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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524화 (473/1,000)

00524  54. 남태평양  =========================================================================

54. 남태평양

북미 북서부 해안지대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개발하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 도시를 건설할 곳인 남포와 새의주 주변에 상선을 자주 보내고 있었다. 모피 교역을 통한 원주민들과의 신뢰 형성과 상호 이익 증진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원주민들은 모피를 팔면서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곡식도 요구했다. 이 지역은 약간 추우면서도 땅과 바다, 강과 숲이 몹시 풍요로운 곳이었다. 사냥감과 물고기가 충분한 반면에 곡식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이민호의 직접 지시를 받는 어용상인들은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곡식을 원주민들에게 넘겨주어 인기가 좋았다. 어용상인들이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우호를 목적으로 교역했기 때문에 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익도 충분히 챙겼다.

현대 미국 시애틀과 밴쿠버 일대에 해당하는 남포는 북미 북서부 해안의 여러 정착 부족들, 그리고 동쪽 멀리 대평원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과 통하는 입구에 해당했다. 이 지역에서 북동부 오대호 주변에서 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모피를 구할 수 있었다.

콰키우틀 족과 살리시 부족들을 비롯한 남포 인근의 강변 부족들은 연어를 대량으로 잡아 햇빛에 말려서 먹거나 다른 부족들과의 교역에 이용했다. 교역 범위가 태평양 연안에서 대평원에 이르는 치누크 족 덕택에 대평원에 거주하는 여러 부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바로 이때가 북미 북서부 원주민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일지도 몰랐다. 조만간 남포가 건설되면 남이 노는 꼴을 절대 못 보는 이민호가 원주민들을 반복되는 중노동의 나락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대신 원주민들의 수명과 인구증가, 생활수준은 충분히 보장해줄 예정이었다.

“새인천은 북미 서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도 공업이라곤 석유와 피혁 두 가지뿐입니다. 에스파냐 상인들이 새인천을 고산국의 도시라고 믿지 못할 정도입니다.”

“개척도시가 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게. 인구가 남아돌면 자연히 공업도 차차 발전할 걸세.”

조선과 고산국의 가장 큰 차이가 활발한 공업과 상업이었다. 새인천에서도 에스파냐를 상대로 어느 정도 활발히 교역하는 편이었지만 공업 생산 능력은 거의 없었다. 이민호는 본토의 젊은 장인들이 기술과 경험을 쌓아 어느 정도 숙련된 다음 북미로 보내주기로 했다.

공조 참판이 이민호에게 툴툴거렸다. 젊은 관료는 땅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앞으로 100년 안에 인구가 남아돌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땅이 너무 넓습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라네.”

이런 속도로 과연 100년 안에 북미 서부 태평양 연안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를 모두 개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조선에서 한 100만 명 정도 이민을 받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조선에서 농지를 잃고 떠도는 유민이나 화전민이 거의 남지 않았다. 지금은 유민보다 경제력이 한 단계 높은 소작농들을 고산국에서 받아들인 다음 북미로 보내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났다.

“다들 열심히 아기를 낳아서 키우고 있네. 20년 이내에 사정이 확 풀릴 거야.”

“저도 국책사업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만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웬만하면 부럽다고 하겠지만 전하께서는 몹시 안 되셨습니다. 쉬엄쉬엄 하십시오.”

고산국은 아직 건국 초기이기에 밤이 됐다 해서 백성들이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공조 참판도 겨우 30대 중반이니 밤일도 열심히 해야 했다.

“참판은 더 열심히 하게. 고위 관료의 자식이 겨우 다섯이면 백성들에게 모범이 됐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출발 전에 함대의 모든 배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수송선에는 곡식 위주로 실었다. 그 외에 근무를 마치고 고산국 본토로 돌아가는 젊은 병사들도 몇 백 명 단위로 탔다. 다시 북미로 돌아갈 때는 가족과 함께 북미로 아예 이주할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함대는 새벽 일찍 출항했다. 괜히 백성들이 항구로 몰려와 환송하는 것을 꺼린 탓이었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일을 더하든지, 아니면 밤일이라도 한 번 더 하길 바라는 것이 이민호의 마음이었다.

