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3 52. 북유럽 =========================================================================
건설된 지 500년 넘은 자그마한 항구도시는 무척 예뻤다. 베르겐은 처음에 노르웨이인들이 건설한 도시였지만 중간에 한자 동맹에 가입하면서 시가지 일부는 독일 상인들이 건설했다. 시장 바로 북쪽에는 육중한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래된 교회도 서 있었다.
베르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대의 무역항이라서 영국이나 다른 외국 상인들도 자주 들르거나 거주해서 집도 예쁘고 거리도 예뻤다. 겨울이 다가오고 위도가 높은 지역이었으나 한양보다는 훨씬 따뜻해서 며칠 쉬어가도 좋을 것만 같았다.
항구 중심 툭 튀어 나온 지형에 요새가 있었지만 함대를 경계만 했을 뿐 포구를 돌리거나 병사들이 급히 움직이는 등 위협적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항구 앞에서 잠시 대기하는 사이 작은 배가 함대로 접근했다.
“혹시 아시아에서 온 고산국 배입니까?”
처음 입항한 곳인데도 항구 관리가 태극기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고산국과 에스파냐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 처음부터 스페인어로 물어서 이민호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북유럽이라 해서 고산국을 다 모르는 건 아니었고, 지역마다 인지도가 들쑥날쑥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쿡스하펜에서도 상인들은 고산국을 잘 알았고, 항구 관리들만 몰랐을 뿐이었다. 어쩌면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먼저 와서 소식을 알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교역할 상품은 많이 남지 않았지만 지나는 길에 인사라도 하러 왔다.”
“인사라! 좋은 습관이십니다, 귀족님. 다음에는 상품을 많이 실어오시면 더 좋겠습니다. 한자 동맹 베르겐 자유시에 입항을 허가합니다. 고산국 상선단을 환영합니다!”
항구 관리는 순양함의 포탑을 보면 군함이라는 사실을 대충 알 텐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순양함과 수송선들이 부두에 접안하기 전부터 한자 동맹 소속 독일인 상인들이 몰려나왔다. 현지 노르웨이 상인은 몇 안 된다는데 이민호가 보기에는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독일어 사전을 몇 가지 구했지만 아직 제대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통역은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하는 양조업자를 부르려 했으나, 상인들이 스페인어나 불어를 할 줄 알았기에 교역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유럽인들은 상인이 아니더라도 서너 개 언어는 기본적으로 구사하는 것 같소.”
“비슷한 말이라서 외국어를 배우기 쉬우니까요. 고산국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배우라고 부담 주지 마세요, 전하.”
부러워서 그냥 해본 소린데 비올레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민호도 학생들이 쓸데없이 많은 공부에 시달리지 않길 바랐다. 뭐든 필요하면 젊은이들이 기를 쓰고 배우기 마련이니 괜히 어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고산국에서도 학자가 될 학생들, 또는 특정 직업을 갖길 원하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장인이 되길 원하는 청년들은 물론이고 농사나 어업도 배워야 할 게 워낙 많은 일이라 책을 읽고 현장에서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이민호가 기대한 대로, 새로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나왔다. 구아노의 작물별 이상적인 배합법을 겨우 2년차 젊은 농부가 발견했다. 수습 딱지를 갓 뗀 어느 젊은 장인은 윤활유 성분을 약간 바꿈으로써 내연기관의 효율을 0.5퍼센트나 향상시켜 거의 30퍼센트에 도달했다. 가솔린기관보다 연소효율이 높은 디젤기관이 아직 3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 최소 5퍼센트, 길게 봐서 10퍼센트를 더 올려야 했다.
이민호가 부두에 내려 항구 관리, 그리고 상인 대표들을 만났다. 처음 가는 항구에서는 국왕보다는 귀족 행세를 하는 편이 여러 모로 유리했다.
“말로만 듣던 아시아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귀족님과 수행원들 용모가 라프 족과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다릅니다.”
“순록을 유목하는 랩 족이 노르웨이와 스웨덴 북쪽에 있지? 만나보고 싶지만 시간이 적어서 아쉽군.”
상인들 앞에 상품 견본 몇 가지를 쫙 깔았다. 물론 품목별로 재고가 표시됐다. 상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진 품목은 역시 향신료였다. 진주 목걸이는 프랑스 귀족 사회에 갓 유행이 시작됐으니 차차 전 유럽 상류사회에 퍼질 것으로 기대했다.
