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32화 (481/1,000)

00532  55. 1599년  =========================================================================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소탕하려면 해군만으로는 부족했다. 해적선들을 모조리 격침하고 근거지를 불태워도 레판토 해전 직후에 그랬듯이 사라센 해적은 금방 재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튀니지와 알제리, 트리폴리에 위치한 해적의 지상 근거지를 단기간이라도 점령하기 위해 육군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원정에 참가할 병력은 수병과 해병 외에 기병 1개 연대, 보병은 구르카 여단, 그리고 장갑병이라 불리는 기계화보병 1개 대대였다. 수에즈 운하 개통 직전에 베두인 족과 잠깐 교전한 것 외에는 최초의 전투 출동이라 장갑병들이 바짝 긴장하며 훈련에 참가했다.

유탄포 장갑차가 완성돼 시험을 통과한 반면 구난차량의 견인 능력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이민호는 동일한 차량이 다른 차량을 충분히 견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현대 기준이었다. 장갑차가 같은 종류의 장갑차를 견인할 수 없었다. 지난번 모래사막에 장갑차가 빠졌을 때도 두세 대가 함께 모래구덩이에서 끌어낸 적이 있었다.

구난차량의 기관을 좀 더 큰 것으로 급히 교체했고, 중량을 맞추기 위해 철판을 얇은 것으로 바꿨다. 무게 중심이 달라져서 완충장치와 기타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이것도 고치고 있었다.

“구난차량을 전투용 장갑차와 반드시 같은 차대를 쓸 필요는 없소. 앞으로 좀 더 대형 차량을 개발하되, 이번에는 그냥 갑시다. 장갑차가 고장 나면 폭파시킨 다음 버려야겠소.”

“이 비싼 것을 버린단 말씀이십니까? 전하의 호탕함은 이 세상에서 제일이십니다.”

“아부요, 비꼬는 거요?”

국방연구소장이 놀라도 할 수 없었다. 현대에서는 전 세대에 활약한 주력전차가 낡아서 은퇴하면 포탑을 제거하고 새로운 세대의 주력전차를 견인하는 구난전차로 만들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기계류의 성능은 전반적으로 아직 현대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

“북미의 평원과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시베리아의 진창과 얼음판을 달려야 할 장갑차요. 요구조건이 까다로운 것은 당연하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개발비가 엄청나게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실전 경험이 없는 것은 저희 장인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장인들 문제가 아니라 설계자인 내 잘못이었소. 그리고 개발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대량 생산해서 개발비 비율을 줄일 수도 없소. 그저 비싼 차량이오.”

“아주 비싼 차량입니다, 장갑차는.”

적이 해안에 몰려 있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고산국이 상대해야 할 나라 대부분은 대륙국이었다. 잉글랜드를 제외한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무굴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루스 차르 국은 광대한 영토와 함께 수도가 내륙 깊숙이 위치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바닷가에 있다고 하나 함대가 접근하려면 아주 좁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함대가 해협을 통과하더라도 마르마라 해에 갇히기 십상이었다. 이스탄불을 공략한다면 바다가 아니라 차라리 지상으로 진군하는 편이 나았다.

지중해 출정을 준비하는 동안 북미 개발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새원산에서 북쪽 온타리오 호수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도로와 철로가 서쪽으로 급선회해 드디어 이리 호에 도달했다. 새원산 서쪽은 애팔래치아 산맥, 북쪽은 수십 개의 빙하 호수로 막혀 있어서 터널과 교량 건설을 최대한 피하려는 노선 선정이었다.

이로쿼이 부족 연맹의 방해가 사라지고 북미에 새로 도착한 모리스코인들이 도로와 철도 건설에 참가하면서 진행 속도가 확 늘었다. 모리스코인들을 위해 임시 주거지에 작은 모스크를, 도시 건설 예정지에 커다란 모스크를 지어주었다.

아일랜드 사람들도 계속해서 북미로 이주했다. 보름 단위로 이민선이 새강릉과 아일랜드를 왕복하면서 한 달에 6천 명 정도를 수송했다. 이주민들을 수용소에서 최소 열흘 이상 머물게 해서 질병 치료와 충분한 영양 공급을 마친 후에 배를 탈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배에서 죽는 경우가 줄어들었으나, 어린아이나 여자가 여전히 한두 명씩 죽어서 이주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일랜드에 대한 식량 공급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북유럽 각국에 식량을 판매한 덕택에 아일랜드에 지원하는 식량 운송비용이 충분히 빠졌다. 유럽에서 곡물 가격이 하락해 그 동안 곡물 수출로 돈을 벌었던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정부와 귀족들이 환영했다.