나흘 가까이 걸려서 하와이 제도 오아후 섬에 도착했다. 와이키키 해변을 지나 진주만에 들어가는 입구 동쪽 들판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하! 저건 뭔가요? 탑인지 보루인지 아주 특이하게 생겼어요.”

“그게, 에. 탑이오, 방어 능력도 조금 신경 썼소.”

비올레타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건물은 공사 중인 비행장 활주로 옆에 서 있는 관제탑이었다. 원주민들이 수천 단위로 공격해올 경우 공항 근무자들은 공항경비대와 함께 관제탑에서 방어를 수행하게 돼 있었다.

“그 앞에 도로를 길게 닦았네요. 어떤 시설이죠? 혹시 자동차 주행 시험장인가요?”

“사실은 비행장이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곳을 만들고 있소.”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계 말씀이죠? 비행기에 직접 타면 짜릿하겠어요.”

“완성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소. 언제 성공할지 모르겠소.”

장인들과 조종사들은 몇 년씩 이어지는 개발과정에서 지친 것 같았다. 장인들은 비행기 개발을 일찍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침울해하는데, 겨우 몇 년 만에 성공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비행장은 고산국 본토 몇 군데와 필리핀 바기오, 호주 새부산과 새여수, 하와이, 새인천, 새원산 등 여러 곳에 건설했다. 아직 10km 이상 날아본 적이 없는 비행기 개발 속도를 감안하면 김칫국물 마시는 꼴이었다. 그러나 비행장을 나중에 만들려면 여러 모로 꼬일 가능성이 있어서 최소한 비행장 부지를 확보한 다음 도시를 확장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하와이 진주만 건설사업 책임자는 관리가 아닌 민간인이었다. 관리들 대부분이 북미와 호주 개발 사업에 투입돼서 하와이는 고산국 정부와 이민호가 자본을 투자한 국영기업에 건설을 맡겼다. 주택을 건축하는 순수 민간 건설기업은 여러 곳이 있었으나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할 규모의 민간 건설사는 아직 없었다.

“항구를 아주 잘 만들었소.”

“항구를 이렇게 크게 만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와이를 태평양 횡단 항로의 중간기착지로 쓴다지만 항구에 들르는 배는 한 달에 20척도 안 됩니다.”

“상황에 따라 전함과 순양함 수십 척이 정박할지도 모르오.”

“아아! 태평양을 바둑판으로 친다면 딱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나 현장소장의 감탄과 달리 바둑의 천원이나 이곳 하와이 제도는 전략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에스파냐 영토인 남미를 공격할 일이 없으면 하와이는 중간 기착지 또는 해군 휴양지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비행기가 개발되고 민간 항공이 활성화되면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었다.

수송선에서 쌀을 하역해 인부들 식량으로 쓰라고 내주었다. 진주만 항구와 부두 사용료로 백미 백 섬을 오아후 섬의 추장에게 넘겼다. 그리고 백단향 통나무를 천 단위로 거래하면서 천 석을 더 넘겼다.

“원주민들과 별 문제는 없소?”

“예. 원주민들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저들도 알게 해줬습니다. 우리 노무자들이 원주민 여자들에게 접근만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와이 섬 원주민들이 이곳 오아후 섬을 욕심내는 것 같습니다. 가끔 작은 배로 정탐하다가 이곳 원주민들에게 쫓겨나곤 합니다.”

“만약 섬들 사이에 싸움이 난다면 오아후 섬 원주민들을 도와주도록 하시오.”

보통은 원주민들의 내분에 개입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미 고산국과 교류를 하는 원주민 편을 드는 것이 여러 모로 좋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처음 보는 거대한 배들이 들락거리면서 하와이 섬의 침략 의도가 줄었다고 했다.

“방어에 한해 도와주면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그 동안 통역들이 언어는 많이 배웠겠지요?”

