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9 53. 북미 순행 =========================================================================
바로 그 날 아침 여러 가지 포도 품종의 묘목을 수송선에 싣고 멕시코 만을 지나 새진주로 향했다. 플로리다 반도 남단을 돌 때 해협 건너편 쿠바의 아바나에 가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일정이 촉박해 바로 새진주로 갔다.
미시시피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해역에서 함대를 멈추고 잠시 고민했다. 새진주로 가는 두 가지 길을 앞두고 전단장이 결정하기 전에 이민호에게 의향을 물었다.
“전하. 강 하류를 통해 가는 방법과 호수 쪽으로 우회해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전단장이 할 일이오. 알아서 선택하시오.”
“예, 전하.”
전단 참모진이 이미 두 가지 항로에 대한 분석을 마쳤는지 함대는 강 하류로 진입했다. 미시시피 강은 극악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사행천이라 강폭이 넓다 해도 순양함 정도로 큰 배가 강 하류를 통해 올라가는 것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새진주 북쪽 호수로 돌아서 가려면 얕은 바다와 폭이 좁은 해협을 지나가야 했다. 매일 같이 수심을 측량한다 해도 금방 퇴적물이 쌓여 배가 좌초할 위험이 있었다.
“이야! 강 출구가 왜 이리 많아?”
이민호가 지도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마치 나일 강처럼 미시시피 강 하구가 사방으로 분산돼 있었다. 그리고 강이 퇴적물을 가득 품고 내려와 양쪽으로 자연제방을 쌓으면서 바다로 달리는 꼴이었다. 언뜻 보면 폭이 좁고 긴 땅의 중간을 가르며 강이 흐르는 것처럼 생겼다.
함대는 한 줄로 폭 500미터쯤 되는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변에서 쉬고 있던 악어들이 커다란 배들의 접근에 깜짝 놀라서 물로 뛰어들었다.
늦가을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나 별로 춥지는 않았다. 함대는 구불구불한 강을 거슬러 계속 올라갔다. 겨우 150km를 올라가는데 한나절을 다 잡아먹었다.
“끔찍하군. 강과 바다, 아니면 호수 사이에 운하를 파야겠소.”
건설장비 몇 가지가 갖춰진 이후 흙으로 이뤄진 평지 몇 km쯤 파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농경지를 개간할 때 수로를 판 경험도 풍부해서 평지 운하 정도는 금방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에 강력한 원주민 부족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시장 오응태는 도시 건설보다는 주변 지역 안정을 위한 군사작전에 골몰하고 있었다. 오응태가 지휘하는 여진족 기병들이 거의 매일 출동해야 했다.
새진주는 미시시피 강 하류에 세워져 있었다. 강의 북안에 강둑만 더 높이 쌓았을 뿐 큰 건물 수십 채가 서 있는 도시 주변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방어시설인 목책이나 망루마저도 없었다.
그러나 성벽이 없더라도 육군과 여진 기병 1천여 기를 유지하는 한 새진주를 지키는데 전혀 문제없었다. 이민호는 순양함에서 내린 다음 말을 타고 도시 중심인 병영으로 향했다.
“시장이 출전 중이라고?”
“예, 전하! 촉토 족 원주민들과 함께 문제를 일으킨 체로키 족을 위협하러 갔습니다.”
육군 병영과 주거지를 지키는 중위가 공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초록색 비옷을 입은 기병 장교의 얼굴에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는 자부심이 철철 넘쳐흘렀다.
문제는 도시라고 지정된 구역 내에서 누런 황톳물이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이었다. 여진족 거주구역은 약간 높은 곳에 지어서 여진족 기병 가족들이 지내는데 큰 불편은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위협만?”
“그렇습니다. 저희는 항상 선제공격을 자제하고 실체적인 위협에 대응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주민 희생자는 거의 없습니다.”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이민호가 턱을 살짝 치켜들자 중위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겨우 500여 명밖에 안 죽였습니다.”
“컥!”
체로키 부족이 멀리 도망가면서 다른 부족 영토를 침범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새동래가 공격받게 된 원인이 이렇게 밝혀졌다. 새동래에서는 원주민이 도발해도 꾹 참았으나, 새진주에서는 오히려 원주민들을 도발하고 다녔다.