“아시아에서 아시아인이 직접 향신료를 가져온 것은 처음입니다. 후추와 계피는 각각 1500파운드로군요.”
“100파운드 단위로 경매를 시작하겠다.”
상인들이 눈치를 살피며 경매에 참가했다. 결국 1.2배 무게의 금으로 판매했다. 물량이 적어 아쉬웠지만 이제 후추와 계피는 각 함선의 주방에 있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없었다.
“가격은 함부르크하고 별 차이가 없네? 상인들이 서로 짠 것 아냐?”
상인들 일부는 귀족 작위를 갖고 있거나 실제 영지를 가진 진짜 귀족이었다. 그러나 20척 가까운 함대를 몰고 다니는 이민호를 당연히 자기들과 비교할 수 없는 대귀족으로 예우했다.
“함부르크와 같은 한자 동맹이니까 당연히 가격도 비슷합니다. 물론 발트 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싸집니다. 향신료는 이것뿐입니까?”
“육두구나 정향도 조금 있지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전매권을 넘겼다.”
“우와! 육두구와 정향요?”
전매권이란 향료제도에서 생산한 향신료에 한한 협정이었고 고산국 생산품은 해당되지 않지만 구태여 팔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집요하게 이민호를 설득했다.
후추와 계피는 수요가 많으면서도 인도와 실론 등 생산지도 많아 언제든 가격이 폭락할 위험이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이미 개통됐다. 앞으로 이슬람 해적 문제만 해결되면 유럽 상선들이 떼를 지어 향료제도로 몰려갈 테니 조만간 가격 하락은 불가피했다. 동인도제도에 가기 전에 인도와 실론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서 돌아가도 된다.
그러나 육두구와 정향은 아직 향료제도와 고산국 남부를 뺀 다른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다. 당연히 높은 가격이 더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이 지역에 오지도 않습니다. 중간에 몇 단계나 걸쳐서 사야 해서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제발 판매해주십시오.”
“육두구와 정향은 현지에서도 비싸. 거기서밖에 생산되지 않으니까.”
“설마 저희들이 사는 가격만큼 하겠습니까?”
“얼마에 사는데?”
“하하! 물건을 갖고 계신 귀족님께서 먼저 가격을 제시하셔야지요.”
약간의 밀고 당기기 후에 육두구와 정향을 스무 자루씩 판매하고 세 배 무게의 금을 받았다. 이민호가 비싸게 팔아서 좋아했는데, 상인들의 흡족한 표정을 보니 시세보다 약간 싸게 판 듯했다.
거래가 계속되면 결국 판매가격이 이 지역 시세 비슷하게 맞춰지게 마련이라 이민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거래일지에 ‘더 비싸게 팔 것’ 이라는 메모만 남겼다.
모직물과 면직물을 북미 원주민 선물용으로 조금만 남기고 다 팔았다. 이것도 인기가 좋았다.
“플랑드르에서 생산한 것과 품질이 다르지?”
“물론입니다, 귀족님. 올이 가늘면서도 훨씬 촘촘합니다. 가볍고 확실히 더 따스합니다.”
“그럼 가격이 더 높아야겠지?”
“당연합니다. 두 배가 어떨지요?”
“모직물은 세 배, 면직물은 두 배.”
“네......”
지금까지 팔다 남은 모피도 베르겐에서 싹 정리했다. 발트 해 연안에서 모피 가격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발트 해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판매했다면 효과가 더 크겠지만, 이번에는 안 들어가기로 해서 조금 아쉬웠다.
“판매만 하면 재미가 없지. 그런데 여기서 살 게 대구 말고는 별로 없어. 러시아에서 수출한 저급 모피를 조금 사도록 하지.”
“무두질 수준이 고산국과 전혀 다릅니다. 모피에서 루스 놈들이 싸갈긴 역한 오줌 냄새가 납니다.”
“그렇다면 견본 몇 장만 사야겠군. 혹시 노르웨이에 큰 배가 많나? 북미 동해안을 중심으로 앞으로 무역을 크게 하려는데 이런 작은 범선으로 북미에 갈 수 있겠어?”
북미에서 생산될 곡식과 담배, 면직물과 면화 등 부피가 큰 것을 옮기기에 네덜란드 선박만으로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자 동맹, 특히 베르겐의 상선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민호가 물어봤다.
“하하!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콜럼버스보다 400년 일찍 북미 대륙을 발견할 정도입니다. 항해 능력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역에 참가시켜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겠습니다.”
“당신들은 바이킹이 아니라 독일인들이잖아?”