“물론입니다. 통역 다섯 명이 원주민들과 일상적인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 언어를 익혔습니다. 반대로 고산국 말도 원주민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민호는 공사 현장을 살폈다. 원주민들 2천여 명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원주민의 주식을 쌀로 바꾸고 경제적으로 고산국에 의존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원주민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면적이 얼마 안 되는 섬에 전사가 만 명이나 되는 곳이 오아후 섬이었다.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큰 하와이 섬에는 전사가 이곳보다 더 많다고 들었다.

이민호는 하와이 제도 원주민들의 주식을 쌀로 완전히 바꾼 다음 이곳 원주민들을 상선의 선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만, 전쟁을 막아주고 원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새섬의 원주민들과 언어가 비슷하다니까 잘 배우라고 하시오. 그리고 통역 한 명만 빌려주시오.”

“예, 전하. 원주민 언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통역이 전하를 수행케 하겠습니다.”

북미에서 근무를 마친 병사들에게 딱 하루 자유 시간을 주었다. 야자수들이 늘어선 와이키키 해변이 남자들만으로 가득 차서 이민호는 해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원주민 아이들이 안전하게 물놀이하는 바다와 연결된 웅덩이를 빌려서 시녀, 하녀들과 함께 쉬었다. 여진족 호위들과 우크라이나 하녀들이 비키니만 입고 모래사장과 바다를 오가며 뛰어놀았다. 다들 건강미 넘치는 모습이라 이민호는 가슴이 아닌 아래쪽이 뿌듯했다.

“안 덥소?”

“바닷바람이 시원해서 괜찮아요.”

비올레타는 그나마 시원하게 입었는데 갈리시아 출신 시녀들은 온몸을 가리는 옷을 서너 겹이나 입어 몹시 더워 보였다. 베네치아 시녀들도 마찬가지로 껴입고 왔다가 더위에 지쳐 헐떡거렸다.

“아~ 편하다.”

이민호는 야자수 아래 침상에 드러누워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민영이 야자수 즙을 따라주고 다른 호위들이 부채를 부쳐주었다. 내일부터 다시 항해가 계속될 예정이라 이 꿀맛 같은 휴식이 몹시 소중하게 느껴졌다.

“에잇! 더워서 안 되겠어요.”

“어머! 공작부인!”

비올레타가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속옷 하나만 입고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몹시 당황하던 갈리시아 시녀들도 옷을 하나씩 벗고 가슴을 가리며 바다로 들어갔다. 구경하는 이민호만 즐거웠다.

“바로 왕도로 돌아가지 않으실 건가요?”

“응. 몇 군데 들를 예정이야. 민영에게 흑진주 목걸이를 선물할게.”

“검은 진주는 아주 가끔 생기잖아요? 목걸이를 만들 만큼 돼요?”

“응. 남태평양 어느 섬에 흑진주만 생기는 진주조개가 있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비가 장대처럼 쏟아졌다. 물놀이하던 시녀와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야자수 나무 아래로 몰려왔다. 단시간에 그치는 열대성 스콜인데 오래 지속되는 줄 오해하고 걱정이 많았다.

“물속이나 비 맞는 거나 마찬가진데 왜 돌아왔어?”

“비 내리는 중에 해수욕하면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것도 많다.”

갈리시아 시녀들은 비올레타를 따라 속옷 한 장만 걸쳤기에 이민호가 볼 게 많았다. 뒤늦게 차림새를 자각한 시녀들이 꺅꺅 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야자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민영이 여기 어때?”

“모든 걸 다 잊고 푹 쉬고 싶은 곳이에요. 왕도에서 배로 온다면 일주일 정도 걸리겠죠? 거리만 가깝다면 정말 좋겠어요.”

“열 시간 정도 걸려서 온다면 괜찮겠지?”

“비행기로요? 일반 백성들이 관광도 하고 비행기도 탄다면 인기가 좋겠어요. 병사들을 해변에서 놀게 한 것도 홍보의 일환이었군요?”

“그건 아니지만, 홍보가 되면 좋지.”

평화가 계속된다면 비행기를 군용으로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군용으로 활용하더라도 이 시대에는 전투기보다는 수송기나 정찰기가 더 필요했다. 고산국 본토와 북미 사이를 배가 아닌 여객기를 탄다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앞에 챕터를 세 개로 분리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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