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8 52. 북유럽 =========================================================================
대서양은 하루 이틀에 건너갈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바다라서 밤에도 항해는 계속됐다. 높은 파도 너머로 항해등이 보이지 않으면 전단 참모들이 바짝 긴장해서 함선들을 차례로 호출했다.
“항해용 레이더가 있어야 하는데.”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후 이민호가 함교에 들렀다가 중얼거렸다. 야간 항해는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나마 무선통신이 가능해져서 야간 항해가 훨씬 수월해졌다.
“폐하! 시간이 나시면 초상화를 그릴까요?”
“오! 화가 선생들이 벌써 모였나? 코트를 걸치고 가겠네.”
기골이 장대한 네덜란드 여류 화가가 이민호에게 시간을 알렸다. 이민호와 비올레타는 근세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자부할 만한 국왕 부부 복장을 차려입고 집무실로 향했다. 화가 여러 사람 앞에서 모델 노릇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전에 화가들과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시간 낭비 같았다. 모델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라지만 이민호 입장에서는 화가들이 그저 이국의 왕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 같다는 인상만 받았다.
“전하. 대화를 나누는 것은 화가들이 그림 작업을 하는데 정말로 꼭 필요한 시간이에요.”
“알겠소, 비올레타. 내 얼굴에 표가 났소?”
“풋! 전하는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요.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 편하겠어요.”
“상인으로서는 감점 요소인데 말이오.”
화가들은 이민호가 함대를 이끌고 멀리 항해하다가 처음 발견한 섬에서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호주 새섬에서 마오리족과 접촉한 이야기를 들은 화가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었다. 오늘은 특별히 임진왜란 때 동래에서 기마병을 몰고 왜군을 추격하면서 몰살시킨 이야기를 해주었다.
걸핏하면 10만씩 동원하는 동양과 달리 유럽에서는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힘들어서 그런지, 이민호가 병력을 과장하는 것으로 화가들이 알아들었다. 또한 기병들이 말을 달리면서 총을 쏜다는 자체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화가들은 보병과 기병을 모루와 망치로 쓰는 전술이나 중앙돌파와 측면 포위 같은 전술은 잘 알아들었다. 생각해보면 이 시대 유럽 화가들은 다양한 공부를 해서 군인이나 외교관, 법관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민호와 대화를 하는 화가들 중에 나중에 그런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다.
“동양에서는 그렇게 전쟁을 하는군요.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폐하. 이제 두 분께서 포즈를 잡아주십시오.”
이민호가 일어나자 화가들이 일제히 대형 캔버스에 달라붙었다. 밑그림은 이미 끝났고, 이민호와 비올레타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10분 정도 서서 화가들이 두 사람의 분위기를 그리게 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호위와 베네치아 시녀에게 모델 역할을 떠넘겼다.
화가들이 이민호와 비올레타의 얼굴은 이미 대충 그렸으나 복잡하고 화려한 복장과 장신구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공작부인께서 쓰신 왕관에 단 루비가 너무 커서 과장되게 그린 것으로 사람들이 알까봐 두렵습니다.”
“그림을 잘못 그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유럽 여러 왕궁의 무도회에 나갈까?”
“그러시면 더욱 좋습니다, 폐하. 어쨌든 저희들은 기품 넘치는 두 분을 그리게 돼서 몹시 기쁩니다. 화려한 복장과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그리는 것도 즐겁습니다.”
화가들이 작업하는 것을 잠시 옆에서 지켜봤는데, 다른 빈 캔버스에는 이민호가 유럽에서 활동한 여러 장면들이 밑그림만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국왕좌승함 아래 갑판에서 셰틀랜드 쉽 독들과 노는 장면까지 스케치로 남아있었다. 이 시대 화가들은 수행 기자단이나 다름없었다.
“전하. 민영님과도 함께 초상화를 그리세요.”
“그것도 좋겠소.”
비올레타가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훌륭했다. 민영은 유럽 여러 나라를 도는 동안 항상 이민호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 자리에서도 이민호와 약간 멀리 떨어져서 화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호위대장인 민영 입장에서는 화가들은 예비 암살자에 불과했다.
