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33화 (482/1,000)

00533  55. 1599년  =========================================================================

2월 말, 지중해 출정을 사흘 앞둔 날에 조선에서 전라 감사가 고산국 왕도를 방문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 수영에서 업무 협조차 아전이나 군관을 고산국에 보낸 경우는 많았으나 현직 감사가 직접 온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조선 조정으로부터 밀지를 받았다고 봐야 했다.

이민호는 전라 감사 이름이 황신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바로 ‘2’를 떠올렸으나, 황신은 30대 후반 양반 관료일 뿐이었다. 집무실에 함께 찾아온 해군 총함장 이순신이 씩씩거렸다.

“아! 정말 안 된다는데 자꾸 그러시오?”

“여진족 놈들을 몰아내야 하는데 조선에는 병력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면 백두산 주변을 다 빼앗길 겁니다.”

“그렇다고 남쪽 해안에 거주하는 간수군을 북쪽 끝 백두산에 동원합니까? 아저씨 진짜 말이 안 통합니다.”

백두산 주변에서 건주 여진 소속 약초꾼들이 국경을 넘어와 산삼을 채취하는 일로 지금까지 조선과 여러 번 충돌했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미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충돌 과정은 별다르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훨씬 심각했다. 양쪽 모두 거의 50명 단위로 충돌해서, 수십 명이 사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진족 약초꾼과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월경한 여진족 기마 전사들이 조선 기병에게 기습을 당해 몰살당했다. 건주 여진과 조선 함경도 군은 딱히 어느 쪽이 우수한 기병이라고 하기 어려워, 숫자가 비슷할 경우 기습한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여진족에서 국경을 침범했으니 다 죽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뒤처리 과정에서 발생했다. 함경도 기병이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여진족의 목을 베면서, 이것이 건주 여진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당연히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하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조선에서는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면서 백두산 주변 지역으로 군사를 증강시키려 했으나, 여러 가지로 난국에 처했다. 만포 동쪽부터 회령 서쪽까지 폐 4군 지역은 인구가 적어 행정적으로, 군사적으로 휑하니 빈 땅이라 조선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하기 어려웠다.

평안도의 만포 첨사가 방어를 맡은 지역은 압록강을 보급로로 이용할 수 있어 상황이 조금 나았다. 그러나 백두산 주변은 함경 남병사 휘하 병력이 국경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거리도 멀고 길이 험해서 예전부터 거의 방어를 포기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해동상단의 간수군 중에서 비번 일부를 차출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러나 전시에 남해안 수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병역을 갈음하는 간수군을 멀리 평안도와 함경도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간수군에게 과도한 병역을 부과하면 조선에서 간수군을 지망하는 자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일본이 망하면서 해적이 거의 사라져 사실상 간수군은 필요 없는 군사조직이 되었다. 배 한 척에 겨우 네 명에서 여덟 명이 탑승해서 조선에 딱히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이들에게 베푸는 월봉과 보급품이 조선에 퍼지면서 홍보효과를 크게 거두고 있었다. 이민호는 조선 조정에서 먼저 간수군을 해체하고, 장기적으로 고산국으로의 이민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인지 의심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기, 형님. 화나신 것은 알겠는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말씀입니까, 전하?”

이순신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황신이 이순신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이민호가 듣기에는 ‘족하’라고 들려서 분명히 욕이었다. 감히 성웅 이순신에게 그런 욕설을 하는 조선 관료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보시오, 영 선생! 언사가 심하시지 않소?”

“제가 말씀입니까, 전하? 조카님을 조카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때서 그러십니까? 아! 공적인 자리이니 인척 관계 호칭은 자제하겠습니다, 전하.”

알고 보니 50대 중반 이순신이 40세인 황신의 조카뻘이었다. 무안해진 이민호가 헛기침을 한 다음 대안을 제시했다.

“추포 선생은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백산 여진이 그 지역에 자리 잡았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소. 그러나 백산 여진이 건주 여진에게 패해 연해주로 이동한 다음, 그곳에 건주 여진 휘하에 들어간 다른 여진 부족들이 이주해 왔소. 아마도 그들이 국경선을 잘 몰라서 월경하는 문제가 생긴 모양이오.”

“분명히 알고도 넘어오는 것 같습니다만, 핑계꺼리는 되겠군요. 백산부라면 고산국의 속국인 동해국에 투항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속국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게 보일 것이오.”

