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5 53. 북미 순행 =========================================================================
“대왕! 저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맞습니다. 더 이상 침략을 못하도록 씨를 말려야 합니다!”
평소에 얌전했던 레나페 족 전사들도 사람 살점과 머리털이 묻은 도끼를 움켜쥐면서 이로쿼이 포로들을 내달라고 이민호에게 간청했다. 알곤킨 계열 부족 전사들의 웅성거림이 커지자 운명을 직감한 이로쿼이 추장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로쿼이 포로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처분은 온타리오 호수 남쪽 본거지에 산재한 마을들을 하나씩 공격해 전사들을 죽이고 철저히 불태워 연맹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자와 아이들을 전쟁에 참가한 알곤킨 부족들에게 노예로 나눠주면 깔끔하게 끝난다.
그러나 거대한 부족 연맹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이민호 입장에서 몹시 아까웠다. 그리고 온타리오 호수까지 가서 이로쿼이 연맹 전사들과 싸우거나 추격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왕도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는데 언제까지나 여기에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추위에 익숙한 이로쿼이 전사들을 캐나다나 알래스카 개척에 동원하면 쓸모가 꽤 많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민호는 이들을 살리는 동시에 알곤킨 부족의 복수로부터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옛날에 고산국 건국 초기에 비슷한 결정을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모두 들어라! 이들은 내가 잡았다! 이로쿼이 부족 연맹 소속의 모든 부족원이 내 노예임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이로쿼이 노예들은 내 재산이니까 함부로 건들지 말도록!”
“대왕! 저 검은 악령의 자식들을 살려주겠다는 뜻입니까? 안 됩니다!”
알곤킨 전사들이 이민호에게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나 포로는 전쟁에서 잡은 자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원칙이기에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포우하탄 전사들이 이민호를 둘러싸고 다른 부족 전사들에게 눈을 부라린 것도 효과가 있었다.
알곤킨 부족들은 이민호를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정한 지 오래됐고 오늘 함대의 무지막지한 공격력까지 확인했다. 게다가 전사들 전원이 철제 무기를 갖추고 기병이 500명이나 되는 포우하탄 부족이 이민호의 말에 죽는 시늉까지 하는 마당이었다. 나머지 알곤킨 부족들은 앞으로 고산국이나 이민호에게 자그마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어려워졌다.
“마사워멕 도적놈들이 대왕의 노예가 됐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다시는 저들을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모호크 놈들은 정말 악독한 놈들입니다. 오죽하면 이름이 식인종 모호크이겠습니까?”
“모호크 전사들은 너희가 다 죽이지 않았느냐? 여자와 아이들만 남았더라도 모호크 부족을 해체하지 않겠다. 다만 모피 교역을 할 때 다른 부족을 통하게 하고 새원산에는 모호크 족이 직접 오지 못하게 하겠다.”
“그 정도라면 좋습니다.”
이민호는 이로쿼이 부족 연맹의 거주지와 사냥터를 마히칸 족 거주지 북쪽으로 제한시켰다. 이로써 온타리오 호수 남쪽 이로쿼이 연맹 본거지 영토의 축소가 불가피했다.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을 무인지대로 만들면서 최근에 얻은 사냥터도 서쪽으로 대폭 후퇴시켰다. 그 대신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줄 농경지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어? 저희들을 다 풀어주시겠다고요? 밭도 만들어주고요?”
“앞으로 너희들이 하는 짓을 봐서 노예에서 풀어주마. 다른 부족과 절대 싸우지 말라.”
“이제는 다른 부족과 싸울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님께 공납을 어떻게 바쳐야 합니까?”
“남자 새끼가 주인님 소리 하지 마! 옥수수와 콩, 호박 농사는 짓던 대로 계속 지어라. 조만간 새원산에서 사람들이 밭을 만들어주러 갈 거야. 그들이 새로 개간한 밭에서 밀농사를 짓는 것이 너희들이 노예로서 해야 할 노역이다. 수확량의 절반을 공납으로 받겠다. 질문 없으면 당장 꺼져!”