민영이 여기서는 호위대장 역할에 그쳤지만 북방에 가서 여진족과 몽골족 추장들을 만날 때는 고산국의 왕비 노릇을 해야 했다. 왕궁 밖에서는 거의 대부분 군복만 입는 민영이 화려한 왕비로 탈바꿈할 수도 있었다. 지역별로 여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고 이민호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가 북미 공작부인이라니, 너무 거창해요. 부담스러워요.”
“괜찮소. 비올레타는 그 정도 돼야 하오.”
칭호 덕택에 유럽 어느 나라에 가든 비올레타가 높은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화려한 옷에 주렁주렁 달린 보석 장신구를 보면 웬만한 제국의 황후 못지않았다. 물론 제작비가 비싸지도 않은 인조 보석이야 이민호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 시대 유럽에서는 인조 보석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혜영님 직함은 뭔가요?”
“그게, 에......”
“혜영님께 직접 여쭤볼 수도 있으니 여기서 그냥 말씀해주세요. 네? 공식적으로 왕비는 없죠?”
“왕비는 없소. 혜영의 공식 직함은 해중국 여왕이요.”
어릴 때 혜영에게 나라 하나를 떼어주겠다고 했는데,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여왕이라 해도 상속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풋! 그러려고 해중국을 유지시킨 건가요?”
“겸사겸사.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오.”
아직 결정한 것은 없었으나 고산국을 연방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럴 경우 해중국은 유일한 왕실 직할 영지로 남는다.
지금은 해중국이 최초 상륙지 겸 고산국의 건국지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럽 국왕들이 서너 나라의 국왕이나 황제 겸 공작, 백작 등 작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부러웠던 것도 해중국이 고산국의 속국으로서 아직 남아있는 이유였다.
해중국에는 약간의 농지 외에는 조선소와 양식장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양식장에서는 해삼과 전복을 키우고, 바로 옆에는 근해의 어족 자원 치어를 부화시키는 중요한 어업연구소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소에서는 만재배수량 8천 톤 급의 중형 철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왕도나 아리수 강 하구와 달리 비밀스런 일을 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 해중국이었다.
“자! 이것이 유럽 지도야.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의 영토 경계가 복잡하지만 대충 알겠지?”
이민호는 베네치아 시녀들에게 지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시녀들이 불어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알고, 국왕좌승함에는 통역관들이 줄줄이 타고 있었지만 오늘도 역시 비올레타가 통역을 맡았다. 이민호는 자기 여자로 확정된 다음부터는 바깥으로 내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녀들도 세계 지도를 몇 번 봤겠지만 이렇게 정확한 지도는 처음 봤는지 몹시 놀라워했다. 이민호는 베네치아가 유럽의 중심이라고 믿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녀들의 자부심을 깨부숴주려고 노력했다.
“역시 베네치아는 유럽의 중심에 있어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유럽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곳이니 고산국이 중시해야 해요.”
“뭐?”
이민호가 지도를 자세히 살펴봤다. 설마 남유럽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에 붙은 작은 도시가 유럽의 중심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러시아를 뺀 유럽 대륙의 딱 중심에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가 남쪽으로 길어서, 아니 아드리아 해가 유럽 중심을 향해 깊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끝부분에 위치한 베네치아가 정말로 유럽의 중심에 가까웠다. 베네치아에서는 지중해를 통해 배를 띄워 남유럽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할 수 있고 육로로 신성로마제국이나 폴란드와도 가까웠다.
이 시기에는 헝가리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과 육로로도 교역을 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는 이탈리아 북부 여러 도시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위치가 아주 좋구나. 하지만 다른 나라에 의해 동서 양쪽 해양 교역로가 차단되는 위치에 있어.”
“에스파냐의 지브롤터 해협과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해협이에요. 보다 많은 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베네치아가 반드시 통행로를 확보해야 하는 곳이에요.”
“응. 맞아.”
사실 이민호는 흑해로 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말고 수에즈 운하를 생각했다. 이민호가 베네치아 시녀들에게 지리를 가르쳐주려다가 지리상의 인식에 차이가 꽤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동지중해에 접한 레반트 지역과의 교역은 다시 가능할 것 같아?”
레반트는 원래 동부 지중해 연안 중에서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 교역을 시작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을 가리켰다. 나중에는 그리스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동지중해 연안 지역 전부를 가리키게 되었다.
