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4 52. 북유럽 =========================================================================
다음 날 일찍 출발해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항 앞에 도착했다. 도시는 폭 10km의 널찍한 만 안쪽에 있었다. 항구도시 남쪽 언덕 높은 곳에 에든버러 성이 보이고, 그 언덕 북서쪽에 홀리루드 궁전이 서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니 파란색 바탕에 X자로 흰색 십자가, 즉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가 그려진 스코틀랜드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성 안드레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의 수호성인이었다.
“전하! 에든버러에는 교역하러 왔나요?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작전회의를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네요.”
“아니오, 비올레타. 잠깐 뭘 좀 사러 왔소. 겸사겸사 스코틀랜드 국왕과 인사를 나눠도 좋겠지만 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작전회의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니오.”
“저들의 움직임이 수상해요.”
함대는 항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함대가 항구 바깥에 대기하고 있으면 다른 곳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항구에서 관리가 작은 배를 타고 나올 것이고, 입항절차가 진행될 줄로 알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조만간 통합될 예정이라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로 원수진 일이 많아 지금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래서 잉글랜드와 충돌을 빚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와 전통적으로 친한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산국 함대를 열렬히 환영을 해주진 않더라도 최소한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줄 알았다.
- 퍼엉! 쏴아아~
해안요새에서 대포가 발사돼 고산국 함대를 뜨겁게 환영했다. 커다란 포탄이 날아와 순양함들 사이로 떨어지며 높다란 물기둥을 일으켰다. 그리고 국왕좌승함이 물벼락을 조금 맞았다.
“물러서! 퇴각!”
이민호가 서둘러 함대를 뒤로 물려 대포 사거리에서 벗어나게 했다. 환영은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공격당할 줄은 몰랐던 이민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스코트인들이 부두로 몰려나와 허둥지둥 빠져 나가는 고산국 함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우리가 누군지 확인도 않고 다짜고짜 대포를 쏴? 반격할까? 그냥 확 에든버러를 불태워버려?”
“저쪽에서 우리를 아는 듯해요, 전하.”
“비올레타? 말씀해보시오.”
“전하께서는 잉글랜드와 전통적으로 사이가 나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이용해 잉글랜드를 고립시키려 하세요.”
“맞소.”
그것이 이민호가 가진 상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정책이었다. 그러나 하필 지금은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항상 잉글랜드와 싸운 것은 아니에요. 현재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친 잉글랜드 파와 반 잉글랜드 파로 나뉘어 있어요. 국왕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죽거나 양위를 해줄 때까지 무조건 친 잉글랜드일 수밖에 없어요.”
“으음!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스코틀랜드는 포기해야겠소.”
국가를 왕가의 개인 재산으로 간주해 상속받을 수 있다는, 현대인 출신 이민호에게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 왕을 겸하더라도 왕가의 문제일 뿐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것이 되지 않았다. 양국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했더라도 두 나라는 같은 왕을 모시는 동군 연합이 될 뿐이었다.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으로의 통합은 100년이 지난 1707년에 이루어지고 그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수차례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나중에 일어날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 스코틀랜드 국민들 입장에서는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을 하더라도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것도, 역으로 흡수, 통합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왕을 모시는 다른 나라일 뿐이라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가 입장에서는 잉글랜드 왕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오.”
“맞아요. 언젠가 잉글랜드에 합병당해 2등 국민이 되겠지요.”
언덕의 성과 해안요새에서 쏜 대포 사정거리에서 벗어났을 때 이민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할까 말까 망설였다.
“반격하세요. 고산국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 결코 참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공격해도 실익이 없습니다, 전하. 차라리 나중에 스코틀랜드와 친선을 맺을 기회를 기다리십시오.”