수확량의 절반을 바친다면 사실상 고산국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우였다. 그러나 성인 남자들 다수가 죽었기에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이로쿼이 부족 연맹은 생존하기에 급급할 것으로 예상됐다. 살아남은 자들이 엄청나게 고생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로쿼이 추장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서자 이민호가 추장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잔뜩 위축된 이로쿼이 전사들이 비교적 멀쩡한 카누를 골라 서너 명씩 타고 노를 저었다.
한참 상류로 노를 저어가던 카누들이 멈추고, 이로쿼이 추장들이 다시 이민호에게 찾아왔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는 것 같아 이민호가 얼른 말하라고 채근했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혹시 전사들의 시체를 가져가면 안 되겠습니까?”
“왜? 먹게?”
“아닙니다! 그건 모호크 족이 아주 예전 수백 년 전에, 연맹 창설 이전에 의식의 하나로 이뤄진 야만적인 행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놈이 아직 있다면 모호크 족 내부에서도 미친놈 취급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처형을 시킬 겁니다.”
“안됐지만 시신들이 모욕을 심하게 당한 것 같다. 데려가서 후하게 장례를 치러줘라.”
“감사합니다, 대왕님!”
이로쿼이 전사들이 알곤킨 전사들에 의해 거의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을 옮겼다. 너덜너덜한 동료들의 시신을 카누에 싣는 이로쿼이 전사들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장례풍습은 풍장이라서 시신을 어느 정도 훼손해야 하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
“와아! 대왕님 만세!”
이로쿼이 전사들이 아직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알곤킨 전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이로쿼이 연맹의 대군을 거의 몰살시키고 특히 악독한 모호크 족 전사들은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것이 모두 이민호와 고산국 덕택임을 알곤킨 전사들이 인정하고 앞으로 더욱 충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주 잘 싸워줬다. 맨해튼 섬에 사는 전사들, 그리고 급히 달려와서 구해준 레나페와 내러갠셋, 그리고 호우하탄 전사들도 잘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해서 다들 아주 좋아했지만 다만 전리품이 적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북미 원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은 적의 무기였지만 아직 석기에 머무른 이로쿼이 연맹의 무기는 전리품으로서 가치가 별로 없었다. 다만 독수리 깃털이나 곰이나 늑대 이빨 목걸이 같은 장식품만 남았을 뿐이었다.
“레나페와 내러갠셋은 나의 훌륭한 동맹 부족들인데 아직 철제 무기가 적은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늘 전쟁에 참가한 두 부족 전사들에게 철제 창날과 화살촉, 칼을 상으로 나눠주겠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왕님 만세!”
두 부족은 새원산에서 모피 교역을 하면서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차근차근 갖춰나가는 중이었다. 좀 더 빨리 철제 무기를 갖게 해준다고 큰 차이는 없었다. 포우하탄 전사들은 전원 철제 무기를 갖췄기에 상으로 은 두 냥씩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포우하탄 대추장이 새강릉 남쪽에 사는 투스카로라 부족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같은 이로쿼이 어족일 뿐 이로쿼이 연맹과 관계가 없었다. 원래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부족끼리도 흔히 싸웠고, 친척 부족으로서 복수를 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 이들과 천천히 교섭하기로 했다.
여진 기병 지휘관이 강을 건너 이민호를 만나러 왔다. 기병 2천기 중에서 절반만 왔으니 도로공사에 투입된 노무자들을 지켜줄 병력은 충분히 남겨두고 온 셈이었다.
“별 일 없었어?”
“예! 전하. 술 주러, 앗! 반찬을 주러 올 마차가 안 오기에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하고 병력을 이끌고 왔습니다.”
“너희들 아주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헤헤! 적당히 마시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전하. 훈련도 일정에 맞춰 빠짐없이 하고 있습니다.”
도로를 달려올 때 기마 자세나 제방에서 총을 쏠 때 명중률 등 딱히 트집을 잡을 것이 없어서 술 마신 것은 봐주기로 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여진 기병에게 술은 필수품이라고 봐도 됐다.
여진 기병의 최대 장점이 이번 도로 공사에서 잘 드러났다. 여진족은 전쟁도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여진 기병들은 공사 현장을 따라다니는 가족들과 같은 천막이나 연립주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누라 보고 싶다며 휴가 달라고 찡찡대는 조선 출신 고산국 기병과 전혀 달랐다.
