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4 53. 북미 순행 =========================================================================
그 사이 서강에서의 수전도 계속 진행됐다. 강을 가득 메우며 몰려오던 카누들이 순양함들이 친 방어선 앞에 차곡차곡 쌓였고, 이내 전진이 막혔다. 총격을 받아 멀쩡한 카누는 거의 없고 대부분 구멍이 송송 뚫려 물이 새 들어왔지만, 가라앉지도 않았다.
살아남은 이로쿼이 전사들이 순양함을 공격하려면 물에 반쯤 잠긴 카누를 최소 열 척을 건너야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전사들이 돌도끼나 돌창을 들고 힘겹게 카누 위로 움직였다. 그 사이 해병들이 끊임없이 총을 발사해 이로쿼이 전사들을 계속해서 물에 빠뜨렸다.
“전하! 여진 기병이 도착했습니다.”
“전투를 했던 것 같지는 않군.”
함장이 보고하자 이민호가 얼른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서강 서쪽, 이미 완성된 도로를 따라 기병 천여 기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강에 빠졌다가 헤엄을 쳐서 간신히 서쪽 자연제방에 오른 이로쿼이 전사들이 허겁지겁 다시 강에 뛰어들었다. 여진 기병들은 이로쿼이 전사들보다 한두 단계 높은 악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나중에 들었다.
- 타타탕!
서강 서쪽 자연제방에 오른 여진 기병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더니 오리 사냥을 시작했다. 카누 위로 어기적거리면서 간신히 이동하던 이로쿼이 전사들이 총탄에 맞아 줄줄이 강에 빠졌다. 그러나 용맹한 원주민 전사들은 끊임없이 순양함으로 몰려왔다.
“처절하군. 원주민들이 이렇게 무모하게 용감했던가?”
“도망칠 길이 없어서 절망적으로 공격해오는 것 같습니다.”
“사격을 중지시키시오.”
이민호가 전단장에게 지시해 함대 전체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포성과 총성이 뚝 끊기자 불굴의 투지로 카누를 넘어오던 원주민 전사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몇몇 전사들이 피로 물든 카누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양함 갑판에서 해병들이, 자연제방에서 여진 기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이로쿼이 전사들끼리 큰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곧이어 무기를 내던진 전사들이 카누를 넘되, 방향을 바꿔 맨해튼 건너편 땅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전사들이 회의를 한답시고 부족별, 씨족별로 모여서 주저앉았다. 포로를 분류해서 잡기에 딱 좋았다.
모호크 부족을 뺀 나머지 이로쿼이 전사들은 함대에서 항복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항복했다. 카누를 타고 오던 5천여 명 중에서 겨우 2천여 명만 살아남았으니 이들도 싸울 만큼 싸운 셈이었다. 특히 물 위에서 싸운 탓에 부상은 곧 죽음으로 직결됐다.
그러나 지상 전투에 주로 참가한 모호크 족은 사정이 더 나빴다. 포우하탄 기병과 보병에 더해 급히 샛강을 건넌 다른 부족 전사들이 모호크 족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몰린 모호크 전사들에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가했다.
“자비를 전혀 베풀지 않는군.”
“모호크 족이 평소 주변 부족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전투를 중지시킬까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오.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내버려둡시다.”
처음부터 고산국과의 교역에 적극적이던 내러갠셋 부족은 물론 행동거지가 무거운 레나페 부족 전사들도 모호크 족을 상대로는 마치 악귀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고산국 사람들에게는 평소에 전혀 보여주지 않던 또 다른 단면이었다.
“저들도 역시 전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 같소. 레나페 부족이 순하다고 우습게 여기는 인간들에게 이 장면을 꼭 보여주고 싶소.”
“원주민 부족들과 사이가 나빠지든 말든 다른 인종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조 참판은 그런 인간들 때문에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들을 적으로 돌릴까봐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새원산 시청에 마부로 고용된 레나페 족에게 괜히 시비를 걸어 두들겨 팼다가 재판에서 태형을 언도받은 자가 있었다.
이조 참판이 그 죄수에 대한 태형 집행을 레나페 족에게 맡겨버렸다. 수천 명의 레나페 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맨해튼 시청 앞에서 태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됐다.
