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0 55. 1599년 =========================================================================
궁성에 오자마자 베네치아 시녀들과 갈리시아 시녀들에 대한 교육에 들어갔다. 시녀들은 왕실여학교에서 교양 교육을, 예조에서 언어와 함께 상업과 외교에 관한 업무를 배웠다.
양쪽 다 구교 계통이라 과학 수업을 받는데 거부감을 약간 표시했으나, 나머지 과목은 쉽게 배웠다. 다들 어학에 특별한 소질이 있어서 조선말도 금방 익혔다.
시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용과 패션을 중점적으로 배웠다. 머리카락을 묶는 방법만 수십 가지였다. 옷을 입는 방법과 걷는 방법도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달랐다. 장신구를 다는 방법도 따로 배웠다.
예조에서 상업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상품의 등급 분류와 제조법, 원산지와 유통 비용, 복식부기 등 고산국은 지중해 무역과 다른 점이 많았다.
베네치아 시녀들이 고향에서 배운 상업 지식이 예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갈리시아 시녀들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원어 구사자들이라 예조의 어학 교육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우크라이나 궁녀들 중에 러시아어를 배운 여자가 둘이 있었다. 그리고 갈라티아 궁녀들 중에서 두 명을 투르크어 통역으로 선발했다. 예조에서 이들에게 외교관 교육을 시켰다.
“주, 주인님! 제가 오스만 제국의 궁정에서 황제와 대화를 나눠야 해요?”
“응. 통역은 말을 그대로 옮겨주면 되는 거야. 겁나?”
“무서워요! 하급 관리나 예니체리, 시파히 다 무서워요. 높은 관리들은 더 무서울 텐데 심지어 황제라니요!”
이민호가 한숨을 팍 내쉬었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두려워했던 대상이 고산국에 와서도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높은 사람들은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내가 함께 있잖니? 그리고 나도 국왕이야. 라니아 넌 모르는 모양인데 나도 꽤 높은 사람이야.”
“아! 맞아요!”
갈라티아 궁녀 라니아가 이제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갈라티아 궁녀 입장에서 이민호는 자비로우면서 가끔 잠자리를 같이 하는 젊은 주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민호가 라니아를 끌어안았다.
“너는 내명부 품계를 받았고 유럽에 갈 것에 대비해서 귀족 작위도 받았어. 너는 오스만 제국의 노예가 아니라 고산국 귀족이야.”
“네! 주인님 덕분이에요.”
궁녀로서 허드렛일이나 하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고산국왕 이민호는 몸도 빼앗고 능력도 최대한 착취하는 악질 고용주였다. 10대 중후반에 편하게 궁녀 일과 후원 정원사 일을 하던 갈라티아 궁녀들도 성인이 되자마자 고산국의 대업을 수행하기 위한 일꾼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내명부 수장인 혜영이 지정할 때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민호가 가끔 부를 때마다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라니아는 가난한 갈라티아 농민의 딸로서 노예로 멀리 팔려갔다가 이렇게 동양 부자 나라의 왕에게 밤 시중을 들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국방연구소 장인들을 장갑차와 함께 호주로 보냈다. 사막이나 늪지대 등 극한지역에서 장갑차의 활동 능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면 툰드라 지대에서도 시험을 하기로 했다. 냉각수가 얼어붙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냉매를 연구했다.
최초로 진수된 철선은 군용 함선이 아니라 다목적선이었다. 한국 해양경찰의 구난경비함과 비슷하게 폭이 넓은 안정적인 디자인으로 배수량은 3천 톤에 불과했지만 5천 톤의 순양함과 비슷한 크기였고, 제작비는 절반 이하였다. 두꺼운 티크목에 비해 얇은 철판이 가격도 싸고 무게도 훨씬 가벼워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목선에 비해 연료 효율이 급상승했고 적재 공간도 훨씬 넓었다.
함수와 함미에 3인치 함포와 기관총을 탑재한 시험용 철선은 해안경비대에 배치돼 여러 가지 시험을 진행했다. 여기서 시험한 결과를 바탕으로 개량을 거듭해 전투함과 상선, 유조선, 냉동선 등 다양한 선종을 건조할 예정이었다.
12월 말에 왕립방송국에서 제1 주파수를 통해 정규 방송을 시작했다. 매 시간 정각에 뉴스와 날씨를 짧게 보도하고, 생활정보와 짤막한 라디오 드라마 방송이 중심 프로그램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음악으로 때웠다.