싸움을 결코 사양하지 않을 오응태, 그리고 여진 기병이라는 최악의 조합을 뭉쳐 놓은 이민호가 잘못했다. 일본 혼슈를 공략할 때는 막강한 조합이었으나 가급적 원주민들을 끌어들여야 할 북미에서는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원주민들을 다 죽이거나 쫓아내버리면 어떡해!”
이민호가 오응태의 멱살을 쥐어흔들고 싶었으나 그는 멀리서 작전 중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이민호가 호위들과 함께 시청 관사로 쓰는 큰 건물에 들어갔다.
“무관은 역시 문제가 있나봐. 병조 참판은 원주민들이 아무리 찔러도 꾹꾹 참더니 오 대감은 반대로 그냥 다 죽여 버리네. 무인들은 적당한 선을 몰라.”
“오 대감께서 체로키를 공격한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요. 체로키 부족도 이로쿼이 어를 쓴다잖아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촉토 족을 노예 다루듯이 했어요. 원래 호전적인 부족인가 봐요.”
체로키 족은 오래 전에 오대호 인근에서 거주하다가 레나페 족과 이로쿼이 부족 연맹에 패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애팔래치아 산맥 남부를 중심으로 2만 2천여 명이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했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이 제 아무리 호전적이라도 여진 기병이나, 그 여진 기병을 상대로 싸워온 함경도 무관 오응태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전체 인구가 2만여 명에 불과하고 미시시피 동부 유역 거주민은 겨우 몇 천에 불과한 체로키 부족은 여진 기병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멀리 쫓겨난 것 같았다.
“맛있다! 이 음식 이름이 뭐야?”
“파쇼파라고 합니다, 전하.”
저녁으로 돼지고기에 흰 옥수수를 함께 찐 음식을 먹었다. 식탁 옆에 조선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원주민 남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원주민 요리사가 앞에 두른 것은 주방용 앞치마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앞치마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흔히 착용하는 수건이었다. 식당 한쪽에서는 여자 두 명이 절구를 찧는 모습이 조선이나 고산국과 똑같아서 신기했다.
식당 안에서 커다란 수탉이 꼬꼬댁거리며 중강아지를 쫓아다녔다. 강아지 때 당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개가 훨씬 큰데도 사나운 닭을 당하지 못했다. 이런 허름한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지만, 다른 곳은 더 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진주 개척단은 군인이나 농민이나 다들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돼지고기 아냐? 부족에서 돼지를 키우나?”
북미 대륙에 양과 염소, 소와 말은 데려왔지만 원주민들에게 전염병이 퍼질까봐 두려워 아직 돼지를 들여오지 않았다. 이민호는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이 돼지를 들여온 것으로 생각했다.
신대륙에서 이미 돼지를 사육한다면 안심하고 대량으로 키울 수 있겠다며 이민호가 몹시 기뻐했다. 새진주를 비롯해 미시시피 강 유역에는 비가 많이 내려서 습기를 좋아하는 돼지를 키우기에 제격이었다.
그러나 주방장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약 60년 전에 저희 조상들이 에스파냐 도적들의 침략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침략자들이 가져왔던 돼지가 풀려나 야생화됐습니다. 그 이후 사냥도 하고 잡아서 키우기도 해서 지금은 저희 부족의 중요한 가축이 됐습니다.”
“촉토 족이 에스파냐의 침략을 물리쳤다니, 보기와 다르군.”
촉토 족은 북미 원주민 부족들 중에서 농업기술이 가장 앞섰으나 주변 부족들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고산국의 보호 아래 들어온 약체 부족이었다. 인구가 2만여 명에 마을 60~70개를 보유하고 있다가 체로키와 치카소 등 다른 부족들의 압력에 의해 점점 밀려났다.
촉토 족은 지금은 미시시피 강 하구보다는 새진주 북동쪽 호수 건너편 진주 강 유역에 더 많이 거주했다. 원주민 말로 진주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산국의 새진주가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주방장의 표정이 모욕당하고도 억지로 꾹 참는 듯했다. 그러나 화난다고 원주민 방식대로 화를 풀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를 하층 노예 부족 촉토 족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강력하고 유서 깊은 치카소 족의 일원입니다.”
“아아! 그래. 미안해. 사과하지. 치카소 족이 최고야.”
이민호는 치카소 족이 이 근처에도 거주하는 줄 몰랐다. 새진주와 미시시피 강 하구 유역과 그 동쪽은 촉토 족과 체로키 족의 영역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함대에 비치된 지도에는 미시시피 강 하구에 칙토, 조금 위에 나체스, 그 상류에 치카소로 표시됐었다.