예선을 거쳐 엄선한 레나페 전사 50명이 돌아가면서 죄수에게 채찍을 있는 힘껏 휘둘렀고, 부상을 치료해가면서 장장 3일에 걸쳐 태형이 완전히 집행됐다. 덕택에 한때 레나페 족 마을들에 감돌았던 흉흉한 분위기가 단번에 해소됐다.
지상전에서 모호크 족 전사들을 끝까지 몰살시키는 사이 해병들이 카누를 타고 왔던 이로쿼이 전사들의 무장해제를 맡았다. 강력한 화력을 퍼붓는 순양함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하던 원주민 전사들이 일단 패배를 인정한 다음에는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순양함마다 카누 수십 척을 노획했다. 카누를 주렁주렁 매단 순양함들이 강변에 바짝 접근해 수병들이 카누를 지상에 올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내려 이로쿼이 포로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하! 추장들을 잡아왔습니다.”
해병 장교가 화려한 깃털을 온몸에 장식한 원주민 전사들을 인솔해왔다. 그러나 장식만 화려하면 다 추장으로 간주한 것 같았다. 마치 임진왜란 때 검은 삿갓을 쓴 자는 왜병, 풍뎅이 투구를 쓴 자는 왜장이라고 일괄적으로 구분한 것처럼 편견에 기반을 둔 잘못된 분류였다. 화려한 장식을 했으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전사들을 제자리에 돌려보내고, 추장들 자리에 스스로 온 자들에게 자리를 허용했다.
“맨해튼을 공격한 이유가 도대체 뭐야?”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포우하탄 전사들 중에 이로쿼이 어를 구사하는 전사가 통역을 도와주려고 나섰다. 이민호는 통역하는 전사에게 먼저 물었다.
“저들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봐.”
“스스로 호더노쇼니, 긴 집을 짓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마사워멕 부족 연맹은 150년 전에 시작됐습니다. 온타리오 호수 북쪽에 거주하던 5개 부족이 서로에 대한 싸움을 멈추기 위해 연맹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평화와 힘의 연맹이라고 합니다만, 사실은 침략자 연합입니다.”
이로쿼이 부족의 전설을 기반으로 1142년 9월 31일에 일어난 일식을 계기로 연맹을 맺게 됐다는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든 정치적 목적으로 과거를 미화하고 과장하는 경우가 흔했다.
“개인적인 평가 빼고 계속 말해봐.”
“예. 모호크와 오나이다 등 5개 부족 밑에 각각 늑대, 곰, 거북이 같은 씨족들이 있습니다. 50개 모계 가문에서 세습하는 추장들이 연맹에서 정치적 중심이며 전투 추장이나 주술사는 그들 중에서 선출합니다. 세월이 흘러 온타리오 호수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이동하면서 포우하탄과 비슷한 말을 쓰는 우리 친척 부족들의 영토를 잠식해왔습니다.”
“저들이 왜 남의 부족을 공격하는 거지?”
“자비로운 레나페 부족에서 저들에게 세 자매, 그러니까 옥수수, 강낭콩, 호박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그 이후 마사워멕 연맹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른 부족을 공격해 다 죽이거나 쫓아내고 새 점령지를 사냥터로 삼았습니다.”
“알았다. 추장들에게 이번에 공격한 이유를 물어봐라.”
이로쿼이 추장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 이유가 많았다. 첫 번째로 이로쿼이 연맹 추장들은 위대한 영으로부터 이 세상 모든 땅을 소유할 권리를 부여받았기에 그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고 주장했다. 이민호가 한숨을 팍 내쉬는 동안 추장들이 계속 자기들의 권리를 늘어놓았다. 내러갠셋과 레나페 부족들이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였다.
추장들의 비난은 고산국에도 이어졌다. 숲을 파괴해 도로를 닦은 것은 인간의 친구인 숲을 죽이는 짓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사냥터가 줄어든다는 이유도 댔다. 도로를 닦는 지역이 이로쿼이 연맹의 영토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모든 토지가 이로쿼이의 영토이기 때문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네 것은 내 것, 내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군.”
“새원산 시청에서 내러갠셋과 레나페 부족에게 넓은 농경지를 일궈서 선물로 바치고, 자기들에게는 바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얼씨구?”