레반트 무역은 베네치아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해준 무역이었다. 지나친 향신료 무역 독점으로 인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직접 동인도제도로 가게 만든 무역이기도 했다.
“전하께서 사라센 해적을 퇴치시켜 주신다면 오스만 제국 황실에 뇌물을 바치면서 가능할 거여요.”
“그건 내가 오스만 제국과 담판을 지어서 어떻게든 해적들이 무역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마.”
“헤~ 전하께서는 가능하실 거여요.”
베네치아 시녀들은 국왕좌승함에 동승한 이래 고산국 함대의 위력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사라센 해적과 프랑스 사략선 수십 척을 순식간에 격침시킨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잉글랜드 해군이 포츠머스로 슬슬 도망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했다.
“수에즈 운하를 통해 베네치아 상선이 직접 인도양과 아시아로 갈 생각은 없어?”
“아마도 눈치를 살피며 다른 상선들이 성공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조심스레 움직이겠죠. 옛날과 달리 요즘에는 배 한 척이라도 잃으면 수십 명이 파산해요. 그래서 겁을 많이 내요.”
이민호는 한국에서 고추 장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베니스의 상인>을 떠올렸다. 주인공 안토니오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살 1파운드를 베어줘야 할 위기에 몰린 이유도 무역선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돼 안토니오가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예전보다 모험심이 너무 많이 줄어든 것 아냐?”
“맞아요. 베네치아 처녀 스무 명 중에서 전하의 능력을 확인하고도 겨우 일곱 명밖에 안 따라왔어요. 옛날 같았으면 스무 명 중에서 스물두 명이 따라왔을 거여요.”
100퍼센트를 넘어 지나가던 배에서 소문을 들은 처녀들까지 급하게 배를 몰아 따라왔을 거라는 비유였다. 그만큼 예전에는 베네치아의 상인뿐만 아니라 처녀들도 용기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해적은 반드시 없애줄게. 크레타 섬 주변에서 수에즈와 예루살렘 앞까지 중립해역 설정을 추진해보마. 단,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베네치아와 함께 오스만을 상대로 외교적 노력을 해보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해도 전하께서 당연히 이기지 않아요?”
예쁜 여자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우러러보자 이민호가 우쭐해졌다. 밤마다 베네치아 시녀들을 안아서 이미 한 차례씩 돌았고 이제는 새로이 안는 중이었다. 베네치아 시녀들과 보낸 밤을 생각할 때마다 이민호가 불끈해졌다.
“우리 예쁜 에밀리아는 어떻게 알아?”
“어머! 배 추진 방식과 함포 성능만으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선풍기와 전화라는 것도 이 배에 타고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지상군을 많이 투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 유럽과 달리 오스만 제국에서는 십만 단위 병력을 우습게 투입하잖아? 최소 3만은 있어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어.”
전투 자체만이라면 오스만 제국이 투입한 병력의 10분의 1 이하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점령지를 관리하고 보급로를 지키려면 전투에 투입되는 병력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은 북미를 개척하느라 병력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대규모로 병력 확충을 하지 않는다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1만 이상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외교가 우선이야. 전쟁은 마지막 선택지로 뒤로 미뤄놓자. 알았지?”
“네에~”
귀엽게도 베네치아 시녀들이 일제히 합창했다. 베네치아 시녀들이 주변 정세를 자세히 알고 있어서 이민호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민호는 어떻게든 베네치아 상선들을 아시아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에스파냐를 제외한 서유럽이 가난한 현재, 동유럽의 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헝가리 주변은 양쪽 진영이 병력을 계속 투입해 전쟁 중이라 잘하면 군수품을 양쪽에 대량으로 판매할 수도 있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 본토와 본격적으로 교역을 해도 큰 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을 선택하면 페르시아와 어느 정도 척을 질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는 전쟁을 하면서도 적국과 무역을 하는 자유분방한 도시국가였지만, 이민호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과 가까워질 경우 페르시아 건너편에 위치한 아부다비가 조금 걱정됐다.
“꺄악~”
베네치아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다시 파도가 거세어지면서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배가 위아래로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해군이나 평소 바다에서 자주 배를 탔던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수송선에 탄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조금 걱정됐다. 이틀 사이에 사망자가 벌써 여섯 명이나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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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어버렸으니 다음 회는 오후 늦게나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