그리고 갈리시아에서 제작한 머스킷이 매달 2천 정씩 아일랜드 무장 독립 단체로 꾸준히 흘러 들어갔다. 결과는 반란 진압을 위해 대규모로 더블린에 투입된 잉글랜드군의 참패와 아일랜드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으로 나타났다. 연초에 아일랜드 총독으로 파견된 에섹스 백작이 주도해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독단적인 조약 체결이라 해서 잉글랜드에서는 그 조약을 무효화했다. 에섹스 백작은 즉시 런던으로 소환됐고, 여왕의 신뢰를 잃은 에섹스 백작이 런던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므부투가 보낸 문서를 이민호가 읽었다. 작년까지 여러 가지 문제로 고생하던 므부투와 아프리카 왕국은 작년 가을부터 대대적인 확장을 해나갔다. 그래서 서쪽으로 탕가니카 호수, 남쪽으로 말라위 호수에 도달했고, 북쪽으로는 빅토리아 호수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에티오피아 국경에 도달했다.

현재 왕국의 영토 면적은 100만 평방킬로미터 이상, 인구는 80만 명을 넘어섰다. 고산국에서 므부투와 함께 귀국한 병사들 외에 동원 가능한 전사가 5만 명이나 되었다.

편지를 읽는 사이 키가 190cm가 넘는 흑인 여성이 집무실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고산국 군복과 비슷하게 제작한 군복 치마 끝에 이민호의 시야가 걸렸다. 스와힐리어 통역이 이민호를 도와줬지만 대부분은 여성 장교가 직접 조선말로 대화했다.

“못난이 중위라고?”

“예! 전하. 저는 아프리카의 빛나는 별 므부투 대황제폐하께서 52번째로 얻으신 루오 족 출신 예쁜이 황후폐하의 여동생입니다.”

“대황제는 또 뭐야? 52번째? 허!”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므부투 이놈을 아프리카에서 흑인 왕국을 세우라고 보냈더니 하렘을 건설하고 있었다.

“주변 여러 부족을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흡수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황후폐하가 현재 75분이 계십니다.”

“원래 황후가 루오 족 출신이었지? 키가 굉장히 큰.”

“그렇습니다, 전하. 대황후폐하께서는 불행하게도 노예로 끌려갔다가 고산국에서 대황제폐하를 만나는 행운을 얻으셨습니다. 제 언니인 예쁜이 황후폐하는 육지 바다 동쪽에 사는 부족 추장의 열다섯 번째 정실부인의 세 번째 따님이십니다.”

못난이와 대화를 나눠보니 편지 내용과 별다를 것은 없었다. 작년에 잔지바르 섬 서쪽 지역에 완전히 정착을 마친 므부투는 아프리카 대륙 동부를 빠르게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빅토리아 호수 주변을 확보해 조만간 아프리카 동부의 식량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희소식도 전했다. 기존 원주민들이 경작한다면 부족이 먹고 약간 남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므부투의 아프리카 왕국이 경지 정리와 관개사업을 마치고 고산국에서 도입한 새로운 품종을 재배한다면 수확량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었다. 므부투는 농경지 자체를 몇 십 배로 늘릴 계획을 세웠다.

“좋아. 이 정도면 백인들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겠어. 그런데 귀관, 못난이 중위는 고산국에 계속 있을 거라고?”

“예, 전하. 아프리카 대황제국과 고산국 사이의 무역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인간 참. 마치 고산국이 속국인 것 같군.”

“아직은 평등한 교역보다는 소국, 아니 고산국에서 지원해주시는 양이 많지만, 조만간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평등한 교역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고산국 국왕전하를 유혹하라는 임무도 받았습니다.”

못난이 중위가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렸다. 늘씬하고 탄탄한, 그러면서도 짙은 갈색의 다리가 드러났다. 두껍지는 않아도 완전히 근육으로 되어 있어서, 그저 황후의 여동생이라서 중위 계급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못난이를 훌륭한 여전사로 인정할 수는 있겠으나 이민호에게 미인계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못난이가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울먹거리는 게 너무 불쌍했다.

“예뻐. 하지만 그 임무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할 것 같군. 귀관이 군인이라면 그런 명예롭지 못한 임무는 거부하도록. 그리고 앞으로 교역 문제는 총리하고 상의하도록 해.”

“대황제폐하 말씀으로는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눈이 낮아서 저라면 충분히 성공할 거라고 했습니다.”

“므부투 나쁜 놈! 못난이 중위 귀관은 확실히 미인이다. 나 말고 귀관이 좋다는 젊은이들을 만나도록 해.”

“저도 제가 미인인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없습니다.”

“너희 부족이 키가 너무 커서 그래. 눈을 낮춰봐.”