우호적인 부족들에게서 넓은 토지를 양도받는 대신 몇몇 원주민 마을 근처에 밭을 개간해준 일이 있었다. 넓은 농지를 개간하고 관개시설까지 갖춰줘서 여러 부족의 식량 부족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줬다. 다른 부족들과의 모피 교역으로 얻는 이익 말고도 새원산 시청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호 부족들을 도와줬기에 오늘처럼 군사적 협조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쿼이 추장들은 지금까지 고산국에 협조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렇게 보상만 요구했다. 아무 관계없는 원주민 부족을 위해 새원산에서 농지를 개간해주는 일이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니 참으로 밉상이었다.
“너희들은 전쟁에서 패했다. 너희들의 주장대로라면 너희가 싸움에서 졌으니 처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긴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있으니 처형시켜달라고 합니다. 사실 그냥 해보는 소리고 백이면 백, 노예가 되길 택할 것입니다, 전하.”
이로쿼이 부족 연맹 소속 5개 부족은 온타리오 호수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도로와 철도 예정지에서 거리가 꽤 있었다. 그러나 철도를 공격할 만한 가까운 곳이라서 이민호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보다시피 모호크 족 전사들은 다 죽었다. 대대로 원수 사이인 마히칸 전사들이 모호크 족 마을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여자와 아이들이 다른 부족의 노예로 잡혀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5개 부족이 맹약을 맺었으므로 마을에 남아있는 전사들이 동쪽의 문지기 모호크 족을 지켜줄 것이다.”
이번 전쟁에 동원된 전사는 모호크 족이 2천 5백, 나머지 네 부족이 천에서 2천 사이라고 했다. 공격하러 온 전사 총 8천 명 중에서 겨우 2천 남았다. 통틀어 일만 명 살짝 넘는 이로쿼이 전사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전사한 셈이었다.
“여기 모인 알곤킨 전사들이 3개 부족 5천 5백 명이다. 너희들에게 이를 갈고 있는 마히칸 부족에서 전사 2천 명을 더 동원할 수 있다. 포우하탄 전사들은 전원 철제 무기로 무장했고 말 탄 전사도 5백 명이나 된다. 너희들이 마을에 남긴 늙은 전사들로는 절대 여자와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알고 있다. 하지만 늙은 전사들도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 후에 여자와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이민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로쿼이 전사들은 뼛속까지 전사들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역을 맡은 포우하탄 전사가 이들을 노예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다시 보고했다. 그래서 다시 설득해보기로 했다. 그 전에 이민호가 몇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 강을 타고 내려왔지. 강 중류는 마히칸 족의 영역인데 혹시 그들을 전멸시켰나?”
“우리가 마히칸 족의 영역을 지나갈 동안 그들은 마을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머리모양을 모호크 족을 따라할 정도로 천박하고 줏대가 없는 놈들이라 신경 쓸 필요 없다.”
맨해튼 섬에서 200여 km 상류 서강 유역에 마히칸 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마히칸 족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줄 알았는데 전투 자체가 없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을 감상했던 이민호는 모히칸 족이 인디언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전사라는 인상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로쿼이 연맹 전사들이 보기에는 그저 따라쟁이에 겁쟁이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북미 개척 초기에 얻은 지도에는 마히칸 주거지 근처 섬에 프랑스인들이 1540년에 세운 요새가 있다고 표시돼 있었다. 현대 지명으로 올버니(Albany) 남쪽 비콘 섬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육지로 변했다. 이 시대에 올버니는 ‘마히칸 족의 화톳불자리’라는 지명으로 기록됐다.
“혹시 강 중간 큰 섬에 프랑스 모피 무역업자들이 세운 성이 있나?”
“아주 오래 전에 프랑스인들이 섬에 요새를 지었으나 홍수에 무너졌다. 지금도 잔해가 남아있다, 라고 오나이다 부족의 전투 추장이 말합니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듣기로도 옛날에 머리카락 색이 다양한 못 생긴 자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간 섬에 집을 짓고 여러 부족에게서 모피를 샀다고 합니다, 전하.”
이민호가 한참 여러 가지를 묻는 사이 지상전이 완전히 끝나고, 고산국에 우호적인 부족의 전사들이 몰려왔다. 원주민 전사들의 얼굴과 온몸에 붉은 피가 묻어있어 전투 전에 새긴 문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전사들이 쥔 도끼와 칼, 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이로쿼이 포로들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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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면 늘어나기도 합니다. ㅡ.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