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9 55. 1599년 =========================================================================
55. 1599년
휴가를 마친 이민호는 국왕좌승함에 타고 왕도에 도착했다. 평일 낮에 미리 통보도 안 하고 항구에 들어가니 마중 나온 사람도 별로 없었다. 무선 통신을 받고 해군 및 육군사령부 고위 장교들만 나왔다.
“장도에 무사 귀환을 경하 드립니다, 전하.”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해군 총함장 이순신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제주도와 큐슈, 유구국, 필리핀 북부, 팔라완 섬과 해남도까지 초계하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 동안 밖에 못 나간 계복은 심심해 죽으려고 했다.
“도련님 오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북쪽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요즘 별 일 있어?”
“별 일이 없어도 꾸준히 적정을 살펴야 합니다.”
“그런 일은 부하들한테 넘겨.”
맞는 말이긴 했지만 계복이 괜히 건주 여진 핑계를 대고 동해국에 놀러가려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계복이 왕도에만 너무 오래 있었다.
모피는 초겨울에 사냥한 것을 최고로 쳤고, 연해주 쪽에 호랑이와 표범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계복이 호랑이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리고 싶어 했으나, 직책 때문에 왕도를 떠날 수는 없었다.
“바이칼 호수 넘어 시베리아 탐사나 갔으면 좋겠습니다.”
“왕도를 버려두고?”
“제가 육군사령관입니까, 왕도 수비대장입니까?”
“겸하고 있잖아! 믿을 만한 사람이 적어.”
“감동이하고 직책을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아직 건국 초기라서 왕도의 안전은 반드시 확보해야 했고, 계복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리고 감동과 감불이 맡은 일을 잘해내고 있는데 괜히 계급이 높은 계복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기차를 타기 전에 갈리시아 시녀들과 우크라이나 궁녀들이 많이 놀랐다. 커다란 쇳덩이가 움직일 거라니까 타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이민호가 우크라이나 궁녀들 손을 하나씩 잡고 기차에 태웠다. 이민호의 손을 잡고 부끄러워하는 궁녀가 절반,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궁녀가 절반이었다. 그 다음으로 갈리시아 시녀들을 태우는데 아델리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하필 그 모습을 매의 눈으로 지켜본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힐난했다.
“전하! 그 사이에 눈 맞았어요?”
“헉! 아니오, 비올레타.”
“쟤 겨우 열여섯이니 몇 년 더 기다리세요. 예쁜 애죠?”
“고, 고맙소.”
처녀 섬에서 덮쳤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델리나가 친척 아니랄까봐 청초한 모습이 비올레타와 많이 닮았다. 비올레타도 시녀들 중에서 이왕이면 친척 여동생과 함께 평생을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 시녀들은 적당한 교육 후 갈리시아로 돌려보내 아일랜드를 원격 제어하는 일에 종사하게 할 셈이었다. 북미 공작부인과 관련된 시녀들이니 에스파냐에 돌아가면 인기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됐다.
“제가 생각한 계획이 있으니 더 이상 건드리지 마세요.”
“알았소.”
비올레타는 갈리시아 시녀들에게 고산국 귀족 작위를 줘서 마드리드의 사교계에 데뷔시킬 계획이었다. 미모와 재산으로 펠리페 3세의 총신들 또는 그 후계자들을 유혹해 시집보내면 에스파냐 궁정 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 아니오?”
“시녀들도 그런 역할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아요.”
시녀들은 하급 귀족 여식으로서 에스파냐에서의 신분 상승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비록 외국이지만 고산국 귀족 작위도 받고 큰 재산을 넘겨받아 에스파냐의 고위층 귀족과 결혼하게 된다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베네치아 시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오스만 제국의 사피예 술탄과 비슷한 역할이었다.
기차가 달리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곧 적응해서 다들 꺅꺅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가을걷이를 마친 논과 밭에 새떼가 무리지어 날아다녔다.
“전하. 밭에 새가 왜 저리 많나요?”
“먹을 게 많으니까. 고산국에서는 이삭줍기를 안 하거든.”
갈리시아 시녀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 고산국이 다른 나라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밀레의 작품에서 보듯이 유럽에서는 이삭 하나, 밀 한 톨이라도 아까워서 싹싹 긁어서 거둬들였다.