백산부 여진족들은 광활한 연해주로 이주한 다음 신나게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호랑이와 표범이 멸종될까 걱정했지만, 멧돼지와 사슴 등 각종 야생 동물이 풍부한 이 지역에서 호랑이와 표범이 멸종할 위험은 적었다.

20세기 들어서 연해주에 사람들이 몰려가 논밭을 개간하고 동물들이 살기 어려워지면서 호랑이와 표범 서식 개체수도 급감했다. 역시 사람이 항상 문제였다.

“백산부가 백두산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으니 조선 조정에서 그들에게 국경 남쪽의 사냥터를 내주는 대신, 함경 남병사와 협력해서 건주 여진을 막게 하면 어떻겠소?”

“오호! 그것 참 묘안이십니다. 백두산에 오르는 심마니들의 보호를 그들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연해주에서 백두산은 먼 곳이니 기마 사냥꾼만 보내겠소.”

봄부터 가을까지 백산부 기마 사냥꾼 100명을 백두산과 개마고원 지역에 정찰과 국경 수비를 겸한 사냥을 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겨울이라도 함경 남병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백산부에서 최대 500명 한도에서 한 달 동안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다른 여진도 아니고 호랑이 사냥꾼 백산부 여진이라면, 그것도 백두산 주변 지역에서라면 열 배나 되는 침략군도 막아낼 수 있었다.

“전하! 건주 여진이 계속 커지면서 국경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건주 여진이 압록강을 넘어 침범할 경우 고산국과 동해국이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오. 조선은 고산국의 부모와 같은 나라 아니오? 하지만 조선이 먼저 건주 여진을 칠 경우 도와드리지 못합니다.”

“조선이 먼저 건주 여진을 침공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산국이 건국하고 나서 아직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다. 만약 조선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한다면 고산국은 당연히 공짜로, 심지어 국력을 기울여 조선을 도와줘야 했다. 그것이 고산국 백성들의 여론이었기 때문이다.

고산국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는 장병들이 대부분 조선 출신이었고, 가족이나 친지가 조선에 많이 남아있었다. 조선은 고산국을 꾸준히 경계했지만, 당연히 고산국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도 없었다. 고산국 병사들의 총부리가 어느 쪽으로 돌려질지 이민호가 직접 확인해 보고픈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추포 선생! 간수군은 핑계였지요?”

“헤헤!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시해보십시오. 가급적 들어드리라는 주상전하의 밀지가 계셨습니다.”

이민호는 두만강 상류 유역 일부를 10년 단위로 조차해달라고 요구했다. 폐 4군 지역을 경비하는 백산부 사냥꾼들이 임시 거처로 지내면서 농사도 짓고 목축도 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내가 조선 땅에 영토적 야욕을 부릴 이유가 없소. 그렇지요? 불안하면 최소 1년 전에 땅을 회수하겠다고 통보해주시오. 백산부 사냥꾼들과 함께 바로 물리겠소.”

“요즘 고산국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전하께서 골치를 썩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에서도 고산국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조선 조정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세세한 협상은 황신과 이순신이 맡아서 진행했다. 그래서 드디어 캐시미어 산양을 제대로 기를 수 있는 땅을 찾게 됐다. 만포 북동쪽 중강진만큼은 아니었지만 현대 지명 대홍단도 그에 못지않게 겨울에 끔찍하게 추운 곳이었다.

그 동안 캐시미어 산양을 2천 마리 이상으로 불리긴 했는데 털의 품질이 낮아 양치기 소녀 아이샤가 불만이 많았다. 이제 확실히 춥고도 건조한 지역에서 목양을 할 수 있게 됐다.

몇 년 전 개마고원 남동쪽에서 시도했던 산양 목축은 야생동물의 습격으로 인해 실패했었다. 그러나 백산부 사냥꾼들에게 목장 경비를 맡기면 호랑이와 표범들이 100리 밖으로 도망갈 것이다.

“감자와 천일염, 사창 등 전하께서 조선을 위해 해주신 일이 많았습니다. 전하 덕택에 조선에 아이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것 참 경하할 일이오.”