치카소 족은 촉토 족과 비슷한 혈통이었으나 생활방식은 전혀 달랐다. 반유목민, 정확히는 이동하면서 사냥도 하고 농사도 짓는 부족으로서, 이들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영역이 굉장히 넓었다. 영토에 대한 집착이 강해 주변 다른 부족을 공격해 노예로 삼기도 했다. 인구는 5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분쟁이 생기면 인구가 네 배나 많은 촉토 족이 항상 밀려났다.
치카소 족이 약 60년 전에 에스파냐를 물리쳤다면 1540년 에르난도 데 소토의 탐험대과 교전한 사건을 뜻하는 것 같았다. 에스파냐 탐험대는 원주민들과 교전 끝에 큰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
“전하. 미시시피 강 하류 유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 중에 마침 나체스 부족에서 온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전하께 알현을 청하며 회의소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풋!”
이민호가 입안에 든 것을 밑으로 쏟아냈다. 부족 이름이 참으로 훌륭한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민영이 탁자에 이마를 박고 큭큭거리고, 보고하러 온 병사도 실실 웃었다.
“이름 갖고 놀리면 안 되는데 말이야. 다들 벗고 왔나?”
“부족 이름과 달리 앞에 작은 수건 한 장을 아슬아슬하게 걸쳤습니다.”
미시시피 강 주변과 북미 남동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대체로 온몸에 문신을 하고 가느다란 허리띠에 수건을 매달아 중심 부위를 가리는 것이 표준적인 복장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복장으로 흔히 묘사되는 바로 그 패션은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나체스 족은 특히 노출이 심했다.
“그렇다면 거의 나체족이나 반나체 부족이라고 이름을 바꿔줘야겠군.”
“적당한 이름 같습니다. 나체스 부족 여자들은 상체를 드러내고 하체에는 치마만 걸칩니다.”
그 말을 듣고 이민호가 얼른 식사를 마치고 회의소로 달려갔다. 사절은 여섯 명이 왔는데, 듣던 대로 중요한 곳에 작은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나체스 족 여자는 없었다. 나체스 전사들은 다른 부족에 비해 작은 활을 사용했으며, 몸에 옷을 걸치거나 다른 장식이 없는 대신 머리 모양을 다듬는데 공을 들였다.
치카소 부족 원주민이 통역을 도와줬다. 나체스 부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알곤킨 어에 가까웠으나 이민호는 하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원래 오응태를 만나러 왔던 나체스 부족 사절단은 이민호가 오응태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잘 믿지 않았으나 계속 대화를 진행했다.
“저는 나체스 부족의 지도자인 ‘위대한 태양’의 명을 받아 협상을 하러 온 태양족입니다.”
“큭! 아냐. 계속해.”
나체스라는 부족 이름에 이어 이번에는 어느 독재자의 칭호를 듣게 된 이민호가 속으로 배꼽을 잡았다. 위대한 태양은 태양을 숭배하는 나체스 족 정치체계에서 중남미 제국의 황제처럼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추장이었다.
나체스 부족은 태양족, 귀족, 특권시민, 평민으로 신분이 세세히 나뉘었다. 신분이 여럿으로 세분된 원주민 부족은 북미에서 처음 만났다.
위대한 태양과 그의 어머니로서 조언자 역할을 하는 하얀 여자, 위대한 태양의 형제자매들이 태양족이었다. 맨 밑바닥 계층은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라 칭했다. 그러나 태양족이 다른 낮은 신분과 결혼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고 자식들의 신분은 모계 혈통을 따르는 탓에 신분 차별로 인한 모순과 갈등은 적은 편이었다.
“미시시피 양안 여러 지역에 도시를 두고 있는 저희 부족에 비하면 야만적인 치카소, 촉토, 체로키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나체스 부족은 이 지역 전체를 주도하는 부족이었습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훌륭하다고. 미안. 계속해.”
“고산국 군대가 미시시피 강 하구에 자리 잡은 이래 촉토 족이 고산국에 보호를 요청하고 치카소는 교역을 하며 갖은 아양을 떨고 있습니다. 능력에 비해 잘난 척하기 좋아하던 체로키 족은 드디어 멀리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자들이 체로키 부족들의 최고 전투 추장이나 최고 평화 추장에게 일러바치려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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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