이민호가 잘난 척 으쓱했지만 속은 조금 쓰렸다. 인력이 아까워 이삭을 주울 생각도 못했다. 다들 바빠 고산족 원주민 말고는 새 사냥할 사람도 없어서 너구리와 삵만 신났다.
왕도 역에 도착한 다음 마차를 타고 대로를 통해 궁성으로 향했다. 겨우 두 달 사이에 새로 올린 건물들이 풍요로운 도시에 화려함을 더했다. 갈리시아 시녀들과 우크라이나 궁녀들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그 동안 큰일은 없었고, 혜영이 관리들을 지휘해 잘 처리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혜영이 따로 추려낸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외교적인 문제를 처리했다.
“명나라와 유럽에서 유통되는 은을 최대한 뽑아내자고요?”
“그래. 은 가격이 폭락하면서 물가가 앙등하고 있어. 은을 싼 값에 얻을 기회지. 보석이나 옥 도자기 같은 사치품뿐만 아니라 면직물과 모직물 공장도 좀 더 늘려야겠어.”
“공장 늘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일할 사람이 있나 모르겠어요.”
“항상 인력 부족에 시달려서 문제야.”
유럽은 에스파냐가 남미에서 가져온 은 때문에 은 가격이 폭락한 반면, 명나라는 상품 가격이 폭등하면서도 시중에 은이 부족했다. 환관들이 무차별로 걷는 세금정책 때문에 명나라의 모든 시장이 마비되고도 끊임없이 세금을 걷어갔다. 몇 년째 계속되는 상황인데도 명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건주 여진은 아직도 웅크리고 있었다. 해서 여진에 타격을 준 다음에도 아직 완전히 해서 여진 소속 부족들을 복속시키지 못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명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것 같아 괜히 이민호가 더 안타까웠다.
“명나라와 유럽에 고산국 상품을 수출해 은을 흡수하는 건 쉬운 일이에요. 하지만 그곳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질수록 이민 희망자가 많아질 테니 반대로 은을 더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쩔 수 없어. 이민자보다 몇 십 배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참! 북미에 쌀과 밀이 많이 남아서 밀은 유럽에 보내라고 했어.”
유럽에 곡물을 대량으로 푼다면 유럽 농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것이다. 그러나 곡물 가격이 낮아짐으로써 흉년을 맞은 농민들이 굶어죽을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북미와 호주에서 생산한 곡물을 실은 수송선들이 끊임없이 유럽으로 향했다. 호주에서 생산한 곡물은 남극항로보다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서해안을 거쳐 유럽으로 직접 향했다. 북미 서해안에서는 파나마 운하를 통해 대서양을 건넜다.
유럽의 권력자들은 싼 가격에 곡물이 들어오자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외국에서 곡물이 수입되면서 농민들이 세금을 바치기 어렵게 됐으나 오래 전에 수확물이 아닌 화폐로 세금을 내는 제도로 바뀌면서 권력자들은 농민들의 고통을 모른 척했다.
이민호는 혜영과 함께 지중해 해적 문제를 논의했다. 일단 오스만 제국을 설득시키는 것이 문제였는데, 해결될 가능성이 조금 엿보였다.
오스만 제국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올릴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고산국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고산국이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오만과 인도 상선들이 동지중해에서 활동하는 것을 오스만 제국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 해안에 자리 잡은 사라센 해적들을 퇴치하거나, 해적들이 오스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사라센 해적은 기독교 국가들의 영향력이 지중해에서 확장되는 것을 막아주는 중요한 함대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와 알제리, 몰타와 트리폴리가 대치한 채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죠? 수백 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이에요.”
“응. 그들이 싸우더라도 수에즈 운하를 이용해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을 증진시킬 방법이 필요해.”
지구본을 두고 혜영과 대화를 나누자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혜영이 노출이 심한 가죽 옷을 입은 상상을 하던 이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 사이에 작은 해협이 있어요.”
“그렇지. 메시나 해협이야. 오스만과 기독교 국가들을 설득해서 몰타와 트리폴리 서쪽 바다에서만 싸우라고 하고 민간 상선은 안전한 메시나 해협을 통행하게 할까? 잘하면 오스만과 사라센 해적, 기독교 국가들이 모두 찬동할지도 몰라.”
