나라가 평화롭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세 나라를 설득해 화합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포르투갈 말래카 총독이 이민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감사를 표했다. 설득이라기보다는 함포를 앞세운 위협에 가까웠지만 잘 지낸다니까 다행이었다. 조호르 술탄국에서는 터번을 쓴 귀족이 왔는데 아체 술탄국에서는 갑옷을 입은 여자가 인사했다.
“아체의 해군 총함장 말라하야티입니다. 존경하는 고산국 국왕폐하를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유명한 여 제독을 만나 뵙게 돼서 반갑소.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해적 놈들 때문에 그 동안 고생이 많았소.”
“제가 맡은 일입니다, 폐하.”
미망인 여제독 말라하야티는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하게 접하고 이번에 처음 만났다. 아체에서는 죽은 남편의 복수를 아들이나 형제가 아니라 아내가 직접 했다.
20세기 초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을 이끈 튜트 냑 디엔은 직접 게릴라를 지휘해 전투에 나섰다. 라멘 아젱 카르티니는 편지 한 장만으로도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말라하야티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아체 술탄국의 함대를 이끌고 직접 싸워 큰 성공을 거뒀다. 실제 역사에서 말라하야티가 싸운 상대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포르투갈 함대였고, 죄다 박살냈다. 유럽 탐험선이나 상선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나 세 나라가 일관되게 깨진 곳은 아체가 유일했다.
“혹시 무기가 부족하지 않소?”
“자바 섬의 여러 무역도시들을 설득해서 해안 요새에 배치됐던 고산국 대포를 수입했습니다. 유럽 해적들 상대로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폐하.”
“저런! 고산국에서 직접 수입하면 가격을 낮출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소.”
그래서 이민호가 포르투갈 총독과 조호르 귀족이 보는 앞에서 머스킷 200정을 여 제독에게 선물로 주었다. 함포로 사용할 만한 대포도 몇 달 안에 넘기기로 했다. 말래카 총독과 조호르 귀족의 입이 떡 벌어졌지만 감히 이민호에게 항의하지 못했다.
“선물이라뇨. 감사합니다만 폐하께서 설마 제게 청혼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나라를 떠날 수가 없답니다.”
“아니요. 순수한 선물이오. 침략자들을 상대로 잘 싸우시기 바라오.”
그러나 순수한 선물 따위는 없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난동을 부리면 혼내주라고 건넨 무기였다. 말래카 해협을 지나기 전 입구에 위치한 아체를 만만한 동남아시아 국가로 생각해 공격했다가 혼쭐 난 유럽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19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30년 가까운 전쟁을 하고 수만 명이 전사한 다음에야 간신히 아체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독립전쟁이 일어나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벌어들인 이익금 전체를 아체에 전쟁비용으로 처넣어야 했다.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포르투갈이나 조호르 술탄국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내게 알리시오. 혼쭐을 내주겠소.”
“국왕폐하! 저희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요.”
조호르 귀족이 항의하자 이민호는 그 약속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이 시기에는 유럽인의 침입을 막아내는 아체 술탄국의 위상이 높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 나라를 공정하게 대해주는 편이 좋았다.
“포르투갈은 고산국의 우방이고, 조호르도 고산국의 적국이 아닌 좋은 우방이 될 것으로 믿소. 해협을 더 많은 상선들이 통과해야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이오. 그렇지 않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해협 통과료를 면제하고 입항료를 낮추니까 상선의 입항이 많아져 중개무역이 활성화됐습니다.”
“그러소, 총독.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이 무역에 있는 만큼 상인들을 잘 보호해주시오.”
아체 술탄국과 조호르 술탄국에서도 고산국에 상선을 보내 교역을 하므로 딱히 이 지역에서 원정 함대가 직접 상품을 판매할 일은 없었다. 괜히 직접 무역을 했다간 고산국을 오가는 상인들의 활동만 위축될 뿐이었다.
