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2 52. 북유럽 =========================================================================
한자 동맹 소속 자유시들 사이에서는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겠지만 독일 내륙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그런 땅에서 살아온 독일인 해방노예들은 태연한 얼굴로 수송선에서 내렸다. 그리고 국왕좌승함에 최대한 가까이 와서 무릎을 꿇은 다음 절을 하고 떠나갔다.
“어? 유럽인들도 절을 하네?”
“그냥 땅에 엎드리는 거여요. 동양식 절과 조금 달라요.”
비올레타가 이민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영주들이 길을 지나갈 때 밭에서 일하던 농노들이 땅에 엎드려 있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것 같았다. 마치 종로에서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당상관들에게 백성들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럴 때는 피맛길로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민호가 독일인 해방노예들에게 계속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나눴다. 고향에 갈 노잣돈은 충분하겠지만 이민호는 그들의 안전이 몹시 걱정됐다. 그리고 내년에 과연 저들이 이곳 항구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수송선에서 상인들을 불러 각종 향신료와 옥 도자기, 진주 등을 소량, 거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조금씩만 거래했다. 향신료와 동양의 도자기를 판다는 소문을 듣고 부두로 상인 수십 명이 몰려왔다. 이들 대부분은 함부르크가 아니라 발트 해 연안의 한자 동맹 소속 도시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후추와 계피를 스무 자루씩 팔았다. 포르투갈이 그렇게 오랫동안 팔고 고산국 건국 이후 에스파냐도 향신료 시장에 뛰어들었는데도 북유럽에서는 아직까지 같은 무게의 금이라는 공식이 지켜지고 있었다.
향신료를 적게 판 대신 네덜란드에서 팔지 않았던 면직물과 모직물을 대량으로 판매했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억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던 상인들의 처절한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막판에는 상인들끼리 서로 밀치며 싸웠다. 플랑드르에서 생산한 직물보다 확실히 고급 제품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판매보다는 홍보에 주력해서, 고산국 이름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직물은 양에 비해 이익이 많이 남는 상품이 아니었다. 대신 가격 변동 폭이 상대적으로 적어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상선의 주력 상품이 되면 괜찮은 품목이었다. 발트 해 상선들이 북미로 와서 식량과 함께 직접 사가도록 하는 편이 나았다.
“전하. 앞으로도 이곳에 계속 상선을 보낼 건가요? 교역하기 어렵다는 생각만 들어요.”
“물론이오. 함부르크는 한자 동맹 소속이오. 비록 쇠퇴했다 하나 소속 도시가 한때 80개나 됐다고 하니 북해와 발트 해 연안에 소문이 금방 퍼질 것이오.”
“언젠가는 발트 해로 진입할 작정이시군요?”
“이번에는 힘들 것 같지만 조만간 들어가야 하오. 저들이 직접 오는 것도 좋소.”
발트 해는 폴란드와 러시아 때문에 이민호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발트 해가 겨울에 얼어붙는 것 외에 큰 문제가 있었으니, 북해에서 발트 해로 진입할 때 폭이 좁은 해협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 덴마크 왕실의 최대 수입은 해협 세 곳을 지나는 배들에게서 걷는 통행세였다. 말로는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상선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받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라인 강이나 엘베 강변 곳곳에 세워진 요새와 역할이 똑같았다. 폭 3km의 외레순 해협에 위치한 헬싱외르의 크론보르 성에서는 통행세를 내지 않고 지나가는 배에 대포를 쏜다.
“그런데 발트 해 연안에서는 살 물건이 별로 없잖아요. 목재나 대구를 살 거여요? 고산국에서는 배를 만들 때 타르를 쓰지도 않잖아요. 무역 수지를 맞춰줄 방법이 없어요.”
“이 지역에서 팔 게 없으면 저들이 잘하는 해상 운송이나 시켜야지요. 아니면 용병으로 고용해도 되고. 망하게 두지 않고 오래도록 무역을 할 계획이니 걱정 마시오.”
네덜란드나 한자 동맹 자유도시들은 무역을 해서 이익을 못 보더라도 다른 나라들과 용선 계약을 맺어 운송에 주력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박 운송 자체가 무역에서 얻는 이익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큰돈이 되는데다가 일정 숫자 이상으로 선박 규모를 유지하고 선원에게 꾸준히 일자리를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유사시에 대규모 해군으로 전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경우 네덜란드 선박들 때문에 민간 선박 숫자와 선원, 즉 유사시 해군을 증강시킬 수 없었다. 결국 17세기 중반에 발효된 영국의 항해조례는 네덜란드를 겨냥했다.