밤이 되어 국왕좌승함으로 돌아간 이민호는 이조 참판을 만나 이로쿼이 연맹 소속 부족과 마을을 찾아다니며 밭을 개간해주라고 지시했다. 개간하는 동안 호위는 이 지역에서 악명 높은 여진 기병을 데려가기로 했다. 모호크 족이 몇 번 여진 기병을 기습하려다가 거꾸로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호수 인근이라 겨울에는 몹시 춥지만 꽤 기름진 토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고 합니다. 폭이 2km에 길이가 50km가 넘는 기다란 호수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서 농업용수 공급도 용이한 편입니다.”
“빙하호인 것 같소.”
이민호는 거대한 빙하가 흘러 땅을 긁으면서 지나간 자리에 물이 채워진 빙하호를 떠올렸다. 온타리오 호 남쪽에는 그런 거대한 빙하호가 수십 개였고 작은 호수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온타리오 호 남쪽부터 미시간 호 서쪽까지 폭이 천 km가 넘는 호반 지역을 가뭄 걱정이 전혀 없는 농지로 개발할 수 있었다. 물론 미시시피 유역이나 대평원 같은 곡창지대에 속하지 않는 자투리 지역이 이렇게 넓었다.
“밭을 얼마나 개간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세금 5할을 내고도 부족민들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여력이 생기는 대로 농경지를 계속 넓혀주시오.”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편하게 먹고 사는 꼴을 못 보시는군요.”
“누구든 일을 많이 하면 그만큼 확실히 보상을 받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관리들만 예외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조 참판이 먼 산을 바라봤다. 이민호가 평소 관리들에게 일을 심하게 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고산국 본토에서도 농민이나 다른 직종에 비해 관리들 봉급이 적다고 불만이 심했는데, 북미에 와서는 그 차이가 몇 배나 벌어져서 관둘까 고민하는 자들이 늘어났다고 들었다.
“농민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말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이오. 그리고 농민은 자기 자본을 투자하고 수확량에 따라 손해와 이익을 온전히 책임을 지는 개인 사업자란 말이오. 관리들은 가족까지 북미로 이주했으니 출장비를 더 줄 수도 없지 않소?”
“농민 수입의 절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4분의 1은 되어야 관리를 하겠다는 젊은이가 조금이나마 생길 것 같습니다.”
고산국에서는 교육비가 무료라 관리들이 농민에 비해 몇 년 더 교육을 받는 동안 비용을 투자했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관리를 임용할 때 반드시 대학을 나오거나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직무를 수행할 때 교육 과정이 따로 있었다.
“쳇! 하는 수 없지. 개척도시나 오지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에게 수당을 지급하시오.”
“황공하여이다, 전하!”
“갑자기 충신이 됐구려.”
“원래부터 충신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직종별로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같은 직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소득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이제부터 신경 써야 했다.
“아직 유럽에서 온 무역선은 없소?”
“프랑스 상선이 정기적으로 들러서 주로 모피를 구입하고, 잉글랜드와 북유럽 어선들이 교역에 조금씩 참가하고 있습니다. 진주나 보석 같은 밀수용 사치품도 사지만 곡식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북미 북동부 지역은 16세기 전반에 프랑스가 먼저 탐사를 했지만 국내에서 위그노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동안 다른 나라들에게 권리를 빼앗긴 셈이 되었다. 만약 에스파냐가 북미 동부를 자국 영토로 계속 영유했다면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가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이민을 보내 식민지를 개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로부터 북미 대륙을 매입한 국가가 하필 고산국이었고, 그것으로 국제적 분쟁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고산국의 해군력을 확인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은 감히 북미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핼리팩스나 뉴펀들랜드 주변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등 유럽 여러 나라 어선이 와서 조업을 한 것도 영토 주장의 근거로 삼을 수 없게 됐다. 이민호가 수십 년 동안 고기잡이를 한 어선들에게 조업권을 허가하면서 여러 나라로부터 고산국의 영토 주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고산국이 자리 잡은 북미 영토를 얻기 위해 가능성 낮은 도박을 하기보다는 조업권이라는 현실적인 이익을 선택했다.
============================ 작품 후기 ============================
어제 못 올려서 오늘 간신히 3편 올렸습니다. 지금 자면 밤에 일찍 못 올릴테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앞편에서 리플을 참조해 내용에 반영했습니다. 리플에 답변 못 달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