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05화 (454/1,000)

00505  52. 북유럽  =========================================================================

셰틀랜드에서 북서쪽 300여 km 떨어진 페로 제도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를 잇는 삼각형의 중앙에 위치한 섬들이었다.

페로 제도는 수백 년 전 노르웨이 바이킹이 개척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덴마크 영토였다. 빙하 협곡 몇 곳이 항구로 쓰기에 매우 적합해서 이민호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곳이었다. 섬에 큰 나무는 없고 주로 산지 초원으로 구성됐는데 길이가 짧은 강과 폭포가 섞여서 대단히 멋진 풍광을 자랑했다.

“붙은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뉘어져 있고, 다른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붙어있어. 지형이 꽤나 복잡해.”

순양함 12척이 페로 제도에 흩어져 해안선을 측량했다. 자그마한 섬들인데도 완전히 측량하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해변 마을 앞을 지날 때마다 주민들 수십 명이 창을 들고 몰려나와 마을을 지키려고 해서 안쓰러웠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해적들이 오다가다 약탈하기 좋은 곳이라 주민들이 몹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고산국 함대는 해적이 아니라고 섬 주민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기에 아예 접촉하지 않기로 했다.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도 안 통해요. 아마 고대 노르웨이 말과 비슷할 거여요.”

“그것 참. 고대 북유럽 <사가>를 읽게 하면 해석이 가능할 것 같소.”

가장 크고 긴 스트뢰뫼 섬 남쪽 토르스하운, 토르의 항구라는 지역에 덴마크 관리들 몇이 주재하고 있어서 대화를 시도했다. 지명은 이들이 가르쳐줘서 처음 알았다.

스페인어, 불어는 통하지 않고 독일어로 간신히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밀항자 독일인 양조업자가 모처럼 밥값을 했다. 다만 현지 주민과 대화하려면 이민호, 불어 통역, 양조업자, 덴마크 관리, 현지 주민으로 이어지는 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약탈하려면 하라고? 풋!”

고산국 함대가 작은 항구에 들이닥치자 덴마크 관리들이 머스킷을 멀찌감치 내던지고, 주민 대표들은 창을 내려놓았다. 아예 자포자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군함 10여 척에서 대포를 쏜다면 방어 자체를 포기하는 게 나았다.

“함장! 이들에게 식량을 내줘. 곡식하고 고기, 향신료도 남는 게 있으면 줘.”

식량 외에도 북미 원주민에게 나눠줄 칼과 창날을 주민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흑색화약도 페로 섬의 덴마크 관리들에게 나눠주었다. 덴마크 관리들과 주민 대표들이 의심스러워 하다가 화약과 칼까지 넘겨주자 이제는 확실히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아시아의 귀족님! 페로 제도는 대양 한가운데에 있는 섬이라서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어렵습니다. 덴마크 왕국에서도 이제는 거의 포기했습니다. 왕국에서 이 섬에 자치권을 많이 내어줄수록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16세기 내내 덴마크가 잉글랜드에게 이 섬을 사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잉글랜드가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이민호는 덴마크와 국교를 수립할 경우 아이슬란드와 함께 페로 제도를 구입할 예정이었다.

“어딜 가나 해적이 문제군. 그렇다면 해적들을 상대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주겠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태극기라고, 고산국의 국기일세.”

원래 국왕 가문의 문장에 불과했으나 얼렁뚱땅 고산국 국기가 된 태극기를 건넸다. 주민 대표들은 긴가민가했으나 이민호의 확고한 표정을 확인하곤 받아들였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과 주변 가장 높은 언덕에 태극기를 꽂아두기로 했다.

덴마크 관리들은 본국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고산국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았다. 심지어 북미를 매입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페로 제도가 덴마크 영토라고 했지? 알았어. 나중에 덴마크 왕국에서 허락을 받을 테니 앞으로 고산국 배들이 이 항구에 정박할 수 있도록 해줘. 다른 건 필요 없고 깨끗한 물만 구해준다면 식량이나 도구 같은 것을 줄 거야. 배마다 크기에 따라 입항료를 적당히 책정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고산국 귀족님. 북미 대륙을 에스파냐에게서 매입했다면 필시 고산국은 강대국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페로 제도를 덴마크 왕국으로부터 매입해주십시오. 저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엉뚱하게 덴마크 관리들이 하는 소리였다. 외딴 섬에서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관리들이 불쌍했다. 주민들도 덴마크 관리들은 의무를 다했다고 옹호해줬다. 오죽했으면 식민지 관리와 식민지 주민들이 공동운명체가 됐을까 싶었다.

