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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522화 (471/1,000)

00522  53. 북미 순행  =========================================================================

함대는 아침에 출발해 다음 날 낮에 파나마 운하 대서양 방면 출구인 콜론 항에 도착했다. 운하 개통 직전에는 휑하니 비었던 콜론 항에는 배가 20여 척이나 정박하고 있었다.

부두에 정박한 배들은 주로 고산국과 에스파냐 상선들이었다. 화물을 싣고 정해진 목적지로 향하는 상선이라도 콜론 항이나 건너편 파나마 항에서 화물을 추가로 싣는 경우가 흔했다. 뱃사람들이 파나마 운하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아 이민호는 은근히 기뻤다.

함대가 콜론 항을 지나쳐 운하 갑문으로 접근하는데 작은 배가 함대로 다가왔다. 에스파냐 선장이 손을 흔들어 사람을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예인선 선장입니다!”

“수고하십니다. 저는 고산국 국왕좌승함 갑판장입니다.”

“고산국과 에스파냐의 협정에 따라 군함을 최우선적으로 통과시켜드리겠습니다. 예인선 선미와 순양함 함수를 연결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배에는 고산국 국왕 전하께서 계시니 특별히 조심스럽게 예인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밧줄을 던져주십시오.”

“영광입니다.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자그마한 예인선에서 선원들이 밧줄을 던져 올리자 수병들이 함수에 묶었다. 잠시 후 예인선에서 높은 엔진음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국왕좌승함을 질질 끌고 갔다. 이민호는 민영과 함께 함수로 가서 예인선을 구경했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저 작은 배야.”

“기관을 뜯어서 다른 배에 달까봐서요? 살짝 뜯어봤겠지만 작동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언젠가는 알아내겠지. 그리고 복제를 시도하겠지.”

“결코 쉽지 않을 거여요.”

그럼 좋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에스파냐의 기계공업과 금속 관련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서 복제를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국왕좌승함이 갑문에 들어서는 중에 운하 통과를 위해 대기 중인 범선에서 특이한 깃발을 봤다. 국왕좌승함을 끌고 가는 예인선 선장에게 이민호가 물었다.

“이보시오, 선장! 프랑스 상선이 왜 여기에 있소?”

“우리 에스파냐와 전쟁이 끝났으니 파나마 운하를 넘어 고산국과 무역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수에즈 운하로 가지 왜 여기 파나마로 왔는지 혹시 들었소?”

“수에즈 운하가 이번에 개통됐다는 소식을 프랑스에서도 압니다. 하지만 지중해에 사라센 해적들이 많아서 파나마로 왔다고 합니다.”

이민호는 유럽 몇 개국을 돌면서 프랑스와 북유럽 상선들이 새원산이나 새강릉으로 오도록 유도했다. 그 동안 유럽에서 나눠준 해도는 대서양과 북미 동해안만 그려져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큰 모험인 이때, 일부 프랑스 상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태평양을 건너려 했다. 혹시 상선을 빙자한 탐험선일지 몰라 이민호는 약간 긴장했다.

만약 프랑스 상선이 몇몇 섬을 탐사한 다음 프랑스 영토라고 우기면 고산국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태평양 탐사전단이 모든 섬의 탐사와 해도 기입을 끝낼 때까지 유럽 선박이 태평양에 진입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선장! 우리 두 나라 말고도 외국 상선이 운하를 많이 통과하오?”

“콜론 항이 큰 무역항이 되면서 유럽 배들이 많이 옵니다. 대부분 북미 서해안에서 생산한 밀을 수입하기 위해서입니다. 운하를 통과해 직접 새인천으로 가는 유럽 배는 드문 편입니다.”

“밀을 운반해서 팔아봐야 얼마나 남는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소.”

“향신료보다야 못하겠지만 요즘 몇 년 동안 유럽 각국에서 밀 값이 폭등해서 충분히 이익이 남는다고 들었습니다. 쌀은 에스파냐에서, 밀은 프랑스를 제외한 북유럽 국가들이 수입합니다.”

올해 여름부터 고산국 북미 서해안에서 에스파냐로 곡물 수출이 이뤄지고 있었다. 에스파냐 상선이 직접 새인천으로 가기도 하지만 범선은 풍향에 크게 영향 받기에 소수에 불과했다.