“가만, 용병?”
이민호는 독일과 북유럽에서 용병들을 고용해 러시아를 칠까 고민했다. 러시아에 고용된 코사크의 동진을 막기 위해 끝도 없이 넓은 시베리아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힐 것 같았다. 발트 해 연안에서 상륙해 겨우 천 km만 가면 모스크바였다.
“왜 웃으세요? 또 특이한 생각을 하셨죠?”
“별로 특이할 건 없고 그저 용병을 동원해 내가 러시아 차르가 되는, 아니 러시아의 동쪽 국경을 우랄 산맥으로 제한할까 하고 말이오.”
이민호가 아주 잠시 망상에 빠졌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러시아 차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북방 영토 때문이군요? 용병 군대로 모스크바를 공격해 협박하거나 러시아의 동쪽 영토를 매입하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그래도 동쪽 국경에서 고산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한 번쯤은 보여줘야 할 거여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이 시대 유럽에서 루스 차르 국, 즉 러시아의 위상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 전 이반 4세 치하인 1558년 발트 해 연안 리보니아를 공격했으나 스웨덴과 덴마크에게 결국 밀려났다.
수십 년 동안 발트 해에 군사력이 묶인 동안 남동쪽의 크림한국에게 흑해 연안 영토를 약탈당하고 모스크바가 여러 번 공격당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 귀족들이 러시아를 잡아먹겠다고 나섰다. 이후 폴란드 영주들의 군대가 크렘린을 몇 번이나 점거했다.
그 사이 수송선 선장이 판매자로서 쿡스하펜 시청에 가서 세금을 납부했다. 그리고 고산국 상선으로서 국적을 등록하고 돛이나 깃발에 그리는 국기 도안도 정식으로 등록했다.
곧 한자 동맹 소속 모든 도시들에 복제돼 나중에 고산국 상선이 가면 어느 도시에서도 바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입항하는 도시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함부르크에서 쫄딱 망한 맥주 양조업자가 이민을 청했다. 이 사람은 고산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수송선에 탄 밀항자였다. 양조업자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양조업자가 말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파산했다고 하는데, 마치 대단한 양조 실력을 가진 것처럼 자랑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이민호는 이 시대의 평범한 상면발효 맥주를 만들 것이 아니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이민호는 하면발효 맥주가 섭씨 12도에서 잘 숙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면 좋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곳에서 맥주를 발효시킬 수 있나?”
“가능하긴 합니다, 영주님. 맥주 발효는 물이 얼 정도로 추우면 안 되고요, 너무 더워도 안 됩니다.”
“시원한 지하실에서 맥주를 발효시켜 보게.”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될 거야. 잘 안 되면 자넨 평생 탄광에서 일하게 될 테니까.”
“반드시 잘 될 겁니다, 영주님.”
네덜란드 맥주도 좋았지만 역시 맥주는 독일산이 최고였다. 빌헬름 4세가 1516년에 물과 보리, 호프 외에는 다른 원료를 섞지 못하도록 맥주 순수령을 내릴 정도였다.
19세기 후반에 암스테르담에서 설립된 하이네켄 맥주를 발효할 때 무슨 냉각 필터인지를 사용한다는데 이민호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그냥 모든 시험은 밀항한 양조업자에게 시키기로 했다.
다음 날 쿡스하펜에서 150km 북쪽, 덴마크 남부의 에스비에르에 도착했다. 어선 수백 척이 북적거리는 항구에 함대가 진입하면서 사고가 날까봐 조마조마했다. 북해 연안인 에스비에르가 덴마크 최대의 어항이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바글거릴지 몰랐다.
한자 동맹 함부르크 자유시의 교역선으로 등록하면서 쿡스하펜에서 받은 증서를 제시해 쉽게 부두에 접안할 수 있었다. 덴마크는 한자 동맹과 경쟁자 겸 협력자였기에 한자 동맹의 증서가 잘 통용됐다. 순양함들은 군함이라 입항이 거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항구 관리들이 처음 보는 형상이라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슬쩍 접안했다.
