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16화 (465/1,000)

00516  53. 북미 순행  =========================================================================

“북미에는 광활한 대지가 있소. 꾸준히 경작지를 확대하시오. 밀은 내게 넘기고, 쌀이 남으면 술이라도 담그시오.”

조만간 다가올 소빙기에 대비해 식량생산 능력을 최대한 갖추는 것이 북미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전 세계에서 기근이 일상화되면 식량을 가진 국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소빙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지역은 주로 온대 지방,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조선과 일본, 아일랜드와 영국, 프랑스, 북유럽 전체 등 웬만한 나라가 모두 포함됐다.

유럽 국가들이 식량 부족 사태에 처할 경우 인도주의의 가면을 쓰고 지원해준다는 명목으로 곡물을 대량 수출할 계획이었다. 조금 냉혹하지만, 수확량 감소와 곡물가격 하락의 이중고를 견디다 못한 유럽 농민들이 북미로 대거 이민 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전하께서는 고산국 본토에서 주로 공업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긴 땅이 좁으니까 물건이라도 만들어 팔아야 먹고 살 수 있지요. 조선에서는 걸핏하면 흉년이 들어 농민이 굶주렸소.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한 백성이 굶는 꼴을 보지 않겠소.”

“요 임금의 고사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시대가 이 나라에 재현되는 것 같아 소신은 몹시 기쁩니다.”

유학자 출신인 이조 참판은 이민호가 본토와 달리 북미에서 농업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참판은 이민호가 전통 농업사회의 자급자족 농업이 아닌 식량 수출을 위한 대규모 기업농을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냥이나 옥수수 농사 위주였던 북미 원주민들에게도 쌀농사나 밀농사를 짓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농업기술이 늘면 농지도 점점 확대해줄 계획이었다.

고산국 농민들이 경운차가 아닌 작은 경운기를 주요 농기계로 사용하는데 반해 북미에서는 농지가 워낙 넓어서 농가마다 커다란 경운차가 필요했다. 북미와 호주의 농민들이 경운차를 대량으로 사면서 고산국 본국에서는 기계공업이 급격히 발달할 수 있었다. 이민호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지금 단계에서 북미는 자원과 식량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식민지 경제와 흡사했다.

“배만 부르면 되겠소? 물건도 사야 하니 유럽에 판매할 담배도 적당히 재배하시오.”

“예, 전하. 유럽인들이 담배를 많이 구입하고 있습니다. 하온데 담배공장 말고는 공장이 적어서 농업 외에는 일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본토에서 가져올 수 있으니 공장은 천천히 지어도 괜찮소. 1차 철도공사가 끝나고 제철소를 가동한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장을 세울 것이오. 지금은 농업이 우선이오.”

사실 노동력이 부족해서 북미에 공업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값싼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 곡물 가격을 의도적으로 낮춤으로써 농촌사회에서 발생한 잉여 노동력을 공장의 저임금 노동에 투입해 산업을 부흥시켰다.

그러나 현재 고산국 북미에서는 이와 반대로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농업에 투입시켜야 할 지경이었다. 조만간 새원산에 도착할 에스파냐의 모리스코들도 일부 기술자들과 건설인력을 제외하고 웬만하면 농업에 종사시킬 계획이었다.

“농민의 수입에 비해 임금이 훨씬 낮은데도 젊은이들이 직공이나 교사 같은 직업을 택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퇴근 후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소? 젊은이들은 노는 시간과 연애할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오.”

농민이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노동을 하는 반면 다른 직종은 퇴근시간 이후에 놀 수 있고 휴일에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청년들이 도시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전하께서 멕시코 국경 쪽을 먼저 개발하실 줄 알았습니다. 강대국이라는 에스파냐보다 유럽 다른 나라에 더 신경을 쓰시는군요.”

“설마 영토를 판 나라가 침공하겠소?”

“그렇긴 합니다.”

물론 꾸준히 멕시코 국경을 살피고 있었다. 새순천에서 리오그란데 강 인근에 탐사대를 파견해 지형 파악을 마치고, 국경인 강을 오가면서 생활하는 원주민 부족들과 접촉하는 중이었다.

원주민들은 주는 것 없이 세금으로 빼앗아가기만 하는 에스파냐보다는 농기구나 생활용품을 좋은 조건으로 교역하는 고산국을 훨씬 좋아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을 다만 몇 개라도 공짜로 나눠주는 고산국 사람들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텍사스와 중미 원주민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고산국이 ‘호구력’을 강화한 효과가 슬슬 나타나는 중이었다.

“이틀 동안 읽어봤는데 아주 좋았소.”