연극을 재구성한 라디오 드라마가 고산국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모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하나씩 나눠준 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커다란 상자 모양의 단파수신기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제2, 제3 주파수가 시험 방송 중이며, 조만간 연극과 음악 전문 방송으로 키워갈 계획이었다. 그 전에 여러 문화권의 음악과 민요를 광범위하게 채록해서 새롭게 연주하거나 전문 가수에게 부르게 해서 녹음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섹스피어라는 극작가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에요. 고산국으로 모셨으면 좋겠어요.”
“셰익스피어? 잉글랜드의 궁정 극작가라서 런던을 안 떠나려할 거야.”
“여러 나라의 전설과 옛날이야기도 재미있어요.”
고산국 총리라는 혜영은 요즘 라디오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예전에 동화책으로 출판한 내용을 극으로 꾸민 프로그램도 인기가 좋았다.
“책으로 읽는 것하고 느낌이 다르지?”
“예. 성우들이 감정을 실어서 말하고 음향효과까지 곁들여서 더 현실적이어요.”
라디오 방송은 비단 혜영뿐만 아니라 고산국 모든 백성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줬다. 그리고 각종 산업 현장에서 생산성을 올리는 일등공신이 됐다.
“마닐라에서 단파수신기를 100대나 사 갔어요. 몇 대는 에스파냐 수도에 보낼 거래요.”
“하나에 100냥이나 하는 것을 100대나? 뜯어보겠지.”
회로를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에스파냐의 과학자들이 총동원돼 단파수신기를 분석하려 하겠지만 공들여 만든 가짜 회로를 해석하느라 골치를 썩이다 포기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직 전파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일부러 고산국 대학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2백 년 안에 에스파냐가 단파수신기나 전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었다.
1599년 새해가 밝아왔다. 기해년, 만력 27년이었다. 고산국 왕실에 소소한 변화가 있게 된 해였다.
“오빠!”
“어이쿠! 설비야!”
설비가 이민호에게 달려가 답삭 안겼다. 이민호가 과장되게 비틀거리면서 설비가 말만 한 처녀로 자랐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해주었다.
“오빠, 너무해!”
“설비가 참 예쁘게 자랐구나.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
“정말요? 헤헤!”
임진년 사천 해전 중에 왜선에서 구한 열한 살 꼬마 설비가 왕립여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그리고 왕립여학교 개교 초기에 입학한 아이누와 여진족 아이들 중에서 몇 명도 올해 2월에 졸업 예정이었다. 설비 빼고는 다들 후궁 자격으로 입궁한 소녀들이었다.
누구든 교육을 마치면 일을 해야 했다. 평민 아이들은 졸업 후에 1, 2년 놀다가 취업하는 경우도 흔했지만 궁성에서는 졸업 전부터 일을 시켰다.
내명부 수장인 혜영과 예조에서 교육을 담당한 최 선생의 인솔 하에 올해 졸업 예정인 소녀들이 집무실에 다 모였다. 설비 외에 아이누 족 4명, 여진족 여섯 명이 정말 예쁘게 자라났다.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했으니 일단 성인이었다. 고산국도 조선이나 이 시대 다른 나라들처럼 16세가 성인이었고, 아이누는 12세였다. 아이누 소녀들은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월경을 시작한 날을 만 14살로 일단 추정했다. 이것도 개인별로 차이가 커서 의사가 검진 후 나이를 확정했다.
“설비는 그 동안 혜진을 도왔지? 졸업했으니 바꿀 수 있어. 어떤 일을 할래?”
“계속 혜진 언니를 돕고 싶어요. 맡은 일이 너무 많아서 제가 빠져 나오면 미안할 것 같아요.”
“우리 설비는 착하구나. 하지만 일이 바쁜 건 혜영이나 최 선생도 마찬가지야. 설비와 너희들이 이렇게 무사히 졸업해줘서 고맙다. 이제부터 일을 시키마. 실컷 부려먹어주지.”
“웃는 표정이 너무 음흉해요!”
화약 제조는 혜진이 전담하고 있었다. 필요한 화약 양이 계속 늘어나 갈라티아 궁녀들이 화약 제조 공정을 나눠서 맡았고, 혜진은 무연화약 제조 기술의 핵심인 배합비율만 담당했다.
이 일을 얼마 전부터 설비가 돕고 있었다. 고산국의 최고 기밀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설비가 이민호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했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일도 잘 도왔다.
“좀 떨어지지 그래?”
“어때요? 곧 가례를 치룰 텐데요.”