덴마크는 얼마 전까지 북방의 강자였으며 11세기에 한때는 잉글랜드의 정복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마르 동맹이 무너지고 스웨덴이 독립하면서 이제는 덴마크가 쪼그라드는 시기였다.

“글쎄. 페로 제도는 대서양 항로에서 살짝 벗어난 지역이라 별로 도움이 안 돼. 가끔 풍랑에 밀린 범선들이 기착하기에 좋은 지역일 뿐이야.”

“큰 배를 보유한 고산국은 아니더라도 북미에서 교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북유럽의 작은 범선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섬과 섬으로 건너뛰는 방식으로 운행하는 작은 배들에게도 이 섬은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될 것입니다.”

“알았어. 가격이 싸다면 매입을 고려해볼게.”

고산국 입장에서는 페로 제도를 반드시 매입할 이유는 없었지만 장기적으로 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관심을 뒀다. 즉 대서양으로 북미와 유럽을 가른다면, 페로 제도를 고산국이 영유함으로써 중간 경계선을 유럽 쪽으로 확 밀어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페로 제도를 갖게 되면 병력을 파견해서 지켜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민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병력의 분산이었다.

“고산국 대왕님! 주민 대표로서 한 말씀 드립니다.”

“말해보게.”

“저희들을 머스킷으로 무장시켜 주십시오. 그럼 최소한 해적을 상대로 페로 제도를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해적선이 대여섯 척씩 몰려다니면 상대하기 어려워. 알았어. 그럼 총도 주고 대포도 주지. 해적들을 상대로 그대들의 삶의 터전을 잘 지키도록 해.”

화승총 300정과 흑색화약 몇 통을 나눠줘서 섬마다 분배하도록 했다. 그리고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전장식 대포 몇 문을 배에서 내렸다. 둥근 철탄도 수십 개를 넘겼다. 덴마크 관리들과 페로 섬 주민들이 어리둥절했다.

“예? 그럼 저희들이 독립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독립할 거야? 그럼 해. 상관없어.”

그러나 이 시기 페로 제도의 인구 겨우 5천 이하로 독립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페로 제도 주민들은 총칼과 포화가 난무하는 이 시대 기준으로는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사실 덴마크는 더 이상 페로 제도를 지켜줄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고산국에서 페로 제도를 매입하길 원합니다.”

“고려해볼 테니 자꾸 사달라고 하지 마. 요즘 온 천지에 영토가 매물로 나와 있지만 그걸 지킬 방법이 없어서 우리가 일일이 사줄 수가 없어. 이 섬도 마찬가지야.”

절망에 빠진 덴마크 관리들의 표정이 보기에 참으로 안쓰러웠다. 한때 막강했던 바이킹의 후손에서 지금은 해적들의 만만한 표적으로 전락한 주민 대표들도 불쌍했다.

“하지만 덴마크로부터 싸게 살 수 있다면 고려해보지. 그리고 만약 고산국 영토가 된다면 페로 제도에서 고래 사냥은 금지야. 대신 오징어를 잡아서 말린다면 양고기나 쇠고기와 바꿔 주겠네.”

“저희들을 지켜주신다면 고래를 잡지 않겠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만으로도 식량은 충분합니다. 오징어를 잡아서 다른 물건으로 교역하는 길을 모색해보겠습니다.”

이민호는 페로 제도 주민들에게 배짱을 튕기면서 받아들였다. 매입 협상은 나중에 덴마크에서 가격을 제시하면 다시 하기로 했다. 덴마크 관리들이 신이 나서 본국으로 범선을 띄울 준비를 했다.