보통은 새인천이나 새 나하 상선들이 파나마 항에 곡물을 하역하면 기차를 통해 산을 넘어 콜론 항에 실어 날랐다. 그 곡물을 유럽 여러 나라 상선들이 싣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국으로 향했다.

“주인님! 새인천에 밀이 안 남았으면 어떡하죠?”

“곡물을 수확하면 세금 5할을 내잖아. 농민들이 수확량 전체를 팔아치웠더라도 곡식 절반은 항상 남아있어.”

새인천에 연속 풍작이 들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쌀과 밀이 쌓여있을지 기대가 됐다. 그런데 2모작이나 2기작을 하는 지역에서는 추수나 풍년이라는 말을 쓰기 어려웠다.

“아! 곡식 절반은 주인님 것이네요.”

“내 것은 아니고 국가 소유지. 짐은 곧 국가니라. 이런 헛소리는 안 할 거야.”

“풋!”

이민호가 바람에 휘날리는 민영의 머리를 잡아 귓가에 넘겼다. 고산국과 북미, 유럽의 물가 차이가 커서 앞으로 꽤나 골치 아프게 생겼다. 북미에서는 원주민과 유럽 이민자 등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제를 실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 지역 중에서 식량 가격이 가장 싼 북미에서는 은 한 냥만 받아도 한 가족이 한 달을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의류와 철제 도구를 비롯한 공산품은 고산국 본토에서 실어 와야 하기 때문에 약간 더 비싼 편이었다.

군인이 한 명 포함된 가족의 경우, 군인 월급과 기본소득을 합해 최소 여섯 냥을 받고 가족마다 기본 소득 두 냥씩 고산국 본토와 똑같이 받았다. 한 가정의 생활비가 고산국의 4분의 1 정도인 한 달에 한 냥도 안 들었다. 나머지는 다 남아서 냉장고, 선풍기, 전기난로를 이미 산 가정에서는 그저 저축만 하고 있었다. 북미에는 관광지도 아직 못 만들어서 돈을 쓸 곳이 없었다.

“유럽 물가가 비싸다는데 프랑스 주재 대사는 어떡하지?”

“그러게요. 대사가 접시 닦는 일을 하기 전에 얼른 체재비를 올려주세요.”

“예전에 프랑스에 유학 갔던 의사들은 아무 말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전쟁 중이라 더 살기 어려웠을 걸요?”

이 시대 유럽의 대학에는 귀족이나 부자들, 또는 그런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는 평민 천재들만 다녀서 학비가 무척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물가를 확인해 보니 유럽에서는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비쌌다. 그 동안 유럽에 보냈던 유학생들이 돈이 없어 고생했을 생각을 한 이민호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부족하면 말을 해야 말이지.”

“국가에서 학비를 다 내줬으니 미안해서 생활비는 말을 못했을 거여요.”

“유럽에서는 아직도 필사한 책 위주라서 책값도 엄청 비싸.”

대학교 교재는 수요가 많지 않아 유럽에서는 인쇄할 조건이 되지 못했다. 유학생들이 아마도 책을 사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면서 공부한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고산국에 온 유럽 유학생들은 학비와 주거비, 의료비가 모두 무료라서 여유 있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유럽인 유학생의 절반 정도가 졸업하고도 고산국에 남았다. 유럽에 돌아가도 딱히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젊은이들이 고산국에서 인생의 승부를 거는 것이 유행처럼 퍼졌다. 현재 사회의 꽤 많은 분야에서 유럽인 유학생 출신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유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나서 본전을 충분히 뽑고도 남았다.

갑문이 열리고 호수를 지났다. 다시 갑문 두 개를 통과해 태평양으로 진입했다. 함대 20척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어휴~ 엄청나게 쌓여 있네!”

“비료 아녀요?”

“맞아. 구아노야.”

파나마 항 부두 야적장에 에스파냐 선박이 페루에서 싣고 온 구아노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것들이 고산국이나 유구국 배들에 실려 새 나하나 새인천으로 향했다.

현재 구아노를 비료로 쓰는 나라는 고산국밖에 없었다. 수송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범선 시대에는 유럽에서 구아노를 쓰기 어려웠지만, 19세기 중반 증기선 시대가 되면서 페루 진차(Chincha) 제도의 구아노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이민호는 하버-보쉬 법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할 수 있었지만 아직은 비료 생산에 활용하지 않고 화약 제조에만 사용했다.