언니가 대황제와 결혼했으니 동생은 못해도 국왕과 결혼해야겠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고산국에서는 예전 흑인 연대 때문에 익숙해서 백인보다 흑인이 인기가 좋았다. 군복이든 드레스든 아무 거나 입더라도 못난이 중위는 충분히 미인 대우를 받고도 남았다. 그러나 당장 이름부터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므부투에게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정하라고 권했는데 현재 므부투를 비롯한 왕실 사람들은 조선말을 왕실 언어로 쓴다고 했다. 피지배계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백성들과 유리된 지배층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왕도에 마당이 딸린 3층 건물 하나를 공관으로 내줘서 못난이 중위가 아프리카 왕국의 대사 역할을 맡도록 도와줬다. 대사관 대문에 한글로 아프리카 대황제국 대사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전사 10여 명과 관리나 일꾼 남자 30여 명이 못난이에게 꼼짝 못한다고 미카를 통해 나중에 전해 들었다.

못난이 중위는 지금까지 예조와 병조에서 아프리카를 지원해주던 부서들을 상대하게 됐다. 결정이 빨라져서 해당 부서들은 좋아했지만, 어쩐지 아프리카 왕국에 지원하는 양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못난이 중위가 수시로 궁성 집무실로 찾아왔다.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은 못난이는 이민호에게 말도 편하게 하게 됐다.

“전하께서 보석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것을 봐주세요.”

“오호! 대단하다. 사파이어와 닮았군. 세공을 잘하면 꽤나 멋지겠어.”

“비슷한 돌 중에서도 그것만 파란 색이에요. 대황제폐하께서는 전하께서 평범한 돌을 아주 예쁜 보석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맞나요?”

탄자나이트인데 이민호는 이름도 몰랐다. 못난이가 가져온 파란 보석은 탄자나이트가 벼락을 맞고 변형된 것이었다. 이민호는 이것을 열처리해서 영구적으로 파란색이 발현하도록 하는 시험을 하기로 했다.

“자원이 별로 없나? 남쪽으로 진출하면 다 해결될 텐데. 에티오피아하고 관계는 어때?”

“에티오피아의 암하라 족은 물론 콥트교 사제들과도 우호적으로 접촉하고 있어요. 곧 국경 협상이 진행될 거여요.”

“잘했다. 굉장히 오래 지속된 제국이니까 나라를 지킬 역량이 충분히 있다는 소리다. 에티오피아하고는 싸우지 마라.”

“에티오피아가 이집트나 이슬람 국가들 중간에서 완충 지대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애매하더라도 기독교 국가니까 북쪽에 있는 편이 우리에게 더 유리해요.”

“그래. 사하라 사막도 넘어가지 마. 필요가 없어.”

정치 집단의 존속은 군사력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합의한 교육이 일정하게 유지되는지 여부에 달렸다고 봤다. 그래서 이민호가 못난이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들이 먹고 살 걱정 없게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전하. 아프리카 대황제국의 백성들은 일하는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다고 자부해요. 세금을 조금 내게 됐더라도 강한 부족에게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경우는 없어졌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대황제폐하를 존경하고 지지해요.”

국내에서 정적을 숙청해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 다른 나라를 정복해 노예로 만드는 것이 이 시대 정치였다. 그러나 므부투는 이민호가 선택한 국왕답게 야만인이 아니었고, 정치 지도자들이 할 일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좋아. 그 생각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동안에는 계속 지원해주지. 하지만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편이 좋아.”

“예. 그래서 탄광과 철광을 개발하고 있어요. 저희들이 쓸 것은 저희들이 희생해서 만들 거여요.”

“가장 큰 희생을 하는 광부들에게 보상이나 제대로 해줘.”

현재 므부투를 제외하고도 아프리카에 제국이 두 개, 왕국이 여러 개 존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왕국이 다른 정치집단을 무력으로 정복해 복속시키는 일이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같으면 오히려 우호를 다지는 편이 아프리카 왕국에도 유리했다.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백성은 없어요. 일부 부족이 보유한 노예도 차차 해방해줄 거여요. 대황제폐하께서는 아프리카에 고산국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일구실 거여요.”

“므부투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고도 자신이 없었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왕도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므부투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요절하거나, 쿠데타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민호에게 아프리카라면 끊없이 반복되는 쿠데타와 피의 다이아몬드만 생각났다.

그러나 므부투는 고산국에서 지원을 받는다 해도 예상 이상으로 잘하고 있었다. 작은 전쟁 겨우 서너 번만으로도, 대신 결혼을 75번이나 하면서 넓은 땅을 지배하게 됐으며 자비롭고 광명정대한 지배자로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부족들 간의 싸움을 협상을 통해 종결시켰다.

므부투가 이끄는 아프리카 왕국은 잠시 확장을 멈추고 이제는 당분간 내실을 다질 때였다. 어느 세월에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달해 노예무역을 그치게 하고, 남쪽으로 진출해서 이민호에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넘겨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세계를 경영하려면 신경 쓸 게 많군요.

그래서 세계 정복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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