“해적이 찬성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지중해 무역을 안전하게 하되 오스만의 요구대로 사라센 해적들을 남겨둔다는 것도 사실 이상했다. 해적들은 이익이 있는 곳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상선을 약탈하지 말고 적국과 싸우기만 하라고 멍석을 깔아준다면 해적 조직이 장기간 존속하기 어려웠다. 부유한 상선을 약탈해야 이익이 많이 남지,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가봐야 간신히 유지비나 챙기는 정도였다.
“전쟁만 시키면 해적이 이탈하려 할 테니 오스만에서도 찬성하기 어렵겠어.”
“해적이 사라지면 에스파냐가 침공한다고 생각해서 북아프리카 주민들이 더욱 해적을 지지할 거여요.”
“맞아.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한다면, 해적이 없어지고도 에스파냐가 북아프리카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야.”
현대 국가들이야 함부로 남의 영토를 침공할 수 없지만, 일차 대전 이전만 해도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에스파냐도 국제적인 제재만 없다면 북아프리카에 욕심을 낼 것이다.
고산국 함대가 출동해 사라센 해적을 없애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가 두 대륙에 미칠 수 있었다.
“주인님이 선택을 하세요.”
“해적을 없애겠다. 오스만과 대적하더라도 말이야. 에스파냐에는 협조를 구해야겠어. 북아프리카 해적을 없애주는 대신 침공을 하지 말라고.”
“잘 선택하셨어요. 해적을 그대로 놔두면 지중해 무역은 죽어요. 대서양 무역에 다 빼앗길 거여요. 물론 해적들이 없더라도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쇠퇴는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여요.”
혜영이 크고 길게 보는 능력 하나만큼은 특별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일정을 정했다.
“먼저 이번 달 안에 오스만에 예조 판서를 보낼게요. 가급적 해적만 소탕하는 게 좋으니까 시도를 해보겠지만, 안 되더라도 할 수 없겠죠. 사피예 술탄이라는 여자에게 뇌물을 많이 써야겠어요.”
“응. 나는 그 동안 해군을 좀 살펴봐야겠어.”
“주인님은 또 원정 가시겠군요. 하루에 일만 냥이에요.”
“그러지 말고 섬이나 사업권으로 받으면 어때? 이번에 백단목이 나는 섬을 구했어. 구아노가 쌓인 섬을 찾았는데 그 섬도 함께 넘길게.”
백단목이 밀생하는 빵 섬은 이민호 개인 소유가 됐지만 나우루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구아노 교역권에 불과했다. 빵 섬 매입비용은 비단 100필 정도밖에 안 들었어도 경제적인 가치로 따지면 수천 배 이상이었다.
나우루에는 구아노를 채취한 만큼 돌과 흙을 퍼줘서 농경지를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섬 둘레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수백 년 후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수위가 높아지더라도 물에 잠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 백단목과 구아노는 주인님 개인 계정으로 남겨두고 지금처럼 원정 하루에 일만 냥을 받기로 해요. 직접 버는 것보다는 주인님한테 돈 받는 게 좋아요.”
“재정이 적자 아냐?”
“주인님이 주신 돈 덕택에 올해는 흑자예요. 큰 전쟁만 안 일어나면 괜찮아요.”
혜영이 보통 여자들처럼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귀여운 면이 있었다.
“어차피 육군도 함께 원정을 가야 하니까, 시간이 남으면 루스 차르 국에도 개입해야겠어. 거기는 눈과 진흙탕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있는 기간이 극히 짧아.”
“우랄 산맥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요?”
“응. 지금 우랄 산맥부터 시베리아 전체가 공백 상태니까 루스 차르 국만 견제하면 힘 하나 안 들이고 우리가 차지할 수 있어. 좀 멀어서 그렇지.”
이민호가 지구본을 돌려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지목했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당 흉내를 제대로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베리아를 얻으면 북극부터 남극까지 넓은 폭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유럽과 중동, 인도, 명나라, 중남미를 제외하고 조만간 세계가 고산국 손아귀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물론 아프리카는 직접 지배하지는 않더라도 강한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말은 에스파냐보다 고산국에 훨씬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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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바꿨습니다.
준비 좀 하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