“페루 해안에는 인광석이 수백 미터씩 쌓여있다면서요?”

“그래. 페루 원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비료로 사용했대.”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는 구아노를 수출해 한때 온 국민이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자원이 떨어지면서 나라가 망했고 구아노를 채굴하는 과정에서 섬이 낮아져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섬 전체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다.

함대는 다시 이틀에 걸쳐 북상해서 새목포에 도착했다. 중간에 아카풀코를 지날 때 필리핀 총독 구스만이 멕시코에 들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멕시코에 들렀다가 에스파냐 범선을 타고 필리핀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자기 나라 범선보다 훨씬 안전하고 빠른 고산국 배에 타는 것을 선호했다.

새목포는 북미 서해안 별궁이 위치한 곳이라 여기서 이틀 정도 쉬기로 했다. 그런데 고산국 군함 몇 척이 정박 중인 새목포 항구에 에스파냐 범선들도 세 척이나 있었다. 노를 젓고 다가온 단정에서 익숙한 얼굴이 인사를 해왔다.

“하하! 여기서 전하를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 어서 오시오, 돈 페드로!”

필리핀과 멕시코를 왕복하는 마닐라 갈레온과 그 호위 선박들은 험한 북태평양을 항해한 다음 캘리포니아 남부 해상에서 한 달 정도 정박하며 배를 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산국 항구에는 목재가 충분히 갖춰져 배 수리 기간도 일주일 정도로 대폭 단축할 수 있었다. 새 나하와 새목포가 생긴 이후로 마닐라 갈레온에게 훌륭한 중간 기착지가 생긴 셈이었다.

“왕도에서 거래를 주재하시는 아라 공주님은 피도 눈물도 없으십니다. 가끔은 기분 좋게 깎아주시기도 하시던 전하와 상담을 진행할 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허! 돈 페드로. 나는 이번에 유럽을 돌아보고 왔소. 유럽에서는 모든 게 비싼 것을 확인했소. 아시아와 가격 차이가 동그라미 하나 단위는 나더군요.”

“윽! 그래도 운송비가 워낙 많이 들어서 저희가 많이 남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요?”

“끄응! 사실 이익을 많이 남겼습니다. 선왕 폐하께서 전쟁으로 다 날리셨지만 말입니다.”

에스파냐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가 심해서 고산국 상품은 거의 대부분이 에스파냐 국내에서 소비됐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고산국 상품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대부분 판매되고 극히 일부분만 유럽 왕족들에게 팔려나갔다. 매번 이런 식이라서 네덜란드의 극히 일부 상인들을 빼고 북유럽 상인들이 고산국 상품을 거의 접하지 못하게 됐다.

“전하께서는 엄청난 힘을 갖고 계신데도 저희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시어 무역을 계속 독점시켜주고 계십니다. 덕택에 함대가 계속 태평양을 돌고 있습니다. 전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약속을 지킬 가치가 있소. 고산국이 성장한 데에는 돈 페드로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오.”

“북미 동해안에 도시를 여럿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유럽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하셔야 할 텐데, 저희와 약속한 것이 괜히 고산국의 행보에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내 독점권만 보장해주시면 고산국에서 직접 유럽 국가들에 모든 종류의 상품을 판매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흠. 조금 불편했는데 마침 말씀을 잘하셨소. 나도 그게 좋겠소. 양해해주셔서 고맙소.”

에스파냐 상인들이 새강릉이나 새원산에서 상품을 수입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필리핀 총독부의 무역 독점권을 지켜준다는 것이 사실상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에서 두 나라 상인들에게 판매할 때는 기존 가격을 지켜줌으로써 충분한 가격경쟁력을 갖춰주기로 했다. 북미 동해안에서 무역할 때는 고산국 본토보다 훨씬 비싸게 팔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북미 동해안에서 모든 상품의 가격을 전반적으로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외국 상선은 고산국 국영 무역회사를 통해서만 교역을 허가하기로 했다. 비단 같은 것을 고산국 백성들은 일반 가게에서 싼 가격에 사고, 유럽 상선들은 무역회사를 통해 비싸게 사는 이중 가격 구조였다.

당연히 밀수가 횡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지금도 유럽 어선들이 새원산에서 비단 같은 것을 보따리상처럼 조금씩 수입해갔다. 이것은 정식 수출이 아니었으나 적은 물량이라 눈감아주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새인천 하나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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