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07화 (456/1,000)

00507  52. 북유럽  =========================================================================

일단 아일랜드 사람들이 너무 불쌍했고, 한때 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인 출신으로서 아일랜드의 불행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에스파냐가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도운 적이 있어서 외국에서 아일랜드를 지원하는 것이 전혀 새로울 것도 없었다.

“좋다. 매달 2천 정씩 머스킷 2만 정을 넘겨주겠다.”

“헉! 그 정도면 잉글랜드와 제대로 싸워볼 만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국왕폐하!”

“대신 고산국에서 지원한다는 사실은 비밀을 유지하도록. 고산국은 유럽에서 오래도록 무역을 할 예정이라 가급적 다른 나라에 군사적 위협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식량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배급이 되지 않을 경우 즉각 무기 공급을 끊겠다.”

공개적으로 아일랜드를 지원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장이 빈약한 고산국 상선이나 이민선이 잉글랜드 군함이나 사략선으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넓은 바다에서 해전을 벌인다면 3인치 함포 1~2문을 탑재한 고산국 상선이 범선 열 척을 상대로도 패할 리가 없겠지만, 항구에 정박 중에 보병들이 몰려온다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인수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유럽에서 사서 줘야 할 것 같은데.”

일단 고산국은 멀기도 하고, 고산국에서 생산해 아시아 몇 나라에 판매한 머스킷을 공급했다가는 자칫 아일랜드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러 나설까봐 겁났다. 몇 년 전에 안남이나 아이누 섬에 판 화승총과 달리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유럽 해적들의 공격에 대비해 머스킷의 성능을 유럽제보다 약간 상향시켰다.

그래서 이민호는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잉글랜드와 비슷한 수준의 머스킷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나라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민호가 당장 아는 곳이 없었다.

“비올레타! 총기를 구입하려면 프랑스가 가장 낫지 않겠소?”

“잉글랜드 해군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은 런던에 가까운 템스 강 하구도, 얼마 전에 우리 함대가 잉글랜드 함대와 대치했던 포츠머스도 아니에요. 남서쪽 플리머스에요.”

“아! 해협 입구를 잉글랜드 해군이 지키고 있구려.”

해협이 봉쇄되거나 잉글랜드 사략선에 나포될 가능성이 높아 아일랜드에서 프랑스나 네덜란드로부터 총기를 대량 수입하기는 어려웠다. 프랑스 서쪽 브르타뉴 지방은 잉글랜드 함대의 통제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 오묘한 곳이라 앙리 4세가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서 배제했다. 그럼 남는 곳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에스파냐가 아일랜드를 지원했어요. 제 고향 비베이로에서도 머스킷을 만들어 아일랜드 배에 싣는 것을 봤어요. 비고와 아코루냐에서도 머스킷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어요.”

“오! 비올레타! 역시 그대는 나의 북극성이오.”

“어머나! 저는 북두칠성 중 하나로 족해요.”

아코루냐는 갈리시아어 지명이었고 정식 이름은 라코루냐였다. 이민호는 데포르티보로 시작하는 에스파냐 축구 클럽 이름으로만 어렴풋이 기억했다.

“전령은 들어라! 갈리시아 여러 도시에서 머스킷을 만들어 매달 이천 정씩 보내도록 하겠다. 아일랜드 해방군이 확실히 장악한 지역이 어디지? 갈리시아 배가 머스킷을 인도할 항구를 정하도록 하게.”

“남부는 노르만 정착지를 포함해 저희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습니다만, 도로 사정이 좋은 트라모레가 좋겠습니다.”

지도에서 트라모레를 찾았다. 아일랜드 지도는 게일어와 영어 두 가지로 표기되어 헛갈렸다. 트라모레는 아일랜드 남쪽 항구이며 동쪽 바다 건너편이 웨일즈였다.

“여기? 알았다. 식량을 먼저 공급할 테니 조급한 마음으로 식량을 횡령할 생각은 관두는 게 좋아. 머스킷은 충분히 공급할 거야. 남는 건 다른 독립 무장단체에게 나눠주는 편이 좋겠지?”