조선에서 식량 사정이 좋아지고 임진왜란을 거치고도 전염병이 돌지 않으니 태어나는 아기들이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조선에서 인구 대폭발을 불러 일으켰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도 백성이 매년 대폭 늘어난다는 소식에 무척 고무되어 있습니다. 백성의 숫자가 늘어나면 국가의 힘이 커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토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농지에서 나온 소출로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할 정도로 많아진다는 것이오?”

“전쟁 이후 복구할 것도 없이, 조선 팔도의 소출이 매년 대폭 증가하고 있습니다. 감자와 고구마도 훌륭한 식량입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수입하는 쌀의 양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으므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일도 없었다. 하지만 소출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인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식량 부족은 조선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고산국에서 남아도는 쌀을, 혹시 고산국에서도 부족하면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산 쌀을 조선에 싼 가격에 판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고산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만에 하나 조선 땅에 흉년이 들더라도 기근에 시달릴 염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조선에서 식량을 살 은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오. 금광과 은광. 해동상단에서 월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소?”

“전하께서 조선에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주신 덕택에 은은 풍부합니다. 그래서 쌀을 수입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조만간 성인 남자가 두 배 이상 늘어나는데, 이들에게 나눠줄 농지가 없습니다.”

“정말 부럽소.”

“헉!”

조선 관료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인구가 급증했다간 얼마 안 가 백성들을 굶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가 많아서 문제라면 이민호에게는 그저 배부른 고민에 불과했다.

이민호와 황신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고산국과 조선이 나라를 합친다면 단번에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상대방 국가에 통합되길 바라지 않았다. 황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정반대의 고민을 갖고 계시겠군요. 헌데 고산국과 달리 조선은 영토를 확장할 입장이 못 됩니다. 건주 여진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사는 지역 전체가 형식적으로 명나라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만 조선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소. 조선이 건주 여진을 몰아내고 영토를 차지하기 어렵겠구려.”

사실 동해국도 그 덕을 보는 입장이었다. 조선이 국경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 자유로웠다면 함경 북병사가 지휘하는 병력만으로도 동해국을 벌써 집어삼켰을지도 몰랐다. 동해국 여진족들이 건주 여진의 공격만 신경 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감자 먹고 자란 아이들이 곧 성인이 되겠군요.”

“전하 덕택에 고기도 많이 먹게 됐지요. 어렸을 때부터 잘 먹어서 그런지 아이들 체구가 큽니다. 남해안 지방 아이들은 교육도 잘 받았지요. 그러나 그 아이들 절반을 고산국에 빼앗길 것 같습니다.”

“백성들을 고산국에 보내줄 테니 준비하란 이야기였소? 안심하고 보내주시오. 조선의 아이들은 장래에 훌륭한 고산국 백성이 될 것이오. 앗! 농담이오, 추포 선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신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나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었다. 그 동안 이민호가 여러 가지 굴욕을 감수하고 조선에 끝없이 퍼준 효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만약 조선과 고산국이 사이가 나빴다면 백성들이 조선을 떠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땅이 없는 백성들이 고산국으로 이민 가는 것을 조선에서 막을 명분이 없었다. 나라가 백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으면 백성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사실 조선은 남아도는 백성들을 얼마든지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산국에 감사해야 했다. 고산국은 명나라나 필리핀 등 백성을 끌어들일 나라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고산국이 이민을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 조정에 굽실거릴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다. 몇몇 정신 나간 조선 관료들은 고산국이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자기들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고산국에 이민 온 백성들은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고산국에 이민 왔다가 돈을 충분히 번 다음 조선에서 여생을 마치려는 백성들도 있었다. 조선 등 외국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는 고산국은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막을 명분 역시나 없었다.

그래서 언제든 국적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된 두 나라 백성들이 사실 가장 큰 수혜자였다. 물론 양반과 노인들은 조선에 남고 하층민과 젊은이들은 고산국에 가려고 했다. 조선에서 생산 활동 인구 비율이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덮어질 문제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문제가 생기면 상황이 급변할 수 있었다. 지금은 광해군이 임진왜란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정치를 잘해나가고 있었지만 만약 기득권층이 욕심을 부릴 경우, 즉 피지배층을 수탈할 경우 한꺼번에 봇물이 터지듯 고산국으로 이주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광해군이 아주 잘해왔다. 조선에서 오는 이민자 수가 적어서 이민호가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든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건주 여진이 용트림하는 것으로 북쪽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병자호란(시간은 바뀔 겁니다) 떡밥을 깔아놓고 출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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