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0 53. 북미 순행 =========================================================================
과격한 오응태와 여진 기병들이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미시시피 하류 지역을 최악의 파국으로 몰아가지는 않았다. 오응태와 나체스 부족이 서로를 경계하며 극히 조심했기 때문이었다.
나체스 부족은 인원이 많았고, 오응태와 여진 기병은 강력한 기동력과 화약무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렇게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혔다. 물론 오응태가 마음먹고 공격하면 나체스 부족은 일패도지해 며칠 못 가서 부족 전체가 도주할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나체스 부족은 오응태가 싸움을 걸 만한 핑계거리를 쉽사리 내주지 않으며 몸을 사렸다.
“체로키 부족이 도망쳤으니 이제 고산국의 총구가 우리 부족을 향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체스 부족에는 용감한 전사가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나체스 부족은 60년 전에도 총을 갖고 몰려온 에스파냐 침략자들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에르난도 데 소토가 이끄는 탐험대는 북미 남동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여러 원주민 부족들에게 돌아가면서 얻어터지기만 한 것 같았다. 1538년에 크리크 족에게 쫓겨나고 1540년 치카소 족에게 몰살당할 뻔한 다음 해 1541년에는 나체스 족이 태양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사기행각을 벌이다 창피를 당했다.
에르난도 데 소토는 자기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으스대고 다녔다. 그러나 ‘그럼 강을 말려서 증명해봐라.’는 나체스 부족의 위대한 태양 퀸구알탐의 요구에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데 소토의 탐험대를 추격한 여러 부족 수천 명의 원주민 전사들 중에서도 끝까지 추격한 부족이 나체스였다.
“나체스 부족이 훌륭한 전사들이며 이 지역에서 원주민 부족들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고맙습니다. 그럼 우리 부족에서 고산국 국왕에게 제안을 하겠습니다.”
“해봐라.”
“새진주의 강력함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체로키 족을 일방적으로 패배시킨 것으로 인해 충분히 알게 됐습니다. 나체스는 새진주를 새로운 이웃으로 인정하며, 새진주의 이주민들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에게 고산국은 그저 침략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렇게 원주민 부족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거나 제압해서 지배영역을 늘려 나가야 했다.
에스파냐가 북미 원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지배력을 행사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몇 군데에서 원주민들에게 창피 당하고 쫓겨나기만 했다.
“에스파냐에서 샀으니 북미 전체가 우리 땅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모르는 일이니까. 계속 해라.”
“우리 나체스 부족을 비롯한 주변 여러 부족들을 조상의 땅으로부터 추방하거나 노예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럼 영토 일부를 어느 정도 내놓거나 교역에 열심히 참가하는 등 얼마든지 협조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억지로 기독교를 믿는 척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고산국이 좋아하는 전쟁으로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체스 부족이 의외로 숙이고 들어왔다. 나체스 부족은 미시시피 강 하류 유역과 그 주변 지역을 장악한 대표적인 부족이었다. 그러나 자존심만 내세워 고산국에 전쟁을 거는 바보짓을 하지 않아 이민호가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북미 원주민 부족들이 큰 실수를 비교적 덜 하는 것은 전체 부족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고, 지혜로운 자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체스 부족은 고산국을 에스파냐와 같은 기독교 국가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멀리 동쪽에 거주하는 포우하탄 부족 연맹에 관한 소문을 듣지 못했나?”
“포우하탄이라면 요즘 이 지역에서도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포우하탄 영토 내에 외지인들에 의해 새강릉이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 자비로운 물주를 만나서 아주 잘 살게 됐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자비로운 물주라는 분이 이곳에도 왔으면 좋겠습니다.”
“젠장! 그 물주가 나야.”
“예?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포틀래치라고 하면 주로 태평양 연안 원주민들이 새로 얻은 지위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선물을 교환하는 행위였다. 선물의 크기는 주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기 때문에, 명색이 고산국 국왕인 이민호는 받는 이들이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줘야 했다.
“작은 철제 주머니칼을 너희 사절단 여섯 명에게 나눠주겠다. 쇠도끼와 쇠톱도 하나씩 주지. 화살촉은 몇 개나 필요해?”
“헉! 고맙습니다. 화살촉은 열 개, 아니 스무 개요. 저희가 수도로 돌아가서 위대한 태양에게 바칠 선물도 주십시오.”
나체스 부족이 60년 전에 에스파냐 탐험대와 싸웠다면 몇 가지 전리품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머스킷과 에스파냐 투구 같은 것이 추장의 전리품 진열대에 전시돼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대한 태양에게는 날이 여러 개 달려서 무거운 핼버드를, 그의 어머니 하얀 여자에게는 색유리 구슬 여러 개를, 그 자식들인 태양족에게는 장창을 선물로 주라고 넘겼다. 그 시대 에스파냐 원정 탐험대가 쓰지 않을 만한 무기나 물건이었다. 사절단의 놀란 표정으로 좋은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떠냐? 나는 이렇게 신분이 높다.”
“국왕께서는 위대한 태양보다 더 높으십니다.”
눈을 휘둥그레 떠서 선물을 살피던 나체스 부족 사절단이 화들짝 놀라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절단은 절을 하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민호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으하하! 나체스 부족에게 새로운 작물을 주겠다. 따뜻한 황토 땅에는 고구마를 심고, 서늘하고 척박한 땅에는 감자를 심어라. 재배 방법은 내 부하들이 가르쳐줄 것이다.”
“새로운 작물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국왕께서는 혹시 위대한 정령이십니까?”
나체스 부족 사절단이 이민호에게서 선물을 받고 신이 나서 돌아갔다. 포우하탄 부족 연맹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니 나중에 경작지를 개간해 관개시설을 마련해주고 세금 5할을 뜯을 생각이었다.