그래서 세 나라 귀족들에게 선물만 돌렸다. 옥 도자기나 진주목걸이가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귀족들은 감사히 받았다. 그 과정에서 민영이 이민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주인님. 여 제독이 주인님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아요.”
“에이! 나이 차가 열 살은 나는데, 설마.”
“마치 예비 사위를 보는 듯한 장모의 따스한 눈길이에요.”
“헉! 도망가자.”
말래카 총독궁에서 오찬이 진행되는 동안 이민호는 말라하야티의 눈길을 받으며 좌불안석이었다. 역시나 여 제독이 그 말을 꺼냈다.
“제 딸이 어려서 폐하께 바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성인이 되는 내년에 고산국 왕도에 보내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소.”
이 시기 아체에서 시집갈 나이가 열두 살부터라고 들었다. 지금도 자바 섬의 여러 무역도시에서 보낸 술탄의 어린 딸들이 고산국 왕립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공평무사해야 할 고산국 국왕으로서 유독 아체의 호의만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아! 임진왜란의 영웅이신 고산국 총함장과 아체 여 제독 가문이 사돈 관계를 맺어도 괜찮겠소.”
그러나 이순신이 노려보자 이민호는 말도 못 마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감히 네가 상의도 안 하고 이럴 수 있느냐’는 눈빛이라 이민호는 버틸 수가 없었다.
조선 사대부들이 첩을 여럿 두더라도 정식 부인 자리는 상당히 신중하게 결정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아체 술탄국 여 제독이라는 신분 높은 여자의 딸을 왕의 후궁이 아닌 신하의 첩으로 들일 수도 없으니 이민호가 잘못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무슬림들의 일부다처제를 변명거리로 삼으려 했다.
“이 제독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제 가문에 영광이겠습니다만, 자제분을 직접 보지 못한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어렵군요.”
“그렇다면 여 제독의 따님을 고산국 총함장의 양녀로 보내면 어떻겠소? 따님의 혼사 문제는 나중에 두 나라 총함장께서 협의해서 결정하시면 될 것 같소.”
“그것 참 묘안이십니다, 폐하. 저는 폐하의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여 제독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국왕인 이민호가 직접 며느리도 아닌 양녀 신분을 제시하자 이순신도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이순신에게 배운 여 제독의 딸이 나중에 아체 술탄국의 함대를 지휘하게 된다면 이 지역에 심각한 밸런스 붕괴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순신의 막내아들 이면에게 졸지에 10년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생겼다.
말라하야티가 타고 온 배를 순양함에 연결해서 다음 날 아침 아체 술탄국의 수도 반다아체에 도착했다. 거대한 배 50여 척이 몰려오자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던 아체 술탄은 함대가 고산국 소속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 동안 술탄 혼자서 외롭게 서양 배들을 막아내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아체 술탄국은 혼자가 아니요.”
“폐하! 폐하! 황공하옵니다!”
술탄이 눈물까지 질질 흘리며 고마워했다. 지난번에 함대를 이끌고 별 생각 없이 지나갔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아체가 강인한 전사들로 구성됐다 해도 정치 지도자에게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서양 배들을 상대로 그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상을 베풀어주기로 했다.
말라하야티에게 직접 건네준 머스킷 200정 외에 500정을 더 하사하고 술탄에게 편지를 써줬다. 이 편지를 가진 아체 술탄국 상인에게 고산국에서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 50문을 내주라는 내용이었다. 똑똑하게 생긴 왕자가 직접 고산국에 가서 대포를 받아온다고 했다.
“하와가 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전통 복식을 한 예쁘고 자그마한 소녀가 조선식으로 이순신에게 큰절을 올렸다. 하와는 인사말만 외웠고 조선말은 할 줄 몰랐다. 통역을 통해 몇 마디 대화를 해본 이순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어린 딸을 타향에 보내게 된 말라하야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너에게 최고의 남편감을 찾아주마.”
이순신이 새로 들인 양녀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이민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최고의 남편감 후보에 이민호가 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조금 섭섭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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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