여기서도 고산국을 알리기 위해 상징적인 교역을 했다. 후추와 계피 서너 가마만으로도 고산국의 이름을 충격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었다. 판매대금으로 전단 일 년 운영비 정도는 충분히 뽑았다. 그런데 시장에서 의류를 판매하던 고산국 어용상인들이 이민호에게 달려왔다.
“문제가 있나?”
“예. 남성용 호즈(hose)가 규격이 너무 작고 얇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죽이 아닌 것은 처음 봤다고 항의합니다.”
“그거 여성용 타이츠(tights)라고 하게. 남성 겉옷이 아니라 여성 속옷 개념이야.”
다른 건 잘 팔렸는데 반응을 떠보기 위해 시장에 내놓은 스타킹을 두고 현지 상인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북유럽 덴마크에서도 남쪽처럼 남자들이 치마에 스타킹을 신는 경우가 흔했다. 하이힐도 남자들이 신었다. 루이 14세의 각선미가 당대 최고라서 초상화를 그릴 때 스타킹에 하이힐 신은 다리가 특히 강조됐다고 한다.
“가터벨트가 문화적인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 남자들이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하면 멋질 거야. 제기랄! 여자들이 착용하는 거라고 강조해!”
이민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마누엘 칸트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가터벨트를 제작했다. 물론 고산국에서는 여성용이지만, 유럽에서는 남성용으로 더 많이 판매됐다.
그 사이 전단장 및 전단 참모들과 함께 다음 입항지 후보들을 두고 고민했다. 발트 해에는 안 들어가기로 했지만 자꾸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덴마크의 수도 쾨펜하겐과 독일 북부 뤼벡이 눈에 밟혔다.
“책 내용과 달리 해방 노예들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스웨덴이 덴마크로부터 몇 십 년 전에 독립했다고 합니다. 혹시 가시겠습니까?”
“해협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군. 그린란드 문제를 확정지어야 하고 아이슬란드를 매입하기 위해 덴마크와 교섭하고 싶은데, 지금은 무리일 것 같소. 발트 해 진입은 포기하고 노르웨이로 갑시다.”
북유럽에는 일부 상인들 외에 고산국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괜히 지금 함대를 이끌고 덴마크 해협으로 들어갔다간 덴마크나 스웨덴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노르웨이가 현재 독립한 상태였다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문제를 노르웨이와 직접적으로 교섭해 해결할 기회였으나, 14세기 후반부터 노르웨이는 덴마크에 속하거나 동군 연합 상태였다. 노르웨이는 11세기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 발견을 묘사한 서사시 <빈란드 사가>를 근거로 뉴펀들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북미 원주민에 의해 축출됐으므로 고산국 입장에서는 쉽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북해 중심부에는 섬이 전혀 없었다. 밤새 항해한 함대는 다음 날 아침 지도상 노르웨이의 베르겐 앞바다에서 한참을 두고 고민했다. 북유럽의 마지막 항구를 앞두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많이 아쉬웠다.
“유럽에서 얻은 지도는 대충 참고만 해야겠소.”
“그래도 유럽 지도치고는 상세한 편입니다, 전하. 바깥에서 대충 살펴봐도 만 지형이 너무 복잡합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 즉 피요르드 협만은 빙하가 긁고 지나가면서 만든 좁고 긴 만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세계 지도를 봤을 때 노르웨이 서해안이 매끈한 것으로 인식했다. 가까이 보면 극악한 협곡지대에 바닷물이 들어온 지형이었다.
“지도에는 해안요새가 표시돼 있지 않지만, 혹시나 그 동안 건설했다면 바로 빠져 나옵시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기관을 장착한 단정을 앞세우겠습니다.”
단정에서 만의 수심을 재려고 했지만 너무 깊어서 포기했다. 다른 배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확인하고 함대가 한 줄로 무작정 들어갔다.
베르겐이라는 작은 항구도시로 가는데 좁은 만을 몇 십 km나 들어가야 했다. 가끔 반대편에서 나타난 한자 동맹 소속의 무역선들이 함대를 지나쳤다. 바다로 나가던 몇몇 배들은 돈 냄새를 맡고 선수를 돌려 함대를 따라왔다. 다행히 중간에 해안요새를 만나지 않고 베르겐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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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