주머니칼이나 도끼 같은 것은 얼마든지 선물로 줄 수 있었다. 겨우 몇 푼 안 되는 철제 무기와 장신구를 줌으로써 군사적으로는 잠재적인 적을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경제적으로는 큰 이익을 보게 됐다.
다음 날 오전에 비가 갤 때쯤 오응태가 여진 기병과 함께 돌아왔다. 오응태가 이민호 얼굴을 보고 놀랐다가 아주 반가워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오지까지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소. 하지만 원주민에 대한 대응이 조금 과한 게 아닌지 걱정이오.”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아! 저치들은 체로키 부족의 전쟁 추장입니다. 애팔래치아 산맥 깊이 들어가서 빨간 도시라는 곳에서 잡아왔습니다.”
며칠 사이에 참 멀리도 다녀왔다. 같이 갔다던 촉토 족 전사들은 중간에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진 기병의 기동력은 엄청났다.
“설마 체로키 부족을 붕괴시킨 거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발로 달린 놈들이 산에서는 기병보다 빠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겨우 300명쯤 잡아 죽였나? 그놈들이 하던 짓에 비하면 아직 응징을 제대로 못해줬습니다.”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강한 응징을 하게 됐소?”
“우리에게 협조적인 촉토 족 마을 몇 군데를 습격해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노예로 데려갔습니다. 급히 추격해서 다행히 다 구할 수 있었습니다. 촉토 족은 새진주의 동맹 부족이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습격했으니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휴! 알았소. 나체스 족이 우리에게 협조하기로 했으니 잘 도와주시오. 당분간 위협이 없을 테니 다른 부족들의 생업도 안정시키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나체스 족은 만만치 않았는데 잘 됐습니다. 그렇다면 여진 기병들도 당분간 생업에 종사하도록 징집을 해제하겠습니다.”
오응태와 함께 새진주의 기후와 위치에 대해 논의했다. 이민호는 새진주가 상습적으로 홍수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걸핏하면 비가 내리는 날씨도 문제로 제기했다.
그러나 오응태는 새진주에 비가 자주 오긴 하지만 날이 개었을 때는 아주 쾌적하다고 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아 미시시피 강 유역이 발전 가능성이 높으니 강 하구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응태가 호수 건너편으로 새진주를 옮길 의사가 없는 듯해서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 날 낮에 새진주에서 출항한 함대는 길고 가느다란 연안섬들의 틈을 통해 새순천 만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 울면서 먹을 것을 나눠주던 원주민들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새순천 소속 정찰선입니다.”
“우리가 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던 것 같소.”
작은 정찰선이 피아 확인을 한 다음 함대를 인도했다. 새순천 시장으로 부임한 강항은 문관 출신이면서도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 같아 이민호는 안심이 됐다.
함대는 정찰선을 따라 만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서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강 하구에 들어섰다. 거대한 저유고 수십 개가 세워져 있어서 이민호는 깜짝 놀랐다. 새순천 동쪽에서 유전을 개발했다더니 채굴도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더 놀랄 만한 것이 강 하구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부두에 배가 닿은 다음 마중 나온 강항에게 물었다.
“강 선생! 저게 뭐요?”
“보시다시피 요새입니다, 전하. 바다에서 공격해올 유럽 사략선단을 방어하기에 가장 적합한 크기로 최적화시켰습니다.”
이민호가 생각한 일반적인 해안 방어 요새와 달리 새순천 입구를 방어하는 요새는 크기가 꽤 작았다. 기능으로 보면 조선의 성보다는 어쩌면 왜성을 닮은 것 같았다.
조선의 북쪽 국경이나 남해안에 건설된 보, 또는 보루가 순수 전투를 위해 작게 지어졌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커져 작은 요새의 장점을 상실했다. 강항은 순수하게 전투만을 위해, 그리고 방어병력을 적게 투입하면서도 오래 버티게 하려는 의도로 요새를 작게 만들었다.
“혹시 순양함의 포격에 대비한 것은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요새 건설 규격을 분명히 준수하고 있습니다. 의심스러우시면 해병들에게 측량을 해보라고 명을 내리십시오.”
강항은 요새 건설 절목에서 규정한 한도까지 최대한 두껍게 벽을 쌓았다. 방향에 따라서는 5인치 함포의 철갑유탄에 관통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혹시 강항이 반란이나 독립을 염두에 둔 것인지 물은 것이었다.
“저는 이곳에서 5년 간 노역을 할 예정입니다. 제가 하는 일 모두가 전하와 고산국을 위한 일입니다.”
“알겠소. 업무보고를 해주시오.”
이민호는 가장 먼저 코코 족과 코하니스 족 등 카랑카와 부족집단에 대한 처우를 물었다. 비록 이민호가 거지 대우를 받긴 했지만 인간성이 가장 따뜻한 북미 원주민으로 기억하는 부족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구운 불가사리는 텁텁한 맛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주변 원주민 부족들 중에서 가장 후대를 해주고 있습니다. 연립주택 단지 하나를 통째로 넘기고 매달 식량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카랑카와 족 어른을 교사로 채용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잘 진행되고 있소?”
“물론입니다, 전하. 여름에는 숲에서, 겨울에는 바닷가에서 생활하는 카랑카와 부족집단을 위해 숲에 과실수 묘목을 심고 물고기를 잡을 어량(魚梁)도 만들어줬습니다. 그들의 정식 신분은 새순천 척후병으로서 매달 은 한 냥을 지급받고 있습니다. 물론 임무를 주지는 않고 특이한 일이 생길 때만 보고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잘했소. 아주 잘했소.”
키가 무지막지하게 큰 카랑카와 원주민들은 나중에 농구를 시키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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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내용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