“감사합니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다른 세력에게도 분배하겠습니다.”

무기가 권력인 시대에 과연 머스킷을 다른 세력에게 나눠줄지 알 수 없었다. 강대한 적을 앞두고도 내부 노선 투쟁 등으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흔한 것이 독립전쟁이었다. 20세기 전반에 아일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노선 차이로 내전을 겪었다.

마침 더블린 항구에 갈리시아에서 온 무역선이 있어서 비올레타의 이름으로 선장을 불렀다. 비올레타의 시녀가 된 하급 귀족 영애가 선장을 알아보고 신뢰도가 높다고 귓속말을 해줬다.

“갈리시아 여러 도시에 머스킷 제작을 맡겨서 매달 트라모레의 아일랜드 해방군 조직에 넘기면 된다.”

선장은 이민호에게 설명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밀수를 하라는 명령이시군요. 그것도 무기 밀수! 잉글랜드 군함에게 걸리면 사형입니다.”

“그렇다. 잉글랜드 군함에게서 벗어날 자신이 없나보군.”

“자신이 없냐고요? 제 배는 켈트 해와 비스케이 만에서 빠르기로 유명한 밀레니엄 팔코넷입니다. 무장도 강력한 편이라서 한때는 잉글랜드 함대의 부사령관 드레이크 선장과 맞장을 뜬 적도 있었습니다.”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이 시선을 내려 선장의 의족에 집중했다. 캡틴 드레이크와 맞장을 뜬 결과를 선장에게서 직접 들을 필요가 없었다.

“먼저 머스킷 2천 정을 살 금화를 내주겠다. 잉글랜드에선 머스킷 한 정이 3파운드인데 에스파냐에서는 얼만가?”

17세기로 넘어가면서 은 1파운드가 잉글랜드 화폐 3파운드에 해당했다. 잉글랜드 머스킷 한 정에 은 열두 냥이 넘었다. 조선 후기에 제대로 만든 조총 한 정이 백미 3석 5말, 싸게 대충 만든 조총이 2석에 해당했으니 유럽 머스킷의 가격이 훨씬 비싼 셈이었다. 현대 총기 가격에 비해서도 몇 배나 비쌌다.

“군용 머스킷이라면 금화로 보통 7두캇입니다, 폐하.”

“생산지가 다르더라도 총구 구경을 통일시키도록 해라. 운송비를 포함해 한 정에 10두캇을 주겠다.”

“운송비가 매달 6천 두캇이나 빠지는군요. 목숨을 바쳐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폐하!”

“두 번째 달부터는 트라모레에 가기 전에 다른 도시를 들러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는지 먼저 확인하고, 만약 굶주린 사람이 있거든 운송을 중단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 아일랜드 해방군 전령의 표정을 살폈다. 전령은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협상을 마치고 전령은 국왕좌승함 옆으로 지나가는 어선 위로 뛰어내렸다. 전령이 잽싸게 어선 선실로 숨어들었다. 아일랜드 해방군은 더블린 내부에도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전령이 아니라 사절 정도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젊어 보이지만 어쩌면 의외로 높은 직위에 있을지도 모르겠소.”

이 기회를 잉글랜드를 침공할 명분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이민호는 일단 기근 구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앞으로 독립운동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일랜드에서 예상보다 더 많은 이민을 받을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독립 무장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앞으로 좋을 수도,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엉덩이가 따스한 곳이어야 비로소 조국이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듯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주민들의 북미 이민을 막을 자격이 없었다. 이민호는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농업과 공업, 상업과 광업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 하도 고생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라 탄광에서도 열심히 일할 것 같았다.

함대가 출발하기 직전에 박 주부가 인사하러 부두에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쁠 테니 오지 말라고 이민호가 특별히 명했다.

“그럼 박 주부가 수고하게. 곧 다시 볼지도 모르겠어. 의료진은 더 필요하지 않나?”

“의사 20명에 간호사 30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현지 인력을 충분히 고용했고 구교 쪽에서 도와줘서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뭔가?”