비올레타와 전단장의 의견이 엇갈렸다. 둘 다 일리가 있어서 이민호가 망설이는 사이 항구에서 배 10여 척이 나와 함대를 추격해왔다. 전단 참모들은 그 배들을 스코틀랜드의 해적선이나 사략선으로 파악했다. 그 범선들은 고산국 함대에 접근하자마자 대포를 쐈다.
고산국 함대가 스코틀랜드의 수도에 아무런 위협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스코틀랜드에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이민호도 인정했다. 그러나 전혀 반격하지 않고 평화롭게 물러서는 중에 이렇게 실체적 위협을 가하는 행위까지 용납할 수는 없었다.
- 쿠웅!
국왕좌승함에도 둥그런 포탄 한 방을 맞았다. 추격전을 구경하는 에든버러 시민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범선들이 더욱 용감하게 돌격해왔다.
포탄에 맞은 부위가 두껍고 단단한 티크 목이라서 흠집도 나지 않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국왕좌승함과 수송선 보호를 가장 중요시하는 전단장도 즉각 반격하자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민호가 조건부로 반격을 허가했다.
“궁성은 빼고, 배와 해안요새만 공격한다. 적함부터 공격하겠다. 각 함선 5인치 포 일발씩 발사.”
“스코틀랜드 함선에 1전대 각 함별로 목표를 나눠 5인치 포 발사. 함수 함포는 상갑판을, 함미 함포는 하갑판을 노린다.”
전단장이 송화기를 잡고 전체 전단에 명령을 내렸고, 함장이 1전대장으로서 세부 지시를 내렸다. 작은 범선 한 척에 5인치 포탄 최소 2발은 과도한 화력이었다. 순양함들이 스코틀랜드 범선의 상갑판과 하갑판에 각각 한 발씩 발사했다.
범선 마스트에 명중하면서 폭발이 일어나고, 마스트가 부러져 돛대가 서서히 넘어졌다. 그 전에 상갑판은 이미 선원들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젖었다. 그 직후 선재를 뚫고 들어간 포탄이 하갑판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 콰쾅!
탄약고에 명중하지 않더라도 하갑판이 대포 갑판인 범선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11척 중에서 7척이 대폭발을 일으켰고, 나머지 배들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항구에서 구경하던 스코트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 쿠쿵!
범선들이 모두 침몰한 직후 순양함으로부터 해안요새에 대한 집중 포격이 시작됐다. 포탄이 정확히 요새에 떨어져 성벽이 무너지는 동안 에든버러 시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다. 순양함에 탑재된 5인치 포에서 각각 여섯 발 정도를 쏜 다음 요새는 평지로 변했다.
“불쾌하네. 배상금이라도 받을까?”
“정당한 교전을 했으면 그뿐이에요. 그냥 가요.”
“알았소.”
이민호가 망원경을 들어 홀리루드 궁전 쪽을 살폈다. 스코틀랜드 국왕과 귀족들인지 화려한 복장을 입은 사내들 십여 명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들을 향해 포격 명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잘 참으셨어요. 괜히 원수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맞는 말씀이오.”
스코틀랜드와의 접촉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함대를 이끌고 다니다 보면 항상 즐겁게 교역만 할 수는 없었다. 해안요새의 화력에 자신감을 가진 쪽에서는 이렇게 함대에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였다.
만약 제임스 6세가 원한을 품고 나중에 잉글랜드 국왕이 된 다음 고산국 상선을 공격한다면 그때 다시 제대로 혼쭐을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을 겸할 제임스 6세의 불안정한 위치에서 그런 과격한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섬나라라는 장점을 믿고 싸움을 건다면 후회하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는 뭐하러 왔죠? 교역할 상품도 남지 않았잖아요. 스코틀랜드 국왕을 만나기 위한 대비도 전혀 안 하셨어요.”
“아! 그냥 스코틀랜드에서 키운다는 양치기 개 몇 마리를 사려고 왔었소. 호주와 아이누 섬 양떼 목장에 보내려고 말이오.”