이조 참판이 제출한 새원산의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이민호가 검토한 다음 승인했다. 개척 초기 단계인 현재는 맨해튼 섬에 상업지구와 주택지구가 뒤섞여 있었으나 도시가 계속 발전할 것을 감안해 맨해튼 섬과 주변 땅에 계획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그래서 맨해튼 섬은 국제무역항과 상업지구, 다리가 건설된 다음 동쪽 긴 섬의 남서쪽 일대는 주택 지구, 나머지 동쪽으로는 농업지구, 맨해튼 섬 서쪽은 공업 지구로 선정했다. 맨해튼 남서쪽 큰 섬, 그러니까 서강 입구의 서쪽 섬은 교육지구로 정하고 대학교 몇 개를 세우기 전에 일단 빈 땅을 이용해 목축에 주력하기로 했다.

“바닷가에 있으면서도 바람이 세게 불지 않는 곳이 여기요?”

“예, 전하. 만 안쪽에 위치해서 해풍이 불지 않는 곳입니다.”

지도를 살핀 이민호는 혹시 현대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호는 이조 참판에게 근처 늪지를 메워 밭으로 간척하라고 지시한 다음, 특별히 이 일대를 국영지로 지정했다. 이조 참판은 이민호가 이곳을 나중에 군사지역으로 쓰는 줄로 알았고, 예상과 조금 달랐지만 사실로 드러났다.

“맨해튼 섬에 레나페 족은 얼마나 살고 있소?”

“현재 인구가 조금 늘어 6천여 명입니다. 밀농사를 시작해서 농업 생산성은 좋아졌으나 거주 인구가 대폭 늘면서 사냥하기 어려워졌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맨해튼 섬 북쪽으로 이주시킬 협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쫓아내는 것 같아 미안하구려. 특별히 보상을 잘해주시오.”

“예. 농지 개간은 이미 끝났고 조만간 건물 신축이 완료되면 이주시킬 예정입니다. 이들만 특별히 고산국 농민에 준해서 장기적으로 농지를 늘려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지역에는 원주민 절반, 유럽 이주민 절반 정도를 거주시키겠습니다.”

현대 지명으로 브롱스는 농업지구로 선정됐다. 20세기에 뉴욕 시민 160만이 거주할 지역인데 앞으로 최소 백 년 동안 일만 명도 못 채울 것 같았다. 원주민들은 곡식을, 유럽 이주민들은 도시민이 소비할 채소를 재배하기로 했다.

지하 창고 시설과 넓은 마당, 큰 외양간을 갖춘 2층 농가 주택에 입주할 레나페 원주민들의 기대감이 높았다. 적이 쳐들어올 경우 문을 걸어 잠그고 높은 옥상에서 활을 쏠 수 있다는 점을 좋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협인 이로쿼이 연맹이 힘을 잃었지만 위험한 적은 이로쿼이뿐만이 아니었다.

“새원산은 고산국의 수도가 되지는 않더라도 북미의 경제 수도가 될 것이오. 어쩌면 세계의 수도가 될 수도 있소.”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미욱한 신하가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맨해튼 섬 한가운데는 거대한 공원이 자리를 차지했다.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숲을 중심으로 호수와 연못, 여러 가지 체육시설을 갖췄다. 공원 북쪽과 남쪽에 있는 넓은 수영장은 여름에 인기를 끌 것 같았다. 박물관과 미술관 건물도 세울 예정이었다.

다음 날 함대는 아침 유럽 이주민과 북미 원주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송을 받으며 새원산을 떠났다. 함대는 남쪽으로 직행해 오후에 새강릉에 도착했다.

항구에 접한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시장에는 복장이나 장식으로 봐서 포우하탄 연맹 소속이 아닌 부족 원주민들이 꽤 많이 돌아다녔다.

새강릉 별궁의 알현실에 손님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다기에 가봤다. 처음 보는 원주민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애들은 누구야?”

“투스카로라 부족의 추장 일행입니다.”

이로쿼이 연맹 소속은 아니지만 이로쿼이 어를 사용하며 새강릉 남쪽에 거주하는 부족이 투스카로라였다. 전투가 어제 있었는데 벌써 찾아온 것이 이상해서 이민호가 물었다. 관리가 피식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어제 낮에 전하께서 새원산으로 떠나신 직후 도착했을 때는 마치 점령군처럼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대첩을 거두신 소식이 어젯밤 늦게 전해진 다음부터는 땅바닥에 벅벅 기고 있습니다.”

“설마 우리가 질 줄 안 거야? 어이가 없군.”

원래 투스카로라 부족은 이로쿼이 연맹이 새원산을 공격하는 날에 맞춰 새강릉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공격날짜가 다가오면서, 새강릉에서 새로 개간한 넓은 밭을 보고 생각이 바뀐 부족민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다시 부족민 전체가 모여 며칠간에 걸친 회의가 진행되고, 결국 부족민 다수가 고산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점을 쳐본 부족 주술사도 반대해서 공격 계획은 취소됐다. 그리고 추장 일행이 새강릉을 방문해서 고산국 농경지를 더 이상 남쪽으로 확대하지 말라고 경고만 하기로 결정했다. 새강릉에 왔다가 뜻밖에 이로쿼이 동맹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추장 일행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제가 이놈들의 말을 할 줄 압니다, 전하.”