치마가 짧은 투피스 정장을 입은 설비가 이민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겨 있었다. 설비가 입을 열 때마다 처녀 향기가 훅 끼쳐왔다.
혜영과 최 선생이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설비에게 응원하는 손짓을 보냈다.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왕궁에서 후궁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붙임성 좋은 아이가 이렇게 예쁘게 자라나서 언니들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당연히 예뻐 보였다.
“부끄럽지도 않니? 그리고 너 아직 만 열여덟이잖아.”
“곧 열아홉 살이 돼요.”
“알았다. 다른 사람들하고도 이야기를 나눠야지.”
“네~”
그래도 설비는 장래의 남편에게서 안 떨어졌다. 이민호는 설비를 품에 안은 채로 먼저 아이누 족 졸업생들을 살펴봤다. 조선 출신이 아닌 후궁들은 출신 지역 일을 돕는 것이 원칙이었다.
처음 고산국에 왔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당찬 아이들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다소곳한 자세로 눈을 살짝 아래로 깔고 있었다. 아이누 족 후궁 네 명은 약간 서구적으로 시원스런 눈매와 하얀 피부가 특색이었다. 물론 정장 아래 피부에는 솜털이 길게 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들었겠지만 너희들이 앞으로 아이누 족의 생활수준 향상과 아이누 영토에 대한 관리를 도와줘야겠다. 너희들과 동족인 아이누 족을 보살피는 일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지난 7년 동안 배웠습니다, 전하.”
“좋아. 아이누 어는 잊지 않았겠지?”
“아이누 섬에서 온 유모들에게서 남부와 북부 아이누 어를 모두 배웠습니다. 사할린에서 온 제지공의 부인과도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
아이누 섬은 북미나 호주 같은 고산국 직할 영토도 아니고 식민지도 아니었다. 동해국처럼 아이누 섬도 이민호가 왕을 맡은 독립국이라서, 유럽의 동군 연합과 비슷한 지위였다. 큐슈와 필리핀 북부는 식민지에 가까웠고, 유구국과 일본은 처지는 하늘과 땅 사이였으나 동일하게 보호국에 해당했다.
아이누 섬은 척박한 땅이었지만 넓다는 것만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기후가 나쁘더라도 넓고 물이 풍부한 토지는 기본적으로 농경지로 개간할 수 있으며, 산과 숲은 각종 자원의 보고가 될 수도 있었다. 북동쪽 강에서는 지금도 사금 채취가 한창이었고, 이것을 고산국의 철제 농기구와 바꿨다.
명나라에서 최고급품 대우를 받는 아이누 해삼은 한창 발전 중이던 고산국을 지금처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었다. 해달 모피도 유럽에 고산국 상품의 고급 이미지를 강화한 중요한 상품이었다. 아이누 섬의 해삼과 해달은 이민호 개인 소유였으나, 일부가 아이누 족을 보살피는 자금으로 사용됐다.
“영덕의 김 대감이 지금까지 아이누 섬에 철제 농기구나 가축, 곡식을 갖다 주고 그 대신 모피와 해삼을 가져갔다. 김 대감과 협조해서 아이누 섬을 발전시키는 일을 맡아라.”
“고산국과 아이누 족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전하.”
영덕 어부 김 씨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 조정에 군량미를 바친 공으로 절충장군이 되었다가 전쟁 말기에 다시 품계를 높여줘 김 가선으로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공신에 책봉되면서 다시 정2품 상계 정헌대부로 품계가 높아져 이제는 당당히 대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김 대감은 동해안에서 해삼 양식과 황태 건조 사업을 하면서 동해국과 아이누 섬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익 대부분을 고산국으로 돌리고도 큰 재산을 모았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동해안 여러 곳에 서당을 세워서 운영비를 지원해준 것으로 조선 조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현재 북부와 서부 삿포로의 토지만 개간됐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아이누 족 전체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중부나 동부에도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으니 그곳도 농지나 목축지로 개간하면 아이누 족이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업도 지원해줘야 한다. 예산과 지원 방법은 총리와 협의하도록 해라.”
“옥음을 받들어 아이누 족이 전하의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사옵니다, 전하.”
왕립여학교 졸업생은 올해는 몇 명 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매년 수십 명씩 쏟아질 예정이었다. 졸업 후에 다른 곳에 시집가지 않고 궁성에 남으면 이민호의 후궁이 되기로 정했는데, 아무도 궁성을 떠나지 않았다. 이민호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여진족 졸업생들이 할 일을 마저 정하고 본격적으로 지중해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겨울이 지나가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