이민호가 제시한 페로 제도의 가격은 에스파냐 금화 1만 두캇이었다. 국왕 부부에게 선물로 바칠 옥 도자기와 진주목걸이가 이 거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페로 제도에서는 매년 오징어 떼를 따라온 들쇠고래를 잡는 축제가 열린다. 작은 배 몇 척이 들쇠고래 떼를 해안으로 몰아붙이면 사람들이 칼날로 들쇠고래를 잡아 해안 전체를 피로 물들였다.

페로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이며 상업적 포경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현대에 들어서서는 쓸데없는 학살일 뿐이었다. 이 시대에도 보관하기 쉬워 고래 고기를 먹는다지만 딱히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없어서 먹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 해적이 자꾸 오는 거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해적 놈들입니다. 사실은 대구를 잡으러 오는 어민들인데 대포와 머스킷으로 무장을 해서 항구에 쳐들어옵니다.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하! 그럼 앞으로 안심하게나. 태극기가 자네들을 지켜줄 거야.”

에든버러에서 조금 찝찝했던 마음을 다 털게 됐다. 앞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선박이 페로 제도에 접근할 일은 없었다.

다음 날 함대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 해협을 지나 남쪽으로 향했다. 잉글랜드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맨 섬 옆을 지나 더블린 항구에 들어섰다.

오전부터 더블린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순양함들이 부두에 접안하는 사이 잉글랜드 병사들이 몰려와서 홋줄을 잡아주었다.

“반란이 일어났나?”

“그렇습니다, 고산국 귀족님. 아일랜드 반란군 놈들이 요즘 매일 같이 더블린으로 쳐들어옵니다. 더블린이 함락되기 전에 본토에서 증원군이 와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고산국 함대가 포츠머스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함대와 대치하고 템스 강 하구에서 문제를 일이키기도 했지만 더블린에서 고산국과 잉글랜드 군대의 협조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아일랜드 사람들을 북미로 이주시키는 것은 고산국과 잉글랜드, 아일랜드까지 세 나라의 국익이 모두 합치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지주들이 농경지를 침탈하지 않았더라도 아일랜드 인구는 이미 농업생산력을 초과해서 부양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먹는 곡식 양을 줄이려고 얼마 전부터 잉글랜드 지주들이 소작농들에게 감자 경작을 강요했다. 그러나 저항이 극심해서 아직 감자가 아일랜드의 주식이 되지 않았다. 감자 잎마름병이 번지지 않은 시대인데도 아일랜드의 식량 사정은 최악을 달렸다.

“수고하는군.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많이 남았나?”

“예. 며칠 전에 고산국 여객선이 떠났는데도 벌써 3천 명이나 더 몰려왔습니다.”

잉글랜드 장교의 안내를 받아 그들이 관리하는 임시 수용소를 살펴봤다. 일단 수용소의 규모는 적당히 크고 수용시설도 깔끔한 편이었다.

이민 희망자는 수용소에 들어오자마자 누더기를 벗어 불태우고 목욕을 마친 다음 새 옷을 입고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는다. 여객선을 기다리는 사이 충분히 먹여 체력을 회복해서 항해 중에 허무하게 죽어나가지 않도록 세심히 신경을 썼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박 주부! 제발 절하지는 말게.”

“아하하! 버릇이 돼서 말입니다.”

어느덧 50대에 이른 고산국 의사는 마카오에서 서양 의학을 배우기 전에 조선에서 원래 돌팔이 약재상이었다. 정식 한의사보다는 못해도 보약을 짓거나 음식 종류를 선정해 사람들이 원기를 보충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주부라는 호칭은 정식 관직이 아니라 별주부처럼 백성들이 의원에게 흔히 붙이는 경칭이었다. 약재상은 심봉사처럼 봉사로 불렀다. 조선의 의료기관인 혜민서 등에서 활동하는 중인계급 관리들의 직품에서 그 명칭이 나왔다.

“남자나 여자나 머리를 다 밀었군.”

“불쌍하지만 머릿니를 구제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다들 비쩍 말라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짧게 자르자 남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옷을 입어서 안 보이지만 다들 아래쪽 털도 밀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박 주부는 일반 환자에게는 자비롭지만 전염성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마지막으로 아일랜드에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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