“그럼 통역을 부탁하네.”

이로쿼이 어를 아는 오페찬카나우, 옵차나카나우라고도 불리는 와훈수나콕 대추장의 동생이 통역을 맡았다. 포우하탄 부족 연맹 대추장 와훈수나콕처럼 동생도 키가 엄청나게 커서, 이 시대 평균적인 유럽인들은 장식 달린 모자를 써야 그의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로 거인이었다.

오페찬카나우는 새원산 북쪽 파문키 강 유역 원주민들의 추장이었고, 처음에는 고산국과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대추장을 설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원산의 원주민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오페찬카나우는 이민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으며, 지금은 포우하탄 부족연맹의 기병대장을 맡고 있었다.

포우하탄 연맹 소속 넓은 땅 부족, 즉 키스키악 부족 출신으로서 1561년 에스파냐 탐험대를 따라 유럽에 10년 동안 유학을 갔다 돌아온 첫 번째 북미 원주민이 된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가 그의 사촌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오페찬카나우를 돈 루이스와 동일인, 또는 그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돈 루이스는 1561년에 17세였고, 오페찬카나우는 1554년생이라 나이가 맞지 않았다. 44살 나이인데 20대 후반에 가까운 동안을 자랑해서, 대추장 형제는 큰 키와 함께 인간종과 다른 거인족이 아닌지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들었겠지만 이로쿼이 연맹 전체 부족민들이 내 노예가 되기로 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전쟁이냐, 노예냐?”

비록 한나절에 불과했지만 새강릉에서 점령군 행세를 했다는 말을 듣고 얄미워서 이민호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왔다. 그러자 투스카로라 추장이 두 주먹을 쥐고 분연히 일어섰다. 호위 민영이 움찔할 정도로 추장은 박력이 넘쳤다.

“저는 자유민으로서 비굴하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평소에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페찬카나우가 공손하게 통역을 마친 다음 주먹을 쥐고 투스카로라 추장 일행을 노려봤다. 남쪽에서 온 추장이 슬슬 눈을 피했다.

원래 역사에서 투스카로라 부족은 유럽 이주민들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정착을 도와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밀려나게 됐다. 결국 1711년 남부 투스카로라 부족들이 전쟁을 벌여 백인 정착민들 수백 명을 죽였으나, 당시 부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고 백인에게 협조한 북부 투스카로라 부족으로 인해 패배했다. 남부 투스카로라 원주민들은 북쪽으로 이주해 이로쿼이 연맹에 가입했다.

“그럼 전쟁을 하겠다고? 마침 남쪽으로 농지를 넓혀야 할 시기였는데 잘 됐구나. 언제 전쟁을 시작할까?”

“아닙니다! 대왕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로쿼이 연맹과 같은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을 대왕님의 노예로 받아주십시오.”

고산국에는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없었고 위반하면 범죄였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 부족들 태반이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은 전쟁포로가 노예가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얼렁뚱땅 그 부족에 완전히 속하게 된다.

“그런 중요한 일을 추장이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나?”

“물론 부족민 전체를 모아 회의를 진행해야 합니다만, 그런 조건이라면 다들 받아들일 것입니다. 부족민들 다수가 전쟁을 반대한 이유가 기다란 물길을 밭 위에 세운 고산국의 놀라운 농법을 배우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싫은 사람들은 부족을 떠나면 됩니다.”

“이로쿼이 연맹의 영토를 절반 이하로 줄였는데 그래도 받아들일 거야?”

“고산국 이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넓은 농경지를 저희 마을 근처에 만들어주신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해주지. 이거 잘못하면 괜히 새원산에 전쟁을 건 다음 노예가 되겠다는 부족이 많아지겠군.”

이때 와훈수나콕 대추장이 헐레벌떡 알현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민호에게 급히 보고했다.

“쇼니 족이 전하께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어디에 사는 쇼니 족?”

쇼니 족은 캐나다부터 이곳 새강릉에서도 한참 남쪽까지 북미 동해안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 원주민 종족이었다. 원주민 부족들이 딱히 정해진 영토 경계선 없이 뒤섞여 사는 경우도 흔했다.

“서쪽 고원에 사는 쇼니 족입니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한 즉시 항복했습니다. 전하의 노예가 되길 청한답니다. 쳇! 좋다가 말았습니다.”

“누구 맘대로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노예가 된대? 서쪽 고원이라면 왕복하는데 며칠 걸릴 정도로 먼데 어떻게 알고?”

“이곳 시장에 와있던 쇼니 족들이 소문을 듣고 그렇게 결정했답니다.”

“젠장! 정식으로 부족회의나 하고 다시 오라고 해!”

============================ 작품 후기 ============================

일단 하나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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