수용소 주위를 지키는 잉글랜드 병사들과 달리 화려한 복장을 한 잉글랜드 병사들과 관리가 항구로 다가왔다. 처음에 이민호를 만나러왔나 싶었지만 이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 주부를 만나러 온 아일랜드 총독부 관리였다.

“총독부에서 수금하러 온 모양입니다. 전하께서 출발하신 다음에 따로 돈을 보낸다고 했는데도 사람을 안 믿습니다.”

“이민을 보내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건가? 사람을 파는 거야?”

“명목상 수용소 토지 임대료와 선박의 항구 이용료를 총독부에서 받습니다. 그러나 배에 태워 데려가는 사람 기준으로 달라집니다.”

“빌어먹을!”

영국과 교섭할 때는 아무 대가 없이 아일랜드 주민들을 이주시키기로 했는데 아일랜드 총독부에서는 돈을 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인당 금화 1두캇이라면 사람값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낮아서 사람을 판다고 비난하기에도 애매한 액수였다.

“수용소를 지키는 잉글랜드 병사들도 공짜는 아닙니다. 이들의 주둔 비용을 수용소에서 따로 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50명이 교대하는데 200명 주둔 비용을 달라고 합니다.”

“갑자기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싶어지는군.”

만약 함대가 이번 유럽 순행에서 가장 먼저 아일랜드에 들렀다면 고산국 본토로 바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함선 60여 척과 고산국 육군 전체를 끌고 왔을지도 몰랐다.

“참으십시오, 전하. 나중에 아일랜드 출신으로 여단 몇 개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좋고. 그럼 수고하게.”

“본국까지 평안히 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전하.”

수송선에 태운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연령별 성별 분포도를 조사해서 작성한 표를 아침에 봤었다. 2천여 명 중에서 군인이 될 만한 젊은이가 200명 이하, 겨우 1할에 미치지 못했다. 열혈 청년들은 잉글랜드 지주에게 저항하다가 이미 맞아죽었거나, 아일랜드 해방군에 속해 싸우고 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배가 부두에서 떠나는 동안 박 주부가 부두에서 무릎을 꿇고 국왕좌승함을 향해 절을 했다. 이민호는 박 주부의 강렬한 염원이 전해지는 듯해서 혀를 찼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참 불쌍하오.”

“가능하다면 도와주세요, 전하.”

“물론이오. 하지만 역시 분쟁 지역에는 젊은 남자가 적소.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농경지를 배분하더라도 일손이 크게 부족할 것 같소.”

“실망하지 마세요, 전하. 대신 아이들이 많아요.”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이 희망이었다. 아이들이 있는 한은 힘겹더라도 미래를 열어갈 꿈을 꿀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잘 먹은 아일랜드 아이들의 표정이 활짝 피었고,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던 어른들도 아이들 덕택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을 키워서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군인으로 키우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족할 인력이 더 부족해질 것 같소.”

“에스파냐도 멕시코 원주민들 대하는 것을 보면 사실 별로 나을 것도 없지만, 잉글랜드는 더 심한 것 같아요.”

“아무리 야만인들이라도 피정복민에게 저렇게 심하게 대우하지는 않소.”

야만인의 범주에서 포로를 잡아먹는 식인종들은 쏙 뺐다. 이민호는 식인종들을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푸아 섬에서 추진하는 가축 방목 계획은 아직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함대는 더블린의 항구인 리피 강 하구를 떠났다. 그리고 남쪽으로 항해해서 트라모레의 위치를 확인하고 수심과 해안선 측량을 마쳤다. 강 하구 안쪽 깊숙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서 유사시 다른 항구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 같았다. 머스킷을 실은 갈리시아의 상선들이 영국 함대를 상대로 잘 빠져나가길 기원했다.

트라모레에서 나온 함대는 서쪽으로 향했다. 곧 대서양의 거친 대양이 함대를 맞이했다. 얼마 전에 폭풍이 지나갔는지 하늘은 파란데 바다는 몹시 출렁거렸다.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려서 주변을 둘러보면 배가 몇 척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늦게라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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