“스코틀랜드 목양견 콜리요?”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민호는 그저 명견 래시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민호는 스코틀랜드를 딱히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지만 군악대의 백파이프 음률은 꽤나 좋아했다. 군악대가 입는 체크무늬 킬트는 싫어했다. 속에 속옷을 입느니 안 입느니 말이 많았지만 안 입는 게 맞았다. 바람이 불어 킬트가 훌렁 뒤집어져 군악대원들 엉덩이가 드러난 사진을 보고 이민호는 눈이 썩는 줄 알았다.
“당분간 직접 사기 어려울 테니 아일랜드나 프랑스를 통해서 사세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북미 이민을 권하려 했는데 그것도 틀렸소.”
“교전 한 번으로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면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설 거여요.”
비올레타의 말에 이민호가 어리둥절했으나 생각해보니 여긴 유럽이었다. 싸움과 교역을 밤낮으로 바꿔가며 하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싸움 한 번 했다고 꽁해서 계속 원수지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함대는 스코틀랜드 북부를 빙 돌면서 측량을 계속했다. 북동쪽의 오크니 제도와 더 멀리 셰틀랜드 제도에서도 측량을 마쳤다. 물을 구하러 섬에 상륙한 해병들이 개 다섯 마리를 데려왔다.
“이게 셰틀랜드 쉽 도그라고? 털이 꽤 길군.”
발음이 욕 같았지만 간단히 말해 이 지역 목양견이었다. 그런데 이민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콜리나 보더 콜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몸무게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민호가 개의 기다란 주둥이를 손으로 덥석 잡자 개가 싫다고 낑낑거렸다.
“예. 아버님이 개를 좋아하셔서 현지 주민에게 은화를 주고 샀습니다.”
“효자로군. 그런데 개? 아니면 개고기?”
“둘 다 좋아하십니다. 특이하게 생긴 개는 반드시 한 번 맛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압수다. 대신 금화 한 닢을 주겠어.”
이민호가 국왕 소유의 개로 선포한 이후 목양견을 향해 군침을 삼키던 해병들이 포기했다. 육군이나 해병들이 여름에 야외 훈련 때 개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개들이 수병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국왕좌승함에 곧 적응한 개들이 사방을 뛰어다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주방에서 조리사들이 당번을 정해 개밥을 주었다.
“마르그레타가 강아지들을 너무 좋아해요. 대견하게도 강아지들이 아기님과 잘 놀아주고 보살펴줘요.”
“아직 너무 어리오. 마르그레타가 조금만 더 크면 같이 클 강아지를 구해주겠소.”
같은 품종의 개라도 성품에 따라 개성이 많이 달랐다. 보통 개들은 어린 인간 아기보다 서열이 높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서 아기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셰틀랜드 쉽 독은 인간 아기를 아기로 확실히 인식하고 잘 놀아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도 개는 개라서 혹시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 개에게 아기를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 동안 진돗개와 삽살개, 동경이, 풍산개 등 조선에서 입수한 개가 여러 품종이었다. 뚝 떨어진 마을마다 다른 품종의 개를 키우게 하고 혈통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동해국 여진족 청년들이 시베리아 오지 마을에서 데려온 대형견과 중형견 몇 가지 품종도 키우고 있었다. 이 모두가 군견 선정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진돗개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아서 훈련시키기 곤란했으며, 한 주인만 인정해서 결국 탈락했다.
그런데 개만 보면 군침을 흘리는 인간들이 많아 개들이 고산국에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비싼 개라고 해도 일단 잡아먹고 보는 개념 없는 인간들이 흔했다. 생각 같아서는 시베리아 탐사단에 소속시켜서 동일한 견종을 데려오게 하고 싶었지만 못 돌아올 가능성이 커서 벌금을 은 100냥씩 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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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끝내려 해도 유럽에 나라가 참 많군요. 다음 회는 페로 제도와 아일랜드입니다.
오후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