“게르만이나 노르만 바이킹이나 그게 그겁니다. 노르만은 북방에 사는 게르만이라는 뜻입지요.”
“좋아. 해도를 나눠줄 테니까 알아서 북미로 찾아와. 면허장이 따로 없으니까 해도를 복제해서 다른 회사 배라도 얼마든지 와도 좋아. 범선이라면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내려갔다가 대서양을 빙 돌아야 하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지.”
국왕좌승함 함장을 불러서 대서양 항해 방법을 설명하게 했다. 대서양 중심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 버뮤다 섬과 사르갓소 무풍지대를 과장해서 겁을 좀 주었다. 그리고 노예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빈 배로 돌아다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도록 아프리카와 무역할 상품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괴혈병, 각기병 등 항해 관련 질병에 대해 증상을 언급하니 이 지역에서도 장기간 항해하는 선원들이 죽는 경우가 많아 상인들이 금방 이해했다. 함장은 말린 과일과 과일주스 등을 선원들에게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함장은 무역에도 소질이 있군.”
“저는 오래도록 함장을 하고 싶습니다, 전하.”
“물론이야. 평생 해군에서 함장으로 부려먹겠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전단장도 좋습니다.”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을 더 쌓아야지.”
함장은 전단장이 아니라 나중에 함대사령관을 하고도 남을 인재였다. 국왕좌승함 함장이 좋은 것이, 국왕 옆에서 여러 가지 중요도가 높은 것을 배울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다.
아이슬란드로 가려다가 깜빡한 것이 있어서 함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다음 날 아침 도착한 곳은 템스 강 하구였다. 수송선을 뒤로 빼고 순양함 12척을 강 하구에 쭉 늘여 세우니 장관이었다. 런던을 오가는 배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지나갔다.
“나는 잉글랜드 여왕폐하의 템스 강 관리인이오. 고산국 함대는 여기서 뭐하는 거요?”
“측량. 해안선을 해도에 기입하고 수심을 측정하고 있지.”
노 젓는 작은 배를 타고 접근한 잉글랜드 관리에게 이민호가 팔짱을 끼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관리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심과 해안선 측량이라니! 남의 바다에서 위험한 짓이오. 침략할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소!”
“어디까지가 잉글랜드의 바단데? 잉글랜드는 영해 선포를 안 했으니 알 수가 없잖아? 그리고 우리는 런던에 무역을 하기 전에 선박의 안전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 수집중일 뿐이야.”
변명과 달리 누가 봐도 침략 준비가 맞았다. 근해에 측량선 한 척만 파견해도 침략 준비라고 충분히 오해를 할 수 있는 시대에 거대한 함선 20척으로 이뤄진 함대가 수도로 통하는 강 하구를 봉쇄하고 수심을 잰다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파리를 지나는 센 강의 하구에서도 얼마 전에 똑같은 짓을 했었다.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항해 자유를 중시해 영해 선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해군력이 강할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에스파냐를 상대로 해전에서 이긴 다음이라서,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영해를 선포할 일도 없었다.
이민호는 바로 그런 빈틈을 노리고 합법적으로 잉글랜드를 강하게 압박했다.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일이 즐겁지는 않았으나, 북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 역사에서 북미 개척 초기에 이주민을 보낸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프랑스는 우호로, 네덜란드는 무역을 미끼로 국교를 맺고 대사를 교환하기로 했다. 사실상 두 나라로부터 고산국의 북미 영유를 인정받은 셈이었다. 에스파냐보다 해군력이 강해진 잉글랜드에게는 고산국의 직접적인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고산국에서 침공하는 줄 알고 런던에서 아주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나중에 들었다. 지난번 잉글랜드 해군이 보는 앞에서 프랑스 사략선들을 몰살시킨 이후 고산국 함대의 위력이 과장되어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런던을 침공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다. 템스 강 연안을 따라 요새를 배치한 런던을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한나절 동안 시간을 때우며 태양이 남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경도를 측정한 다음 항로를 북으로 돌렸다. 영국 왕실에서 급히 사절단을 보냈다는데 만나지 않고 떠났다. 무슨 총사령관인가 어디 백작인가 하는 반역자도 사신을 보냈다는데 함대는 이미 떠난 다음이었다.
고산국 함대는 브리튼 섬 중앙에 위치한 위어 강 하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선덜랜드 백작령이 생기기도 전이라 강 주변 농경지와 농가만 몇 채 있었고, 군사적 위협은커녕 사절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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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올리고 자러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